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수필문학상 금상작품]
슬픈 눈동자
(일본)리홍매
그들은 선택을 하지 못했지만 거부도 하지 않았다.
반야생의 삶
얼마전유명한 영상작가가 28년전에 찍은 다큐멘터리 영상을 접하게 되였다.
영상은 끝없이 넓은 초원과 맑은 하늘이긋는지평선으로 시작됐다. 귀를 살려 원없이 바람의 소리를 담아, 보이지 않는 감각으로 머리속을 풍요롭게 색칠하고 싶어지는 아름다운 자연이였다.
새들이 날개짓으로 초원의 률동을 알렸다. 화면 왼쪽 멀리서부터 십여 마리의 말들이 떼를 지어 천천히 한줄로 걸어 오기 시작했다. 길게 내리 드리운 머리카락과 더부룩한 털이 어수선했다. 피부는 푸석푸석했고 발굽은 볼품없이 자라 있었다. 물론 재갈은 물려있지 않았다.
‘무인도의 말이면 야생마겠지, 지구상에서 거의 사라진다는 야생마의 모습인가?’ 싶었다.
볼수록 신기하기만 했다. 말들의 걸음에 키 작은 풀들이 이리저리 갈라졌다. 그 리듬을 탄 새들은 재잘거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렇게 초원의 새들은 낮게 날며 말들의 움직임을 따라 곤충을 찾는다 한다. 말들은 새를 쫓지 않았고 새들은 말의 길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나란히 같이 가는 것은 아니였다. 서로 방해하지 않고 제갈 길을 갈 뿐이였다.
말들은 작가가 넘겨주는 당근을 보고서도 아무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였다. 당연한 일이다. 야생마들은 애초부터 당근맛을 모른다고 하니.
말들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렌즈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작가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의혹에 찬 눈길이였다. 사람을 만난 적 없는지, 아니면 인간은 포식자가 아니여서 자기들을 해치는 존재가 아님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는지, 그들은 달아나지도 않았고접근하지도 않았다.
터벅 터벅…
푹신한 땅에서 튕기는 그 소리는 여태 내가 들었던 말발굽 소리와는 달리 리듬도 박력도 없었다. 다만 여유롭고 부드러웠다.
유유히 말 무리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련되지는 못했지만 름름하고 자유로운 자세로 초원과 하늘 사이에 새롭게 수평선을 긋기 시작했다. 자연과 생명의 지평선, 그보다 더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나는 여태 본 적이 없다.
나레이션이 흘렀다.
‘70여 년 전,다시마 가공업을 시작한어부들의 손에 이끌려 말 한마리가 무인도에건너갔다. 그때 중요한 운반동력이였던 말의 존재가 아니였더라면 어부들은 무인도에서 다시마 사업을 벌릴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다시마 가공업자가 늘어남에 따라 말들도 늘어났다.
하지만 점차 다시마 가공업이 기계화로 발전되면서 어부들은 무인도를 떠나야 했다. 물론 말들도 쓸모없어졌다. 1971년, 마지막으로 섬을 떠나게 된 어부가말들을 섬에 남겼다.륙지에 데리고 가서 도살장에 보내기 싫어서였다 한다.’
영상 속의 말들은 그때 남겨진(버려진)말과 그들의 후손이였다. 그후모든 수말들을륙지로옮기면서 말들의 자연번식은 중단되였다.그때의 말들 중 현재 남은 말이두마리 뿐이라는 자막으로영상은 끝났다.
열심히 일만 하면 먹여주고 지켜주던 인간이 떠난 후 그들은 자연 속에서 야생을 시작했다. 하지만 한번 가축화되였다가 다시 자연으로 돌아간 말이라 진정한 야생마는 아니란다. 사방이 낭떠러지인 고독한 섬에서 다시 가축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자기 조상들도 몰랐던 야생에서의 삶을 시작했을 때 그들은 얼마나 막막했을가,주인을 원망하지나 않았을가?!
나는 여태 그처럼 깊고 고운 눈동자를 본 적이 없다. 한결같이맑고은은했다. 각기 한쪽 세상만 바라보지만 두 눈동자의 시각을 합치면 거의 350도의 세상을 바라본다는 그들이다. 수걱수걱 머리를 숙이는 버릇 때문일가,커다란 눈동자는 솔직함과 성실함을 담고 있었다.
나는 또 그처럼 슬픈 눈동자도 본 적이 없다. 말 못하는 짐승에게는 마음이라는게 있을가?운명에 대한 저주도 있을가?그 눈빛 속에서 나는 깊은 수심과절절한 그리움을 보았다. 그래서인가, 그들 눈안에 들어 있는 대초원의 모습은슬프게 느껴졌다.
