[김연혜 기자] 올해로 51년 당령의 로당원 김성일(1952년생)은 자신이 거둔 성적에 대해 "당원이라는 본색에 걸맞게, 조직이 맡겨준 일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라고 겸허히 말한다.
김성일은 20년간 '정처급 간부'직을 담당하는 기간 도시환경관리 개혁에서 돌출한 기여를 하여 중국 백인 개혁개방뉴스인물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60년대 후반, 흑룡강성 밀산현 련주산공사 전 신민대대에 하향한 김성일은 젊은 나이지만 명석한 두뇌와 뛰여난 실무능력을 나타내며 민병련 중대장, 개혁위원회 부주임을 맡았고 1970년 11월에 입당해 당조직의 일원이 됐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찾아온다고 했던가, 1971년 김성일에게 청화대학 입학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그는 기층에서 더 단련하고 싶은 의욕으로 국내 최고 전당에서 배울 기회를 선뜻 타인에게 양보했다. 1972년에 참군한 그는 '군인정신'을 다지는 한편 자신의 리론수준과 사업능력을 부단히 키워나갔다.
1983년 1월 조직의 부름에 응해 김성일은 심양에서 인생의 제2막을 시작했다. 부대에서 퇴역한 그는 심양시 황고구 극검가두판사처 부주임, 심양시 황고구 명렴가두판사처 주임, 심양시 황고구 향공가두당위 서기, 심양시황고구환경위생관리국 국장, 심양시황고구도시건설관리국 국장 등 직을 력임하며 20년을 "군중들이 만족하고 사회가 만족하고 정부가 만족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사업에 정진했다.
2002년 2월, 심양시황고구환경위생관리국(후에 도시건설관리국으로 통합) 국장으로 발탁된 김성일은 큰 난관에 봉착한다. 다년간 기관의 불균형적인 재정지출로 인해 자금 엄중 부족, 분배 불공평 등으로 직원들의 근무태도 산만은 물론 불만도 컸으며 지어 일부 외부인원까지 청사로 쳐들어와 일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말이 국장이지 그동안 쌓인 문제들이 태산같아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황고구의 도로환경이 곧 우리 사업일군들의 얼굴이다." 김성일은 기관 간소화, 환경위생질 제고, 환경위생시장 확대 등으로 문제해결의 큰 가닥을 잡고 '환경위생 산업화 경영' 방식으로 환경위생관리메커니즘 개혁을 담차게 시도했다. 개혁을 다그치는 한편 직원들의 복지에도 신경을 기울였다. 일년여 시간의 개혁을 거쳐 황고구 환경위생관리는 질적 변화를 가져왔는데 상급 부문과 시민들의 호평을 받았다. 당시 성 주요 령도도 "황고구를 도시환경위생 관리의 모델으로 삼아야 한다"며 긍정했고 전국 각지에서 경험을 배우러 오는 참관단의 발길도 끊기지 않았다.
산만하고 흩어지고 무력한 행정기관을 과감한 개혁조치로 일약 전국 선진모델로 우뚝 세워 김성일은 2004년 '중국 제4회 100인 개혁개방뉴스인물'로 선정되고 국가에서 개인초상우표로 발행되는 영예까지 누렸다.
퇴직한 지도 어언 12년 째, 김성일은 중국서예가협회 회원으로 중국전통문화 '홍보대사'로, IOC국제델픽문화위원회 문화예술 고문으로 국내외에서 '실버파워'를 과시하고 있다.
"중국 서예는 중화민족의 근면하고 박식한 정신적 력량과 지혜를 담고 있으며 중화민족의 상징과 부호로 되고 있다." 어릴 때부터 서예공부를 시작해 일찍이 예서·해서·전서·초서를 숙달하여 현재는 초서체를 바탕으로 한 그의 서체 중화 산월천인(山月泉人)의 풍격을 형성했는데 서체가 자유분방하고 박력이 넘쳐 국내외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현재 중국문물박물관, 모택동기념관에 그의 서예작품이 소장돼있다. 그는 개인작업실외 국내외에도 여러개의 서화작업실과 예술교류기관을 소유하고 있다. 또 국가국정연구기관 연구원일 뿐만 아니라 료녕·사천·광동 등 10여개 성정(省情)연구기관 연구원으로도 활약하고 있다.
2013년 국제델픽문화위원회의 초청으로 독일에서 4년에 한번씩 진행되는 델픽문화대회에 참가해 현장에서 '중화룡' 서예퍼포먼스를 펼쳐 장내를 사로잡았는데 당시 한 독일인은 100만유로에 그의 서예작품을 구매하고 싶다고 했다. 김성일은 '중국의 저명한 서예대가', '영향력있는 글로벌 서예가', '글로벌문화무대 최초로 서예형태로 중화전통문화를 선보인 예술인' 등 타이틀을 가졌으며 2014년에는 중국인 최초로 국제델픽위원회 아시아국 고문으로 위촉됐다.
중화 전통문화에 대한 연구와 성과는 서예에서 '도덕경', '삼자경', '효경' 등 국학연구에까지 미쳤는데 그는 짬짬이 서예기예를 련마하고 있는 와중에도 국내외 초청으로 국학강의도 하고 있다. 《중장년성보건양생술》, 《새로운 사유는 인류사회 진보의 근본 동력이다》 등 저서도 편찬,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중화문화의 전승과 보급에 한몫할 수 있음에 영광을 느낀다는 김성일이다.
당창건 100돐을 경축하며 당중앙에서 수여한 50년 당령 기념장을 받아쥔 김성일은 "18살에 나라를 위해 평생 복무하겠다는 신념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한명의 보통당원으로 늘 초심을 명기하고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능력껏, 소신껏 당과 나라에 보답하고 싶다"고 담담하게 소감을 전했다.
2004년 '중국 제4회 100인 개혁개방뉴스인물'로 선정
서예작품을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9기 전국위원회 부주석 조남기(조선족)에게 증정
2014년 중국인 최초로 국제델픽위원회 아시아국 고문으로 위촉
김성일의 서예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