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민들레처럼
(대련)강매화
화사한 벗꽃들이 겨끔내기로 피여서 향기를 풍기는 4월이다.
출근길에서 보도블록 사이에 핀 민들레 한송이를 발견하고 저도 모르게 카메라에 담아버렸다. 개나리, 벗꽃, 라일락 등 봄이면 피여나는 그 수많은 꽃들중에 너무 수수한 꽃인 민들레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지만 나는 웬지 민들레가 제일 이뻐보인다.
그러고보니 내가 한국땅에 발을 디딘지도 벌써 2년이 흘렀다. 지난 2년 동안 나는 정말이지 너무 많은 경험들을 해왔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한국에서의 나의 첫 출근을 떠올려본다.
그날은 5월 5일 어린이날이였다. 나는 한국에 온지 55일만에 첫 일자리로 압구정 로데오역 근처에 있는 만두집을 찾았다.
이미 전날 오후 두시 쯤에 가게에 가서 82세에 나는 할머니사장님을 만나 면접까지 보았었다. 내가 찾아갔을 때는 점심시간이 지난 시간이였으나 가게에는 아직 몇 테이블의 손님들이 식사중이였다. 사장님은 간단하게 가게를 소개해주시고 홀에 있는 언니를 소개해주셨다. 흑룡강성 목단강에서 온 언니는 제법 친절했고 인상도 좋았다.
가게에는 도합 열세개의 4인용 테이블이 놓여있었고 메뉴는 생각밖으로 다섯가지밖에 없어서 무척 쉬워보였기에 이튿날부터 바로 출근하겠다고 약속했던 것이다.
가게에 도착하니 주방아줌마가 먼저 도착해서 반갑게 맞아주었다. 작은 체구에 얼굴에 온통 주름살인 아줌마는 언뜻 보기에 우리 엄마랑 년세가 비슷해보였다. 몇마디 얘기를 주고받으니 아닌게 아니라 우리 엄마랑 동갑인 71세라는 것이였다.
세상에! 칠순 나이에 아직도 식당에서 주방일을 하시다니…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한국에서는 6, 70대 아줌마들이 식당일이나 가정부로 일을 하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고 뻐스나 택시기사로 일하시는 머리 하얀 아저씨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나는 먼저 아줌마가 타준 커피 한잔을 마시고 청소를 시작했다. 바닥청소가 끝날 무렵 목단강에서 왔다는 명화언니가 냅킨을 접는 방법이며 뜨거운 물에 삶아낸 수저를 정리해 수저통에 넣는 방법 등을 가르쳐주었다.
만두국 소스 그리고 김치와 무우채 두가지 밑반찬만 준비해놓으면 영업준비는 끝낸 셈이다. 그런데도 나더러 여기저기 모퉁이를 닦으라고 한다. 내가 볼 바에는 이미 깨끗하기만 했는데도 말이다. 그러자 언니가 사장님이 집에서 cctv로 지켜보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11시에 직원들이 식사를 했다. 반찬이라곤 배추김치, 파김치, 고추절임 등 밑반찬에 계란후라이가 전부였다. 아침에 빵 한조각 먹고 온 터라 나는 배고픈 김에 맛있게 먹었다.
11시 반이 되자 가게 앞은 점심식사를 하려는 대기자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우리가 서둘러 만두국물을 끓이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전화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명화언니가 전화를 받는다. 사장은 왜 더운 날에 손님들을 밖에 세워두냐고 야단이였다.
주방 준비가 덜 된 상태에 그렇게 들어온 손님들을 테이블마다 안내해드렸으나 더러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맛집은 맛집인 모양이였다.
나는 테이블마다 생수도 올리고 주문도 받으며 밑반찬도 날랐다. 비좁은 통로로 세명의 홀서빙들이 쉴새없이 만두국을 나르고 상을 치우고 대기손님들을 안내했다.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반복되는 일을 두시간 남짓하게 해냈다. 에어컨을 18도로 켜두었으나 땀벌창이 되였고 두 다리가 후둘거리고 팔도 시큰해났다. 나이가 제일 어리고 초보라 더욱 열성을 냈던 것 같다.
오후 두시 쯤 되여서야 빈 테이블이 생기기 시작했으나 사장님의 눈길이 자꾸 지켜보는 것 같아서 행주를 쥐고 여기저기 닦으며 숨도 돌리지 못했다. 다행히 세시 반부터는 저녁장사준비를 해야 하므로 더이상 손님들을 받지 않았다.
