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그리움은 때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发布时间:25-11-25 09:05  发布人:金昌永    关键词:   

수필

그리움은 때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치치할) 정희정

육아 5개월 차, 서울에서 친구들이 휴가로 광주에 놀러올 겸, 아기를 보러 집을 찾아왔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친구 A가 얼마 전, 할아버지 림종을 앞두고 겪었던 복잡한 심정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사람이 죽기 전에는 들숨없이 몸에 들어있던 숨들을 모두 날숨으로 뱉어낸다고 했어. 그렇게 우리 할아버지가 그 숨들을 3일이나 내뱉으셨다는 거야. 나를 기다리면서. 

그녀의 얼굴에는 슬픔이 가라앉은 뒤의 잔잔한 파문이 일렁이고 있었다. 

난 지금도 가끔 조용한 집 안에서 내 숨소리를 들으면 나를 기다리시던 할아버지의 마지막 3일이 어땠을지 상상하곤 해. 숨들이 하나 하나 다 빠져나가고 나면, 할아버진 답답하셨을가? 아니면 조금이나마 편하셨을가?

이 때 친구 B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사람이 죽으면, 제일 오래 집 안에 남는 것은 무엇일가? 

나는 마루바닥에 실오라기처럼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는 머리카락 몇 올을 손으로 쓸어냈다. 아침에 청소기를 돌렸건만 머리카락은 가을 락엽처럼 자꾸만 내 몸을 리탈해 집 안 곳곳에 내려앉았다. 나는 늘 그게 거슬렸다. 나는 그녀들의 이야기를 듣다말고 청소기를 돌려야겠다며 자리를 떴다. 

청소기를 돌리면서 나는 생각했다. 과거와 살아있었음을 애도하는 방식은 결코 누구에게도 가벼울 수 없다는 것을. 마루바닥에서 청소기 안으로 삼켜진 머리카락들이 문득 눈 앞에서 숨을 고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만 묘하게 과거로 이끌려 갔다.

사람이 죽으면, 제일 오래 집 안에 남는 것은 머리카락이라 했다. 

이 말은 사실 오래전 귀에 스치듯 들었으나, 그것을 몸소 겪기 전까지 나는 믿지 않았다. 죽음이란 모든 흔적을 지워주는 절대의 손길이라 생각했기에, 가느다란 한올의 머리카락이 그 손아귀를 비켜간다는 사실이 도무지 납득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모도 나와 마찬가지로 머리카락을 단 한 번도 너그럽게 대한 적이 없었다. 빗에 엉킨 머리카락, 베개에 흩어진 머리카락, 욕실 배수구에 감긴 머리카락은 이모에게도 지저분함의 동의어였다. 손끝으로 집어 휴지에 싸고, 망설임없이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 그게 우리가 머리카락을 대하는 상례였다. 

할아버지를 모시고 있던 이모는 할아버지의 염색된 검은 장발에서 떨어져 나오는 머리카락을 볼 때마다 못견디겠다는 듯 화를 내곤 했다.

아버지, 제발 미용실 좀 다녀오세요! 저와 희정이보다 머리카락이 더 길어요. 

“길면 눈에 잘 보여서 좋지. 안그러냐 희정아.” 

성격 좋은 할아버지는 매번 이런 식으로 이모의 역정 난 얼굴을 허허 웃어넘겼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집안은 이상하리만치 단정해졌다. 

그의 웃음소리와 걸음을 천천히 옮기는 소리, 쏘파에 무심히 던져진 신문, 책상 우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던 약통들, 그런 흔적들이 서서히 지워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이모가, 다음은 방학 때마다 이모네 집에 잠간 가 있는 내가, 그 다음엔 시간이 그것들을 치웠다. 한달, 두달, 그리고 계절이 몇번 바뀌자, 그가 여기 있었음을 말해줄 아무 물건도 남지 않은 듯했다. 나와 이모는 그 부재에 점차 익숙해진 듯 했고 사진 속 얼굴이 우리를 보아도 심장이 크게 흔들리지 않는 날이 시작된 것만 같았다. 그런 줄 알았는데…. 

어느 날, 이모는 자신이 그렇게 ‘혐오’하던 머리카락 몇올에 그만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개강 일주일을 앞두고, 나는 기숙사에 가져갈 가을옷을 챙겼고, 이모는 이참에 드레스룸 정리에 나섰다. 그 때, 이모는 묵은 옷들을 정리하다가 손이 잘 가지 않았던 계절옷 수납함을 열었고 거기에서 회색 스웨터 하나를 꺼냈다. 심플한 디자인에 가을, 겨울에 아무 바지와도 무난하게 어울리는, 할아버지가 제일 즐겨 입었던 옷이였다. 

우리 아버지 옷이 여기도 하나 있었네. 생전에 제일 좋아하셨던 옷인데. 

그 낡은 스웨터는 오래 빛을 보지 못해 꿉꿉한 먼지 냄새가 났고 단추가 하나 떨어진 옷소매에 무심한 듯 가느다란 머리카락 두올이 붙어있었다. 해빛이 안방 창가로 기울어 들어와 그 검은 머리카락을 투명하게 비추었다. 검고 곧은 결이, 마치 물 속의 수초처럼 흔들렸다. 순간, 이모는 그것이 할아버지의 머리카락임을 알아보았다. 

그것을 당겨서 손가락에 감은 이모의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음을 나는 보았다. 나도 덩달아 그 장면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내가 왜 그랬을가? 머리카락이 뭐라고 그렇게 구박하는 말을 했을가?

머리카락이란, 이렇게 가벼운 것인데, 어째서 이토록 무거운 시간을 품고 있는지. 그것이 떨어져 나온 지난 날들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 머리카락은 분명 할아버지가 우리와 함께 살아있던 시간 속에서, 바람을 맞고, 빛을 받고, 소리없이 자랐을 것이다. 이 얇은 한올에 이모는 그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에 그만 울음을 터뜨렸던 것이다.

이모는 그 머리카락을 쓰레기통에 버리지 못했다. 대신 그것을 아기의 배냇머리를 보관하듯, 작은 유리 병 안에 넣어두었다. 

그녀는 아마도 나처럼 그것을 휴지에 싸서 버리던 지난 날들을 부끄러워했을 것이다. 이젠 그것은 더이상 부스러진 각질이나 먼지의 일부가 아니였다. 그것은 할아버지가 이 세상에 남겨둔, 가장 긴 시간의 흔적. 그는 떠났지만, 해빛 속에서 그 머리카락은 가만히 숨쉬고 있었다. 한 사람이 살아있던 날의 공기와 냄새가 고스란히 배여서. 

사람이 죽으면 제일 오래 남는 것은 머리카락이라고 한다. 

그 말은 이제 나에게도 이모에게도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한 존재의 또 다른 존재의 방식이 되였다. 사라진 것을 붙잡는 손, 잊힌 것을 부르는 눈, 그리고 가늘고 긴, 그러나 결코 끊기지 않는 그리움의 선. 

그렇게 그리움은 때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살아서 우리를 찾아왔다.

그리고는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