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인의 고통을 수치화하려 했던 비겁함에 대한 반성문
(연길) 리영언
먼저 부족한 제 글에 과분한 격려와 지지를 보내주신 심사위원 분들과 아리랑 수필상 관계자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상의 무게만큼이나, 제 서툰 언어들이 누군가의 마음에 닿았다는 사실이 과분하고도 떨립니다.
저는 올해로 대학교 4학년에 진입하는 의학생입니다. 세주일 전, 소화내과 실습 당시, 10년 동안 간경화와 간암에 시달리신 한 환자분의 림종을 병실 구석에서 지켜봐야 했습니다. 황달로 누렇게 변한 피부, 뼈만 남은 듯 메마른 육신, 허공을 응시하는 튀어나온 눈망울. 그 분의 딸은 교수님의 가운 자락을 붙잡고 오열했습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뭐라도 해주세요.”
교수님의 대답은 참으로 차갑고 리성적이였습니다. 지금 심페소생술을 하고 중환자실로 옮겨도 고통만 연장할 뿐이라고. 그리고 저에게는 종이 한장이 건네졌고, 생명이 소멸해가는 과정을 1분 단위로 받아적어야 했습니다.
7월6일 15시30분 심장박동 소실, 사망선고.
머리로는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슴으로는 딸의 절규에 무너져 내리던 그 날을 저는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병실에서는 타인의 비극에 그토록 흔들렸던 제가, 집에서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밤마다 무릎 통증으로 신음하시는 외할머니와, 효험도 립증되지 않은 의료기기에 매달리는 어머니 앞에서 저는 차가운 의학론리와 통계만을 들이밀었습니다. 저는 과학이라는 외국어를 배우느라, 가족들이 써왔던 사랑의 모국어를 까맣게 잊어가는 이방인이 되여버렸던 것입니다.
이 수필은 서늘한 청색광 뒤에 숨어 타인의 고통을 수치화하려 했던 제 비겁함에 대한 반성문입니다. 퇴행성 관절염으로 아파하시는 외할머니를 두고, 저는 정교한 의학론문들만을 뒤적였습니다. 그것이 흔들리지 않고 할머니를 지키는 정직한 조언이라 오만하게 믿었던 것입니다. 검증되지 않은 의료기기라는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던 어머니의 그 무모한 간절함을 향해, 저는 론문을 운운하며 잔인한 독설을 내뱉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제 날카로운 외침을 투박하고 따뜻한 손으로 받아내며 오히려 고맙다고 말씀해주시던 외할머니의 표정을 보며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완벽하고 정교한 번역보다 숭고한 것은, 끝내 온전히 리해할 수 없는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삶으로 기꺼이 껴안으려는 서툰 오역의 과정이라는 것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어쩌면 사랑이란 정확한 번역보다, 이런 서툰 오역의 틈새로 새어 나오는 온기까지 기꺼이 껴안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의학을 배우며 늘 마음에 새기는 말이 있습니다.
때로는 치료하고, 자주는 보살피고 , 항상 위로하라.
앞으로 수많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또다시 갈팡질팡하겠지만, 서툴게 써 내려간 이 글이 오늘 주신 이 상이 후날 저를 메마르지 않게 붙잡아 줄 것입니다.
잉크로 얼룩진 종이에 적어 내려갔던 그 무거운 죽음의 기록들을 평생의 부채로 여기겠습니다. 앞으로 마주할 수많은 환자와 그 가족들의 간절한 오역의 언어를 결코 외면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날카로운 제 독설조차 손자의 기특한 사랑으로 오역해주신 우리 할머니와, 맹목적인 절박함으로 사랑의 언어를 가르쳐준 어머니께 이 영광을 바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