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글맛
(심양) 김희자
맛이란 미각을 통하여 느껴지는 감각인데 맛에는 흔히 “시다”, “달다”, “쓰다”, “맵다”라는 사미(四味)로 기본을 이루고있다. 그러나 실생활에서는 이러한 원초적 의미가 단순한 식생활의 범주를 넘어 인간생활의 방방곡곡으로 깊숙이 파고들면서 다채롭게 파생되였고 사람들의 의식이나 정서적 활동에까지 폭넓게 쓰이고 있다. 장구한 력사를 거치면서 경험과 교훈을 집약한 속담에서만 보더라도 “시다”는 “산(酸)”으로는 “일이 엎친데 덮친다”는 경우를 일컬어 “시다는데 초를 친다”라고 야유한 말도 있고 “맵다”는 “랄(辣)”로는 “작은 사람이 큰 사람보다 재주가 뛰여나고 야무지다”는 경우를 일컬어 “작은 고추가 더 맵다”라고 형상화한 말도 있고 “달다”는 “첨(甜)”이나 “쓰다”는 “고(苦)”로는 “세상의 괴로움과 즐거움을 다 겪었다”는 경우를 일컬어 “쓴맛 단맛 다 보았다”라고 간결하게 개괄한 말도 있다. 이렇듯 입맛인 사미가 사람들의 일상생활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면서 인간들의 희로애락을 형상적이고도 핍진하게 대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고보니 감정인 희로애락이 입맛인 “산, 첨, 고, 랄”과 절묘하게 접목되였다고 할 수 있지 않을가?
문자를 매개물로 하면서 사회생활을 반영하는 글 역시 다각적이고 다양한 맛을 가지게 된다. 좋은 글이라면 실제 존재하듯 주마등처럼 눈앞에서 맴돌게 되고 교향악처럼 감미롭게 귀가에서 흐르게 되는데 읽는 이들로 하여금 때로는 넘쳐나는 정열과 함께 흥이 도도해지면서 입맛이 좋다고 혀를 차게 되고 때로는 가슴을 치고 울분을 토하면서도 책을 손에서 떼지 못하게 된다.
“은같안 무지개 옥같안 룡의 초리
섣돌며 뿜난 소래 십리에 잣아시니
들을제난 우뢰러니 보니난 눈이로다.”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을 읽노라면 금강산폭포의 굉음이 귀에 듣기는듯, 폭포의 장관이 한눈 가득 채워지며 눈맛 귀맛 모두 즐겁게 된다.
“나는 여태까지 세상에 대하여 충실하였다. 어디까지든지 충실하려고 하였다. 내 어머니, 내 안해까지도... 뼈가 부서지고 고기가 찢어지더라도 충실한 로력으로 살려고 하였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를 속였다. 우리의 충실을 받아주지 않았다. 도리여 충실한 우리를 모욕하고 멸시하고 학대하였다.”
서해 최학송의 “탈출기”를 읽노라면 자기가 그 고통에 허덕이고 그 치욕을 당하듯이 분노로 치가 떨리고 피가 꺼꾸로 솟구치면서 입맛까지 잃게 된다.
글에서 이렇듯 희로애락의 맛을 느낄수 있게 한 비결은 무엇일가? 리론적으로 말하는 진실성, 형상성, 시대성 등에 대한 리해와 표현에만 있을가?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어떠한 배경 속에서 활동하는 인물을 두고 얽음새를 엮어가는게 글이라고 했는데 덮어놓고 이러한 요소들을 꽉꽉 채워넣었다고 해도 글로서는 아무튼 부족한 느낌이 든다.
“나는 아침에 밥을 먹고 학교로 갔고 학교에서 선생님들의 수업을 듣고 자습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 표현을 볼 진데 단어들을 어순에 맞게 배렬한 문장임에는 틀림없겠고 실존사실을 서술했다는 진실성에도 확신이 가겠다지만 어떤지 꼬장꼬장 말라있고 단어들의 라렬에 불과하여 글맛을 전혀 느끼지 못하겠다. 그렇다고 미사려구를 늘어놓는다고 좋은 글로 될가? 그것도 아니다. “산들산들 봄바람이 불어오자 강남갔던 제비들이 지지배배 노래하며 우리집 처마 밑으로 분주히 찾아들었다.” 이 표현을 볼 진데 계절에 따라 등장인물의 활동이 잘 묘사되였다고 하겠지만 사람들의 입에서 씹힐데로 씹혀진 껌딱지같아 역겨운 존재로만 느껴질뿐 글맛을 전혀 느끼지 못하겠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쓰는 글이 읽는이들에게 입 안에서 사르르 녹는 듯 하고 읽고나서도 그 맛이 입가에 남아 오래도록 감돌 수 있는 그러한 글맛을 낼 수 있을가?
