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돈과 시
发布时间:25-11-25 09:01  发布人:金昌永    关键词:   

수필

돈과 시

   (심양) 박찬휘

“가난에 찔린 손이/썩고 있다/나는 손을 끊었다/눈물로 씻었다/호주머니에 넣었다//손을 묻어야겠다/비석없는 무덤이나마 만들어줘야겠다/생활이끼가 없는 땅이여야 겠는데/어디에 있을가//발은 어둑어둑한 길을/조심스레 끌고 간다//툭!/손이 뛰쳐나왔다//발과 손이 만났을 때/손은 문득 발이고 싶었다”

2004년 내가 처음으로 정규적인 잡지에 발표한 〈손(1)〉이란 제목의 시이다.

이번 여름방학에 나는 식당에서 한달간 사발씻기 일을 했다. 난생 처음으로 하는 체력로동이여서인지 나의 과거가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중에서도 〈손 1〉이란 시가 자주 생각났다. 왜냐하면 돈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소중한 시간을 가지게 되였기 때문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의 초심은 돈에 있었던 것 같다. 시도 자연스럽게 돈에서 비롯되였던 것이다. 어릴 적 자라온 환경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세살 때 우리 집은 룡정시 중성촌에서 개산툰으로 이사왔다. 부모님은 밤낮없이 장사했고 나는 홀로 유치원 다녔다. 주말이면 목에 열쇠를 목에 걸고 홀로 집에 있었던 기억도 난다. 그래서 나는 늘 외로웠고 집안 여기저기에 널려있는 돈에 관심을 가졌는지 모른다. 내가 소학교 3학년 쯤 되였을 때에는 진에서 장사 잘 되여 소문이 자자했다. 저녁이면 나는 부모님과 함께 돈을 세고 돈을 액면 가격으로 분류하는 것이 숙제로 되기도 했다. 바로 그 쯤에서 발생한 일로 하여 나는 돈의 힘을 알게 되였고 나의 가치관은 돈이 되였다.

어느 날 밤, 1시쯤에 아버지가 다급하게 나와 어머니를 단잠에서 깨웠다. 누군가 우리 집 출입문에 가스통을 안장하고 가스발브를 열어놓았던 것이다. 아버지는 용케도 그 가스냄새를 감지했었다. 만약 제때에 발견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이산화탄소 중독에 걸리게 될 것이 불보듯 뻔했고, 그 틈을 노려 도적은 순리롭게 우리 집 돈을 훔치려는 목적을 달성했을 것이다. 신고했지만 가스통은 훔쳐온 것이였고 그 도적을 끝내 잡지 못했다.

지금도 의아하게 생각되는 건 아버지의 변화이다. 그 당시 아버지는 저녁 4시나 5시 쯤이면 집에서 잠을 잤다. 그냥 그 시간때가 되면 졸려서 어쩔 수 없이 잠을 잤던 것이다. 그리고는 자정 되면 깨여났던 것이다. 그래서 가스냄새를 제때에 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우연이 아니였다. 지금 생각해봐도 미신적인 면이 없지는 않지만 아무튼 지나간 건 지나갔다. 하지만 그 일로 하여 나는 돈과 친구로 되기로 마음먹었다. 하기에 내가 이번 여름방학에 식당에서 사발씻기 일을 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것도 하루에 12시간씩 말이다. 방학하기 전 가족들과 나의 생각을 말했을 때 어머니만 내가 고생한다고 말끝을 흐리셨다.

“달마다 받는 집세가 로임보다 많은데... 뭐가 부족하다고...”

이튿날 6살 딸애는 아예 선생님과 시작도 하지 않은 일을 자랑했다. 아빠가 자기를 위해 사발씻기를 해서 돈 벌어준다고. 하지만 안해는 침묵했다. 방학 한달동안 꼬박 사발씻으면 4200원 벌 수 있다는데 반대할리 만무했다. 어쩌면 안해도 많이 변한 것 같다.

