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평
민들레는 속에 있는 쓰거운 즙을 함부로 내보이지 않는다
(할빈) 한영남
수필은 일상을 쓰되 일상에서 벗어나야 하고(생활의 예술화) 문학적이되 독자들에게 쉽게 다가설 수 있어야 하며(예술의 통속화) 그런 의미에서의 고저장단이 일정한 리듬을 타야 한다. 또 수필은 맛이 있어야 하고 멋도 있어야 한다. 맛만 강조하면 멋을 잃기 쉽고 멋만 강조하면 맛을 잃기 쉽다.
그런 어려운 외줄타기에서 용케 건너편까지 무사히 도착한 수필이 있다. 바로 강매화의 수필 <민들레처럼>이다.
강매화의 수필 <민들레처럼>은 얼핏 자기의 넉두리를 늘여놓은 것처럼 보이기 쉽다. 그러나 이 수필은 주섬주섬 늘여놓는 넉두리 속에도 수필이 갖추어야 할 요소들을 제법 잘 갖추고 있어서 호소력과 감화력을 두루 겸하고 있다.
수필은 서두에서 출근길에 발견한 민들레를 언급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수수하고 지극히 평범해보일지 모르는 민들레지만 <나>는 그 민들레를 제일 이뻐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저자는 민들레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술하지 않고 오로지 한국에서 겪은 생생현실체험을 친한 언니나 오빠한테 들려주듯이 들려주고 있다.
그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강매화 작가의 어려웠던 지난날에 대한 하소연도 느낄 수 있고 지친 등 기대일 언덕을 찾는 애타는 심정도 느낄 수 있으며 그 어려움을 끝내 이겨낸 자긍심조차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글줄에서 저자의 남편, 저자의 부모님들 역시 그와 같은 어려움을 겪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다. 이것은 단지 저자 가족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민족 전체가 겪고 있는 어려움으로 환원해볼 수 있는 것이다.
중국 조선족들은 한국, 일본, 미국, 러시아 등 세계 방방곡곡으로 다급한 행보를 펼쳐나가면서 시야를 넓히고 돈주머니를 불려왔다. 그러나 그 것은 결코 식은 죽 먹기가 아니였고 강매화작가의 말처럼 땀과 눈물의 반죽 그 자체였다. 바로 생활의 화사함 뒤면에 자리하고 있는 그 같은 땀과 눈물을 가감없이 들어내보이면서 수필은 독자들에게 사색거리를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작은 이야기에서 노스탤지어적인 정감과 디아스포라적인 정서를 동시에 잡아내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수필이 여느 수필보다 다른 점은 역발상을 펼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많은 수필들은 사물들에 인간의 삶의 모습을 투영시켜 독자들에게 메세지를 전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면 강매화는 수필 <민들레처럼>에서 역으로 인간의 삶을 민들레에 투영시켜 진실된 삶의 이야기를 클로즈업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장치는 보다 쉽게 독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독자들과의 공감대 형성에도 이바지하는 바가 적지 않다는 점을 꼭 말해두어야겠다.
특히 수필은 결말에서 굉장히 간결한 어투로 민들레를 좋아하는 리유를 밝히고 자신이 민들레를 닮아가는 모습 자체를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뉴앙스로 민들레의 이미지를 한결 높여주고 있는 것이다.
환언하면 대칭으로서의 민들레의 삶과 인간의 삶에서 가역반응이 가능하다고 역설하면서 서두와 조응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또한 수필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는 데서 높은 점수를 매길만한 것이다.
민들레는 요염하지 않고 수수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그 수수함 속에 아름다움이 숨어있는 것이다. 그리고 민들레는 속에 가둔 쓰디쓴 즙액을 함부로 내보이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 쓰디쓴 즙이 바로 약효가 뛰여나다는 것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바로 그 같은 민들레의 속성을 인간의 삶에 잘 녹여낸 강매화 작가의 수필 다루는 솜씨가 례사롭지 않다.
언제나 조용하고 모임 같은데서도 자기가 해야 할 일들을 말없이 잘 찾아하는 강매화만의 매력이 수필로 꽃을 피운 것이다.
민들레처럼 늘 씩씩하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