글맛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가?
글맛은 결국 작가의 세계관이자 인생관이기에 일단 글맛은 인생의 맛에서 비롯된다. 학생이라고 다를바가 없다. 배움의 인생에도 백미(百味)가 있는만큼 그 맛들에는 행복과 고통, 쾌활과 비통, 유족과 빈곤 같은 등등으로 이루어지면서도 수시로 엇갈리고 뒤섞이며 돌고 도는게 인생일진데 사람들은 끝임없이 자기의 몫을 찾아 바쁘게 헤메이게 된다. 고통이나 고난같은 역경도 마다하지 않고 크고 작은 좌절도 감내하면서 말이다. 하긴 실패는 성공의 초석이요 실패를 딛고 일어서게 되면 그만큼의 총명과 지혜가 따라온다고 하였다. 이러한 인생길에서 체험하게 된 인생의 맛이야말로 글의 밑거름으로 되고 글의 기반으로 되는 것이다.
글맛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가?
글맛은 작가의 안목에서 온다. 안목이란 단순히 글재주가 뛰여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예리한 통찰력이자 삶의 체험을 통한 깊이있는 성찰이다. 우리가 흔히 접하게 되는 반려동물 강아지에 대해 쓴다고 하자. 단순히 “강아지는 귀엽다”라고 쓰는 것과 “주인을 본 강아지는 꼬리를 흔들며 깅깅거렸다”라고 쓰는 것에는 하늘과 땅 차이의 맛이 난다. 후자의 문장에는 작가의 독특한 시각, 즉 강아지의 애교와 충성심의 특징을 포착하였기에 “예쁘다” 혹은 “귀엽다”는 표현 없이도 이렇듯 독특한 맛을 낼 수 있었다. 이런 것이 작가의 내공이자 남다른 안목이 아닐가!
글맛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가?
글이란 문자로 엮어진 예술인만큼 글맛은 아름다움에서 온다. 문자를 엮어놓았다고 모두가 글로 되지는 않는다. 즉 자기가 감각한 그것을 곱고 예쁘게 절차탁마하여야 글로 되며 생동하고 형상적인 예술로 된다는 말이다. 언젠가 필자는 오지로 불리우는 향수하자로 학생들의 하령영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 문학강좌를 하던 그날 밤, 휘영청 둥근달과 총총한 별들을 바라보는 학생들은 저마다 감회가 깊었다. 별빛의 현상을 두고 “엄마별이 끔뻑거리자 아기별도 따라 눈을 깜빡거려요.” 소학교 꼬마의 형상적인 표현이다. 별무리 아래로 실구름이 지나는 현상을 두고는 “편지장이 날아갑니다. 나의 소원을 담고 쉼임없이 달려갑니다.” 중학생의 생동한 표현이다. 처음에서 “큰별”, “작은별”로 부르던 것을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자기의 인지에 알맞는 “엄마”와 “아기”로 바뀌여졌고 “실구름이 은하수를 넘어가다”로 지적하던 것이 “편지장”으로 변하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지적인 “소원을 담고” 소원하는 곳으로 날아간다고 표현하였으니 참으로 표현의 예술이며 미적향수를 주는 문학의 향연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가 흔히 보고 느낄 수 있는 생활의 토막토막들을 글에 담으면서 감정적 미각을 사로잡는 파, 마늘, 된장, 고추장 등 갖가지 양념을 넣고 조물조물 버무려 준다면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는 좋은글로 될 것이 자명하다. 여기서 말하는 “생활의 토막토막”은 사회의 현실이요, “갖가지 양념”은 사회를 바라보는 안목이요, “조물조물 버무린다”는 것은 글을 엮어가는 예술인데 이 세가지가 조화를 이루었다면 글맛이 물신 풍기는 좋은글로 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미를 진하게 풍기는 글이라면 독자들은 그 맛에 매료되면서 때로는 쾌재를 부르며 환성을 지르게 되고 때로는 넋두리를 치며 통곡을 하게 되는데 이러한 공명을 야기시키는 글이라면 “관동별곡”이나 “탈출기”와 같은 글맛은 물론이고 이러한 글을 쓴 저자 역시 제2의 송강이나 서해라고 생각한다.
이들의 글이야말로 진짜 글맛이 나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