나는 안해를 연구생 1학년 때 영어반에서 만났다. 그 때 나는 한창 4번째 시집 출간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여서 삽화가 필요했다. 마침 안해는 미술 전공이였다. 그래서 시에 맞는 삽화를 부탁하면서 안해와 접촉하게 되였다. 당시 안해는 흔쾌히 동의했다. 나중에 그 원인을 물어본 적 있는데 안해의 대답은 뜻밖이였다. 내가 연변대학 숙사대문에 시집 홍보물을 몇번 걸어놓은 걸 본 기억때문이란다. 얼마 안되여 나의 4번째 시집이 출판되였고, 안해는 책 팔고 홍보하는 일에 발벗고 나섰다. 하지만 지금은 열정적이고 적극적인 안해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다. 내가 시를 쓴다는 것에 대해 까맣게 잊어버린 것 같다. 아니, 기억에서 깡그리 삭제해버린 것이다. 이제 와서 돈이 안되는 시창작이 안해한테는 시간 랑비로 각인되였고, 내가 흐트러진 삶을 산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어쩌면 가장으로서 가정에 대한 책임이 부족하다고 불만이 쌓여갔을지도 모른다.  

 내가 이번 여름방학에 사발씻기 일을 선택한 원인도 바로 여기에 있다. 부업을 하나 더 만들어서, 돈을 조금이라도 더 벌어서 시창작을 견지하고픈 마음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안해의 태도를 리해하고 더우기 정확하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안해의 요구에 부응하려고 노력에 박차를 가할 뿐이다.

 돈에 대한 나의 가치관은 시집 출판하면서 겪은 일과도 련관이 있는 것 같다. 어쩌면 나는 대학시절에 운이 좋았다. 친구의 소개로 연변과학기술대학 김진경 총장을 알게 되였고, 김총장의 후원으로 꾸준히 시집을 출판했었다. 소위 말하는 재간도 돈 앞에서는 바람 앞의 초불인 셈이였다. 만약 그 때 김총장의 후원을 받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되였을가? 시집 한두권 정도는 출간했을 것 같다. 하지만 오늘까지 시창작을 견지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왜냐하면 돈이 주는 응원과 인정과 신심의 힘은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당시 김진경 총장의 말씀이 아직도 귀전에 쟁쟁하다.

“누구도 너한테 후원해주는 사람은 없을거야. 하지만 나는 교육하는 사람으로서 너를 보석처럼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너한테 후원해준다.” 김총장은 나한테 박찬휘라는 필명을 지어주셨다.

어쩌면 시는 무력하다. 나의 허영심을 만족시킬 수도 없고, 더우기 나의 우월감, 존재감을 만족시켜 줄 수도 없다. 이 시대가 시한테 그만한 능력을 부여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시한테서 과분한 바램을 버려야 했다. 그래야만이 현실이 정확히 보이고 나의 작음이 보이고 정확한 창작 사로가 보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것이 바람직한 마음가짐이 아닌가 싶다. 시가 잡지에 발표되면 상품이 되니까 독자가 지불하는 돈과 허비하는 시간에 책임져야 한다. 읽고 나면 그만한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하게끔 시답게 써야 하지 않을가. 어쩌면 돈은 시를 탄탄하게 만들어줄지도 모른다. 시가 굳이 이 정도로 긴장해야 할가. 위태롭게 아름다워야 할가. 하지만 이게 바로 작금의 현실이다. 설사 재간이 있다하더라도 결혼해서 그 재간으로 원하는 돈을 벌 수 없다면 그건 재간이 아니라 다만 애호에 그칠 뿐이다. 일단 애호로 각인되면 안해의 눈치를 봐가면서 그 애호에 시간과 정력을 쏟아붓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게 바로 결혼생활인 것 같다.

한 후배가 비싼 자가용 차를 샀다. 공공뻐스나 지하철 타고 다니는 자신이 슬퍼보여서 샀다고 했다. 피를 흘렸다며 유모아적으로 말을 맺었다. 어쩌면 슬픔에 한 사람의 가치관이 있는 것 같다. 나는 뭐가 슬플가? 나는 시를 쓰지 못하는 게 슬프다. 왜 나한테 이런 감정이 생기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시는 자가용 사서 운전하는 것처럼 소비품인데도 말이다. 돌이켜보니 아버지의 잠꼬대와 관련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내가 고중 다닐 때 언제부터인가 아버지는 밤에 잠꼬대 하는데 시를 읊는 것이였다. 그 목소리가 높아서 곁사람을 깨워놓기도 했다. 내가 시를 쓰기 시작한 후부터 아버지는 더 이상 시를 읊지 않았었다. 지금까지 말이다. 이런 무거운 ‘짐’을 지고 가기 위해 나는 술, 담배, 도박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집중하지 못하니까. 그래서 나는 대학 때 술분위기가 농후한 종소리 문학사(다만 개인적인 판단임을 밝힌다.)에 가입하지 않고 아리랑 민속사에 가입했다. 그래서 대학 때에 부모님과 조용히 시창작하고 싶으니까 숙사에서 나오고 싶다고 했다. 연길에 집을 사달라고 했다. 역시 부모님은 동의하였고 그 당시에 연길에 80여평 되는 집을 현금으로 사주셨다. 어쩌면 돈이 나에게 시창작 환경을 만들어준 셈이다. 적어도 내 인생에는 돈이 있어야 시를 쓸 수 있는 것이였다.