운명이 그들을 비껴 갔을가, 아니본시 그것이 그들의 운명이였을가!
경주마의 엔딩
세상에는 그들과 다른 삶을 사는 말들도 있다.
병오년을 앞둔 작년 년말, 조교사(调教师)경력 30년인 지인이나를 년말경마장에 초대했다. 전력으로 달리는 말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였다. 그날은 인터넷 투표로 선정된 열여섯 마리의 경주마가 우렬을 가리는 날이라 5만여 명의 관객들로 장내가 술렁거렸다.
경마장은 퇴직을 눈앞에 둔 지인이거의 반생을 바쳐 일해온 직장이다.2천 5백메터의 잔디 주로가 뻗어 있는그곳은 정결하게 잘 정비되여 있었다. 도시 한 복판에 만들어 놓은 푸른 자연 덕분에 일상의 답답함이 날아갔다. 하지만그것은 순간 뿐이였다. 경주마들이 출발갑문을 박차는 순간부터 장내에는 ‘속도’라는 개념보다 더 중요한 요소는 없는 듯했다. 일제히 울리는말발굽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튕겨 나가는 검은 흙이 기세 사나웠다. 날랜 말들의 몸짓에 갈라지는 ‘휙 휙’바람 소리가목 터지게 응원하는 사람들을 더들뜨게 했다. 열광의 도가니 속에 빠진그 모습들이나에게는 너무 낯설었다. 명백히 스포츠인데도 그다지 당당하지 못한 경마장의 생리 때문일가, 나는 도무지 그 분위기에 물들지 못하고 말았다.
그날은 두 퇴역마의 마지막 경주날이기도 했다. 나는 그들이신경 쓰였다.우승한 경력을 가진 말에게는 은퇴경주가 ‘유종의 미’를 거두는 일이 되지만 그러지 못한 말에게는 모든 기록에서 이름이 멀어지는 일이되기 때문이다.
두 퇴역마의 앞날을 지인에게 물었더니 경력이 화려한 한마리는 ‘씨앗말’로 남게 되였고 다른 한 마리의 진로는 미정이라고 했다. 마주馬主가공개하지 않으면 묻지 않는 것이 암묵하의 약속이란다. 혈통이 무엇보다 중요한 경마의 세계이다보니 현역 때의 리력을 근거로 누군가는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게 되고 누군가는 쓸쓸한 뒤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러니 경주마들은 데뷔하는 날부터 최선을 다해 달려야 한다. 좋은 성적은 이름과혈통을기록해주며 돈까지 벌게 해준다. 현역 때 돈을 벌어들이지 못한데다가 ‘씨앗말’로 선택받지도 못하면 퇴역마는 사실상 ‘아무쓸모도 없는’ 말이 되고 만다. ‘아무 쓸모도 없는’ 말을끝까지 돌보는 일은누구도 선뜻 나설 수 없는 마이너스적인노릇이란다.자기 말에 대한 마주의 진정한 사랑이 없는 한,곧장 도살장으로 실려 가야 하는 것이 퇴역마의 현실적인 운명인 것이다.
관중들은 “수고했다!”를 외치며 박수로 그들을 보냈다. 화려한 경주로에서 보였던 눈빛과 기세는 오간데없이, 머리를 숙이고 수걱수걱 잔디밭을 맴도는 두 퇴역마의 모습에 나는 가슴이 뭉클했다. 황홀했던 그날의 기억을 더듬고 있는지, 아니면 한번도 열광의 박수를 받아 보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는 건지, 서로 다른 여생을 보낼두 말의 눈동자는 똑같이 슬펐다.
게다가 만인의 환호 속에서 기수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는 반대편 저쪽 우승마의 눈동자마저도 나에겐 슬퍼보이기만 했다.문득 무인도에 남겨졌던 반야생마들의 눈동자가 생각났다.
어쩌면 그들은 본시 슬픈 눈동자로 태여났을지도 모른다.
예술가인 승용마
그나마 승마라는 스포츠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그처럼 마음이 조여지고 그처럼 신뢰가 흐르는 스포츠가 있을가. 또 그처럼 교감이 살아 숨쉬는 스포츠가 있을가. 그리고 그처럼 순응성을 느끼게 하는 스포츠가 있을가!
동물과 인간이 동일한 목표를 위해 하나가되는, 아름답고 감동적인 마장마술을 떠올리며 잠시 경마장에서의 씁쓸함을 메워 본다.