만두국이라 해봤자 허연 물에 다대기를 좀 풀어넣고 고작 조선만두 여섯개가 전부인 그 만두국이 1만 4천원씩 하는데 뭐가 그리 맛있다고 다들 줄을 서는지 궁금하기까지 했다.
저녁장사에 쓸 고추전도 만들고 수저를 다시 삶아내고 김치 밖에 없는 점심식사를 대충 마쳤다. 네시 반쯤 되니 실내 전등을 끄고 각자 방석을 챙겨 누워버렸다. 주방아줌마는 눕자마다 코를 드렁드렁 골았다. 나도 후줄근해서 눕긴 했으나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다. 귀전에서 계속 “만두국 두개요, 고추전 하나에 빈대떡 하나요, 비지 하나요” 하는 홀서빙 언니들의 주문소리가 쟁쟁 들려오고 있었다. 게다가 식사하러 온 손님들이 가게간판에 적힌 전화로 언제 영업하냐고 따지듯 묻는 전화까지 걸려와 통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렇게 눈이 말똥말똥해서 다섯시 반까지 누워있다가 일어나니 몸이 한결 무거운데 가게 앞에는 벌써 식사하러 온 손님들이 또 점심 때처럼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점심 때와 똑같은 반복이였다. 아니, 저녁이라 만두전골에 술을 마시는 손님들이 꽤 있었다.
만두국, 비지, 빈대떡, 고추전…
그렇게 복새판을 벌리고 뱅뱅 돌아치다보니 어느새 저녁 여덟시가 되여온다. 퇴근시간이 가까워오는지라 손님을 더 받지 않고 이미 온 손님들이 식사를 마치기만 기다려야 한다. 아홉시에 퇴근이니깐.
40년 력사를 자랑하는 맛집이라 배짱 또한 두둑하다. 찾아오는 손님들을 돌려보내는 가게라니…
여덟시 40분 쯤 되니 두 테이블 손님들만 아직 술을 마시고 있었다. 명화언니가 나더러 첫날 출근이고 집도 멀고 하니 먼저 퇴근하라고 등을 떠밀어준다. 실로 눈물나도록 고마웠다.
가게문을 나서니 오색네온등 불빛이 명멸하고 있었다. 고급쇼핑몰 외벽은 그야말로 눈부시게 황홀하다. 온종일 가게에만 있다보니 서울 강남의 하늘이 어떤지 야경이 어떤지도 모르고 하루를 훌렁 지나보냈다. 그러나 그런 아름다운 야경을 구경할만한 기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서둘러 전철과 뻐스를 두번 갈아타며 집으로 돌아왔다.
종아리가 다른 사람 다리처럼 여겨진다. 샤워를 하고 침대에 그대로 쓰러졌다. 나보다 먼저 온종일 건설현장에서 고된 막로동을 한 남편은 내가 집에 들어서는 것도 모른 채 코를 골며 잠에 곯아떨어져 있었다. 할 수없이 혼자서 시큰거리는 다리를 주무르며 뜨거운 물수건으로 콕콕 쏘는 무릎을 찜질하고 있는데 인기척을 느꼈는지 남편이 부시시 일어나 식당일을 할만 하냐고 물어온다.
순간 나는 참았던 눈물을 쏟고야 말았다. 평생 교단에 서서 애들을 호령할 줄만 알았던 내가 식당에서 남의 눈치를 봐가며 손님들 시중이나 들 줄을 누가 꿈엔들 생각이나 했으랴.
나는 남편 잘못 만나 개고생한다고 한바탕 해내고 싶었으나 해볕에 까맣게 탄 수척한 남편의 얼굴을 보고는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삼켜버렸다.
남편도 그렇고 나의 엄마 아빠 역시 한국에서 십여년 불법체류까지 불사하면서 고생을 해오지 않았던가. 그들이 겪은 고생에 비하면 나의 고생은 정말이지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속이 조금 후련해졌다.
잊지 못한 한국에서의 첫 체험현장, 그날은 나더러 참으로 많은 것들을 깨닫게 해주었고 늦게나마 부모님의 로고와 남편의 고생을 되새겨보게 만든 하루였다. 너무 늦게 철이 들게 만든 하루였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익혀가며 점차 환경에 익숙하고 내가 하는 일에 익숙해져갔다. 그리고 그런 날들이 벌써 2년째다.
민들레처럼!
내가 민들레를 좋아하는 리유는 어떤 환경 속에서도 때가 되면 파랗게 살아나 노란꽃을 피우고 하얗게 씨앗을 맺는 민들레의 강한 의지를 내가 닮고 싶어서이다.
그리고 한국생활을 하면서 나 또한 서서히 민들레를 닮아가고 있다고 나는 스스로를 격려하고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