  전번에 한 시인을 만났는데 ‘시는 술이다’라고 했다. 그 맥락에서 나더러 시를 개괄한다면 시는 돈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쩌면 술 못마셔도, 돈이 없어도 시를 쓸 수 있다. 하지만 ‘시는 술이다’라고 한다면 사람관계가 중요하다는 의미일 것이고, ‘시는 돈이다’라고 한다면 물질이 중요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쓴 시가 널리 읽히려면 술이 중요할지 모르겠지만 시를 장기적으로 써가려면 돈은 필수이다. 시창작은 자가용처럼 소비품이기 때문이다. 굳이 시를 부단히 변화하는 이 시대에 맞게 정의 내리라고 하다면 나는 여유로움의 폭발이라고 말하고 싶다. 즉 의식주가 보장이 있을 때야만이 원고비가 생각보다 적어도, 읽어주는 사람 몇명 안돼도, 창작할 때의 재미만으로도 수지가 맞는 일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아량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나와 시는 20여년 동안 공생의 법칙이 생기게 되였다. 바로 시는 돈의 말을 듣게, 돈의 서렬을 높이는 것이다. 그것이 시한테는 불공평하고 잔인할 수 있겠지만 또한 시를 살리는 길이였다. 시와 ‘리혼’하지 않고 긴 시간을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였던 것이다. 나의 머리에서 시가 다시 대학 때처럼 살아난다면 가족이 힘들어지고 나는 자사자리한 죄인이 될 것이다. 그래서 가족의 허락 즉 돈의 허락을 받아야 시를 창작할 시간을 향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황당하다. 만약 그것이 번거롭고 괴로우면 결혼하지 말고 아이를 가지지 말고 가정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나는 안해와의 결혼을 선택했기 때문에 시는 저 멀리 물러가야 했다. 내 머리에서 시가 차지하는 비중을 야금야금 잘라내야 했다. 그래서 이번 방학에 나는 사발씻기를 한 것이다. 시여, 서운해하지 마라. 우리 가족은 너한테 이만한 위치, 시간, 공간, 무대를 제공해줄 수 없었다. 시가 우리 가족한테서 신분을 얻으려면 반드시 나의 꼴지 ‘직업’이라는 초라한 처지를 인정해야 된다. 일당처럼 수시로 잘릴 각오를 념두에 두어야 된다. 없어져도 우리 가족에게 손실이 없는 존재이니까. 조선족문단에 나같은 시인 한명 없어진다고 해서 영향 받지 않는 것처럼. 꽃 한송이 진다고 봄이 영향 받지 않는 것처럼.

돌이켜보면 부모님이 개산툰으로 이사가서 받은 가난의 무서움이 나한테 준 여운은 아주 컸다. ‘썩어서 끊어버린 손’이 시로 변신할가봐 돈에 집착했다. 그래서 첫 시집의 제목도 《먼곳의 나에게》로 달았다.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초라함이고 위로이고 결심이였던 것이다. 또한 희망의 편지이기도 했다. 하지만 제2시집에 〈손2〉를 수록했다. 그 시로 이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다시는 손에 관한 시를 쓰지 않기를 다짐하며. 가난의 공포에서 해방하기를 바라며. 더우기 시가 돈의 속박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며.

“길가에서 손 하나 주었다//나의 방에서/손은 주먹을 쥐고 있다//나는/엄지에게/나의 지문 넣어준다//손은 꽃처럼 피여난 듯 했다//나의 몸을 톺아오른다/호주머니를 비집고 들어온다//뚝!/엄지가 끊어졌다/손이 땅에 떨어졌다//손은 다시 주먹 쥐였다/다시 꽃처럼 피여난 듯 했다//손은 글 쓴다/나의 사망에 대한 글이다/방은/삽시에 얼룩투성이가 되고/나는 하나의 문자 된다//똑똑, 똑똑/번쩍 눈 떴다/다행히 꿈이였다//똑똑, 똑똑/문 두드리는 소리도 이틀째였다//똑똑, 똑똑/누군가의 발자국소리도 이틀째였다”

      --시 〈손2〉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