승마는 스포츠라는 그 개념을 넘어, 인간과 동물간의 신뢰관계를 보여주는 창조예술이기도 하다. 해서동물과 인간이 함께 이름이 기록되는 올림픽 경기 종목으로도 유명하다. 균형적이고 유연하게 내리는 인간의 정확한 판단을 실수없이 받아들이는 말의 자태는 때로는 평온함이고 때로는 열렬함이고 때로는 아름다움이다. 특별한 믿음이 없으면 도무지 이루어질 수 없는 두 심장의 화합이 아닐가 싶다.
몇년전에처음으로 마장마술을 관람했을 때의 놀라움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거의 모든 관객이 숨 죽이고 기수와 말이라는 한 공동체의 동선을 주시하게 되는,승마장의 품위와 매력에 매료되였었다.
승마라 하면 나는 그때 들었던 말발굽 소리의 리듬이떠오른다.
-따그닥, 따그닥, 따그닥,따그닥…
말과 기수의 등장은 네다리가 각각 한발씩 차례로착지하는 ‘평보’의 네박자소리로 시작되였다. 한바퀴를 천천히 돌고 난 후 말은 조용히 정지자세를 취했다.
승용마는신기할만큼 정직하게 서 있었고 장내는 물 뿌린 듯 고요했다. 자유분방의 상징인 말이 움직이지 않는 자세로 기수의 지시를 기다리는 그 모습에 나는 놀랐다. 생전 처음 보는 말의 온순한 모습이였다.
이어서 들리는 소리-
따그닥, 따그닥…
왼쪽 앞다리와 오른쪽 뒤다리, 오른쪽 앞다리와 왼쪽 뒤다리 식으로 대각선 방향의 앞다리와 뒤다리가 동시에 지면에서 뜨고 동시에 지면에 닿으면서 내는 ‘속보’의 두박자 소리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손가락이 말발굽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따그닥, 따그닥, 따그닥…
왈츠의 원형 흐름인 강,약,약의 삼박자 리듬이였다. 왼쪽 뒤다리가 먼저, 이어서 오른쪽 뒤다리와 왼쪽 앞다리가 동시에, 마지막에 오른쪽 앞다리가 땅에 닿으며 내는 ‘구보’의 삼 박자 소리였다.
기수의 적절한 판단과 그에 순응하는 말의 유연한 표현력에 나는 흥분했다. 내 눈에 말은 이미단순한 동물이 아니였다. 머리를 갸우뚱하며 연기에 집중하는 말의 눈동자에는표현의 희열과 그것을 완성해야 할 책임감이 력력했다. 말발굽 소리와 기수의 몸짓이만들어내는 률동이관람자들의마음을 사로잡았다.
숨 죽이게 하는 순간이 또 있었다.
한쌍의 대각선 다리에서 다른 한쌍의 대각선 다리로 넘어가는 리듬을 느끼는 순간이였다. 그 리듬과 률동을 타면서 말이 제자리 걸음을 하다가 공중에 두발을 들어올려 잠간씩 멈추는 ‘파사지’동작이였다. 한쌍의 대각선 다리를 공중에서 동시에 멈추는 그모습은 춤사위를 이루었다. 그 아슬아슬한 체공의 시간에 나는 호흡을 멈췄다. 고요를 깨뜨리는 열렬한 박수 소리가멈춘 내 호흡을 이끌어줬다.
헌데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멈출수 없는 기세로 앞만 보고 달리는 경마장의 말들과는 달리자잔한 감동과 쾌락으로 오랜 여운을 남기는 승용마들이 주는 감동이밀물처럼 몰려왔다가 썰물처럼싸-악 밀려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원래 그들 본연의 모습을 저렇게까지 억제시키고 인간과의 교감성을 주입시킨 인간의 창조를 위대하다고 봐야 할가, 잔인하다고 봐야 할가? 경주마의 패기와힘, 승용마의 멈춤과 인내, 어느 쪽도말 자신이 원하는 모습은 아닐텐데… 그나마 그들에게는 어느 쪽이 덜 힘들가?
어쩐지 누군가의 소중한 것을 빼앗고 절제시키면서까지 누린 쾌락 같다는 생각이 오래동안마음을 짓눌렀다.
가축의 운명
한번도 인간에게 길든적 없는, 현재로서는 유일한 야생마인 몽고야생말은 하루 열여섯 시간을 이동하면서 풀을 뜯어먹는다 한다. 약간 느려보이지만 에너지를 효률적으로 쓰는 구조여서 그들은 위협받을 때 외에는 전력으로 달리지 않는다. 야생마의 핵심 능력은 ‘속도’가 아니라 지속적인 ‘이동’과 ‘회피’라는 말이다.
