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유연하지 못했던 나
发布时间:26-09-09 03:22  发布人:金昌永    关键词:   

수필

유연하지 못했던 나

      (서란) 배영춘

사람은 언제부터 자신의 속도를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게 되었을까.

멈추면 뒤처지는 것 같고, 늦추면 무너질 것 같은 기분 속에서 우리는 하루를 견딘다. 숨이 가쁜 줄 알면서도 숨이 가쁘지 않은 얼굴로 걷는다.

나는 오래도록 그런 얼굴로 살았다.

일이 끊겨 오랫동안 쉬고만 있으니 불안함과 우울함이 번갈아 찾아왔다. 번아웃을 견디다 못해 집에서 가까운 안양천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우수수 떨어지는 나무잎 소리를 들으며 걷다 보니 발끝에 닿는 락엽들이 파도처럼 살포시 밀려왔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아래, 가을바람이 제법 시원하게 불어왔다.

강과 강 사이에 놓인 징검다리를 건너다 말고 쭈그리고 앉아 강물을 바라보았다. 물보라를 일으키며 흐르는 물줄기는 장애물을 만나도 멈추지 않았다. 돌을 만나면 부딪히기보다 그 우를 타고 넘거나, 살짝 몸을 틀어 다른 길을 찾아 나아갔다. 세월에 닳아 둥글어진 돌우를 미끄러지듯 흘러가는 물을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그 흐름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마치 “이렇게 가도 괜찮다”고 조용히 등을 떠미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만큼은 숨이 트이고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러나 강변을 벗어나 다시 일상의 길로 접어들자, 느슨해졌던 마음은 오래된 긴장 속으로 서서히 되돌아갔다.

나는 예전부터 속도를 조절하는 법보다 멈추는 법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였던 것 같다. 삶의 장애물 앞에서 늘 주춤거렸고, 부딪혀 상처 입을까 두려워 한 발을 빼곤 했다. 한번 빠지면 헤여나오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도 쉽게 들었다. 그런데 더 두려운 것은, 멈추지 못한 채 그대로 달리다가 어느 순간 중심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일이였다. 불안과 통제할 수 없다는 감각에 사로잡힐 때마다, 나는 직선이 아닌 물의 흐름 같은 길을 마음 속으로 그려 보곤 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결국 나는 병원으로 향했다.

전철 안, 사람들 사이에 끼여 서있는 동안 마음은 자꾸만 출렁거렸다. 손잡이를 잡지 못한 채 흔들리는 몸이, 내 안의 불안정함과 그대로 맞닿아 있는 듯했다. 창밖으로 스쳐 가는 빗줄기와 흐릿한 가로수의 륜곽을 바라보며, 나는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 나는 지금 멈출 수 있는 사람인가. 돌아볼 수 있는 사람인가. 받아들일 준비는 되여있는가.

진료실에서 의사의 말 한마디가 오래 남았다.

“조급함을 버리세요.”

그 말은 조언이라기보다 질문처럼 들렸다. 무엇을, 어디까지 내려놓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없었다. 나는 그동안 멈추지 않는 것이 성실함이라고 믿었고, 버티는 것이 책임이라고 여겨왔다. 내려놓으라는 말 앞에서 한동안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병원을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까지 그 말이 마음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쥐고 있는 것이 나를 지탱해 주는 줄 알았는데, 실은 그것이 나를 붙들어 매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뒤늦게 따라왔다. 내려놓는다는 것은 무너지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몸과 마음을 잠시 풀어두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집에 도착하자 무의식처럼 손이 먼저 움직였다. 서랍을 열고, 책장을 훑고, 구석에 밀려 있던 상자들을 꺼냈다. 스무 해 넘게 쌓아 두었던 책들과 물건들, 먼지 묻은 노트, 끝내 읽지 못한 책, 리유 없이 버리지 못했던 작은 물건들. 하나씩 꺼내여 들여다보고 다시 내려놓는 동안, 방 안의 공기가 조금씩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전철 안에서 느꼈던 답답함도 함께 빠져나가는 듯했다.

이 작은 정리는 나에게 뜻밖의 시작이 되였다. 아침마다 지인들에게 짧은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대단한 말을 적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결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다만 하루의 문턱에서 몇 줄의 문장을 남기는 일이, 나 자신에게 건네는 인사처럼 느껴졌다.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다는 사실을, 그 조용한 시간 속에서 조금씩 배워갔다.

대나무가 강한 바람에도 쉽게 꺾이지 않는 것은, 줄기가 단단해서가 아니라 바람이 불 때마다 몸을 낮추었다가 다시 일어설 줄 알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는 그동안 강해지려고만 애썼지, 약해지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밀어내고 버티는 것이 힘인 줄 알았지만, 유연하게 물러서는 자리에도 다른 종류의 힘이 숨어 있다는 것을 이제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요즘은 주말 계획을 일부러 세우지 않는다. 처음에는 그 빈 시간이 오히려 불안했다. 그러나 지금은 예기치 않게 흘러 들어오는 순간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산책하다가 리유 없이 발길이 멈춰 오래 서 있던 자리, 길가에서 마주친 낯선 강아지가 내 손등을 핥던 순간 같은 것들. 그런 짧은 장면들이 마음 속에 쌓인 긴장을 조금씩 풀어 준다.

얼마 전에는 한 지인이 보내온 텃밭 사진을 보았다. 씨앗을 뿌려 놓고 매일 들여다보며 흙을 파헤치다 오히려 싹을 상하게 했다는 이야기였다. 다시 씨앗을 심고 기다렸더니, 어느 날 조용히 흙을 밀어 올리며 새싹들이 모습을 드러냈다고 했다. 삶도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재촉하지 않아도, 믿고 두면 저마다의 속도로 올라오는 시간 말이다.

요즘도 가끔은 리유 없이 마음이 조급해진다. 여전히 나는 유연한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 다만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조급함을 밀어내기보다 잠시 바라볼 줄 알게 되였다는 것 정도다.

물은 여전히 돌을 만나면 방향을 바꾸고, 바람은 대나무를 굽혔다가 놓아준다. 그 사이 어딘가에서 사람은 자기 몫의 속도를 배운다. 빠르지도, 늦지도 않은, 다만 자신에게 무너지지 않을 만큼의 속도.

나는 아직 그 속도를 다 알지 못한다. 다만 너무 단단해지지 않으려 애쓸 뿐이다. 부러지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언젠가 다시 흐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