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부드러운 용기
(연길) 심명주
어릴 적 두부 만드는 외할머니댁에 가면 늘 목격하던 광경이 있다. 아궁이에서 장작불이 푸르락 탁탁 타오르고, 옹기종기 그릇들이 앉은 부엌에서 할머니는 무쇠로 된 커다란 솥 앞에 서 계셨다. 솥 안에서는 재빛의 콩물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할머니는 족집게로 흰 돌맹이 같은 것을 콩물 속에 살며시 넣으셨다. 그것은 백반이였다. 신기하게도, 백반이 들어간 콩물은 순간 소용돌이치며 뭉치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새하얀 무명보를 깔아둔 두부 박스에 그 덩어리를 퍼내고, 돌림장이라고 부르던 무거운 돌로 지긋이 짜내셨다.
“콩을 갈아도, 끓여도, 굳혀도 참아야 제맛이지.”
그때 할머님이 땀을 닦으며 외우시던 말씀이였다.
참아야 제맛이라. 삶은 참는 것이라고 배웠다.
그래서 내 삶은 “참아야 제맛”이였나? 돌림장으로 짓누르기만 하지는 않았는가?
살아오면서 가끔은 스테이크처럼 강렬하게, 치즈처럼 독특하게 살아가기를 바라기도 했다. 허나 그 모든 강렬함과 독특함 사이에서, 나에게는 일상이 훨씬 더 많았다. 두부처럼 담백하고 밋밋하던 일상을 떨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일상 곳곳에 숨어있던 욕심과 허영과 게으름들...요리조리 피하면서 나름 참는다고 살아왔다. 그 험한 출산 통증 때에도 소리 안내고 참느라고 낑낑거렸다.
참았는데 왜 생활에 늘 강박을 느꼈을가. 마음이 빈 듯 세상은 이 쯤에서 왜 이렇게 생소한가?
기억 속에서 한모, 두모, 할머니가 완성시키던 두부, 슬며시 콩물에 넣으시던 돌멩이, 할머니의 백반, 내 인생에는 어떤 백반이 아직 필요한 걸가?
어느 날 번화가의 한 콩두부전문점에 나는 앉았다. 유리벽 너머로 청결한 기계들이 정교하게 두부를 찍어내는 공정을 한다. 메뉴판에는 순두부, 유기농두부, 흑임자두부, 모차렐라두부 등 다양한 이름이 빼곡하다. 내 앞에 놓인 순두부는 너무나 하얗고, 부드러우며, 완벽하다. 숟가락으로 떠서 입에 넣으면 고소한 맛은 그대로인데, 어릴 적 두부방에서 맡았던 아궁이의 나무냄새와, 솥에서 올라오는 김의 온기 같은 것은 결여되여있다. 효률과 정확함이 빚어낸,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정겨움이 빠진 맛이다. 마치 어리던 아이가 이제 어른으로 커버린 것처럼.
나는 전문점의 두부를 다 먹고 유리컵에 남은 두부물을 마셨다. 콩의 순수한 맛이 은은하게 퍼진다. 문득, 그 물은 두부가 되지 못한, 그러나 두부의 근원이 된 본질의 맛이라는 생각이다. 내 마음에 아직 변질되지 않은 그때의 아이처럼.
할머니는 두부를 인내의 음식이라고 하셨다. 이제 와서야 그 말의 깊이가 조금은 느껴진다. 인내는 단순히 참고 기다리는 수동적인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끓어오르는 삶의 열기 속에서, 중심을 잃지 않고 서서히 형태를 만들어가는 적극적인 과정이다. 백반이라는 결정체가 콩물의 혼돈 속에서 질서를 빚어내듯 내 삶의 각종 쓴맛과 신맛을 통해 단단함과 부드러움을 동시에 만들어가는 용기, 바로 그 용기가 이제 나는 필요하다.
두부는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는다. 된장국에 들어가면 된장의 구수함을, 김치에 들어가면 김치의 얼얼한 매운맛을, 조개탕에 들어가면 조개의 시원한 감칠맛을 온전히 받아들인다. 그것은 주변의 모든 맛과 향을 자신의 몸으로 흡수하여 더 풍성하게 만들어낸다. 역설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건 돌림장의 무게를 인내한 용기다. 만들어진 자만이 가지는 힘, 아직 삶을 견인해나가야 하는 나의 백반.
밖에 나오니 두부를 파는 집들이 즐비하다. 그 중 한 작은 가게에서, 할머니의 두부냄새가 나는, 덜 다듬어지고 결이 살짝 거친 두부 한모를 사들었다. 나는 그 두부가, 그리고 그 두부 같은 마음가짐이 이 복잡한 세상 속에서 나를 지켜주는 부드러운 용기가 되길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