경주마이기 전에, 승용마이기 전에 가축으로서의 말은 언제부터 우리 곁에 왔을가.
말과 인간은 오래전부터 밀접한 관계를 이어왔다.무리를 짓는 말은서렬과 리더를 인식하며 인간이 보내는 신체 신호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생리적 특성을 갖고 있다. 그런 말의 사회성을 비교적 빨리 간파한 인간은야생마를자기들의 삶에 끌어들였다. 하여 지구상의 거의 모든 말들은 본연의 자기들 모습을 전혀 모른다. 그들의 엄마도, 그들의 엄마의 엄마도, 그들의 엄마의 할머니도 모른다.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길들어 산 세월이 너무 길어서이다.
인간과 처음 만났을 때 말들은 인간을 오래동안 관찰했으리라. 그들에게 인간은,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고 먹이 부족과 추위를 이겨낼 수 있게 잘 보호해 주는 고마운 존재가 아니였을가. 전혀 무관했던 말발굽,재갈,채찍이라는생소한 도구에 지배당하게는 됐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생존 환경과 생존 확률만큼 더 중요한 게 있었을가.
사실 말은 인간의 울타리를 꿰뚫고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었다. 실제로 그렇게 도망쳐 다시 야생으로 돌아가 반야생마로 생을 마치는 말들도 있었다.최근에는 “몽고야생말도 사실은 반야생”이라는 주장도 생겼다.
말의 선택은 어디까지나 자유였으나인간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곧자연에 종속되는 일이기도 했다. 인간의 통제에서 자유스러워지는 날부터 그들은먹이 부족과 포식자의 위협을 견뎌야 하고 온갖 질병과 환경의 변화를 이겨낼 책임을 스스로짊어져야 했을터이니.
그들은 잘 길들었다. 말은 인간을 위한 교통 수단과 이동 수단이 되였고 인간의 농경화에 직접 참여했으며 교역과 전쟁에도 수없이 리용되였다. 인간은 말을 소유함으로써 힘을 갖게 되였고 돈을 벌게 되였으며 시간을 절약하게 되였다.
말도 인간을 통해 새로운 자신을 발견했을 것이다.그처럼 빠른 속도로, 그처럼 긴 거리를 뛸 수 있을지는 상상도 못했을 그들은 그 능력으로 쉽게 먹이를 얻었고,인간의 식자재인 당근 맛도 알게되였으리라. 점차 말은 긴 시간, 긴 거리를 이동하면서 열심히 풀을 뜯었던 원래의 모습을 잊었고, 위협받을 때 외에는 전력으로 달리지 않았던 속성조차도 버렸다. 채찍은 협박과 지배가 아닌 협력의 수단이라는,인간이 만들어 놓은 ‘관계’ 속에 푹 빠지고 말았으리라. 어쩌면 그들은 ‘자유’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것임을 누구보다도 일찍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이런 것을 두고 상부상조라 했던가.
말이 오래동안 군마로 활약했던 것은 등에 탄 사람을 버리고 도망가지 않는 충성심과 의리를 인간에게 인정받아서였다 한다. 그런 말들인지라 먼 훗날, 자기들이 버려질 일이 생길 줄은 아마 꿈에도 생각지 못했으리라.하지만 어떻게 하겠는가! 우리 인간 역시 자기가 만들어 놓은 시스템 앞에서 주체성을 잃고 말았으니...
병오년이 밝아왔다.
지인은 퇴직금으로 작은 목장을 사서 퇴역마들의 로후를 돌볼 예정이라는련락을 해왔다. 경마장에서 날뛰던 말을 승마용으로 훈련시키는 힘든 일에 착수한다는 말이다. “단 몇 마리 뿐일지는몰라도 30년 가까이 살 수 있는 말들이 5,6년 정도의 경주 생활을 마치고 곧장 도살장으로 실려가는 일을 조금이라도 막고 싶어서…”라고 말하는들뜬 지인의 목소리에는 희망과 자부가 담겨있었다.
나는 지인의 생각에 물들고 말았다.
-‘붉은 말의 해’에 말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가?
생각해 보니 심신건강에 좋다는 승마를 배우는 것으로 퇴역마들에게 할 일을 제공하는 일인자가 될 수 있을 것 같다.일거량득인 셈이다. 사람을 태우기에 적합한 넓이로 진화되였다는 넓은 말의 등에 올라타말의 숨결과 나의 몸짓으로신뢰관계를 만들어 보고 싶은 생각에요즘 가슴이 부푼다.
우물같이 깊은 맑은 말의 눈동자에 믿음과 의리를 담을 수 있을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