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슈뢰딩거의 상자
(광주) 현청화
쵸쵸가 집을 나갔다.
아이들이 놀러 갔다 들어오면서 현관문을 제대로 닫지 않았던 탓일가, 고양이가 없어진 것을 내가 제때에 발견하지 못한 탓일가. 어느 쪽이든 간에 집에서 키우던 8개월된 고양이가 사라진것은 사실이다. 창문 틈으로 빠져나간 흔적도, 현관을 할퀸 발자국도 없었다. 그저 텅 빈 실내와 고양이 밥그릇에 덩그러이 남은 건조한 참치 조각만이 고양이가 없다는 현실을 내게 상기시켰다.
"쵸쵸?"
목소리가 벽에 부딪혀 흩어졌다. 아빠트 복도에 뛰여나가며 고양이 이름을 부르고, 계단을 오르내리며 쓰레기실까지 뒤졌다. 행여나 해서 옥상으로 통하는 계단을 올라가보았다. 옥상 문은 열려 있었지만, 그곳엔 싸늘한 바람만이 가득했다. 고양이가 미끄러져 넘어질 만한 란간도, 피 묻은 발톱 자국도 없었다. 없다는 사실이 유일한 증거였다.
다음 날, 나는 전단지를 뽑았다. 실종된 재빛 고양이. 이름: 쵸쵸. 배에 점박이 무늬. 호박색 눈동자. 사진 속 쵸쵸는 창백한 플래시에 움츠러져 있었다. 전단지는 아빠트 게시판과 편의점 창가에 붙여졌다. 전문 길고양이 사료를 놓아두는 곳에도 집에서 먹던 사료를 놓아두고 그위 벽에도 전단지를 붙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스치자 나는 생각했다. 살아 있다면, 언젠가는 사료 먹으러 오겠지. 그러면서 나는 지금의 이 상황이 슈뢰딩거의 상자 속 고양이의 운명과 흡사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단지도 사료도 슈뢰딩거의 상자 안에 던져진 질문처럼 답이 없었다. 고양이는 동시에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목격담이 증명해주기 전까지는.
그 다음날은 예정된 락양 출장이였다. 출장 가방을 싸는 동안에도 나는 텅 빈 사료그릇을 채워놓고 창문을 열어놓았다. 어쩌면 쵸쵸가 사료 냄새를 맡고 창문을 통해 들어올지 모른다는 망상에. 고속기차 창가에 기대여 흐릿한 하늘을 바라보며, 나는 손가락으로 유리에 글씨를 썼다. 쵸쵸. 어릴 때에도 이 이름의 고양이가 죽었었지. 그 이름이 비극일지 기적일지 알 수 없 듯, 우리의 미래는 항상 반쯤 열린 슈뢰딩거의 상자였다.
첫 번째 목격전화는 출장 둘째 날 밤에 왔다. "공원 화단에서 재빛 고양이를 봤어요." 목소리는 애티가 났고, 나는 날개라고 돋쳐서 날아가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두 번째 전화는 출장 마지막 날 아침이였다. "우리 아이도 나도 여러번 봤는데, 오늘아침 길고양이 터세에 밀려 아빠트를 떠나더라구요. 대체 고양이를 찾을 마음이 있기나 한 거에요? 왜 아직도 데려가지 않는 거죠?" 어른의 목소리에는 질책이 담겼고, 그 순간, 상자의 뚜껑이 흔들렸다. 나는 머리속으로 찬바람이 훅 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날 밤 나는 꿈에서 쵸쵸를 보았다. 고양이는 우멍한 눈으로 나를 한참 바라보더니 몸을 돌려 거대한 빛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광주로 돌아가는 짐을 싸면서 나는 아이들에게 쵸쵸를 꼭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내 목소리에는 힘이 빠져있었다.
출장 마지막 날에 아빠트 업주 위챗그룹에 사진 한장이 올라왔다. “옥상에 고양이 시체가 있어요. 관리처에서 빨리 치워주세요. 아미타불.” 나는 밤시간이라 무늬를 분간하기 어려운 사진 속의 고양이 시신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목덜미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지만 나는 마음 속으로 아닐 거야를 수없이 외쳤다.
집에 도착한 나는 단숨에 계단을 뛰여올라갔다. 옥상 문은 여전히 열려 있었고, 바람은 이번에도 싸늘하게 내 얼굴을 덮었다. 다만, 이번엔 적막한 죽음의 냄새가 바람에 섞여 날렸다. 옥상 곳곳에, 내가 혹시나 해서 뿌려둔 고양이 사료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사진속의 화단을 찾아 에돌아가자 익숙한 고양이 무늬가 한눈에 들어왔다. 가슴속에서 널장이 무너져 내렸다. 부풀어 오른 배, 움츠린 다리, 크게 뜬 눈과 점박이 무늬의 배...나는 고양이를 향해 한걸음씩 다가갔다.
애들이 깊이 잠든 자정의 시간에, 쵸쵸를 화단 옆에 묻으며 나는 눈물을 쏟아냈다. 슈뢰딩거의 상자를 열기 전까지는 우리는 아무 것도 확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상자는 이미 열렸고, 나는 어쩌면 오래 전부터 알았을지도 모른다. 미래란 이미 저쪽에 서 있는 것임을. 일주일 내내, 내 머리 속에선 쵸쵸가 동시에 살아 있고 죽어있었다.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들은 상자 속 확률의 파동처럼 나를 현실과 불안 사이로 이끌었고, 매번의 '관측'은 희망을 새로 쓴 다음 다시 지웠다. 하지만 진실은 단 하나—쵸쵸는 처음부터 집이라는 상자를 벗어난 순간 이미 죽어 있었다.
바람이 쵸쵸의 무덤 앞에 놓인 꽃잎을 스칠 때, 나는 좀씩 마음을 가라앉혔다. 지난 일주일동안 내 머리속을 점령했던 슈뢰딩거의 상자가 던지는 핵심은 '결과'가 아니라, 그 결과를 마주하기 전까지 우리 인간이 기꺼이 떠안는 '삶의 무게'라는 것을. 나는 쵸쵸를 찾을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런 방식으로 찾을 거라고는 결코 버라지 않았다. 쵸쵸의 죽음은 인간의 노력과 운명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비롯된 비극이었고, 일주일 동안의 불안과 상실을 통해 우리에게 진정한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었다.
나는 고양이의 죽음을 아이들에게 알리지 않기로 했다. 어쩌면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길목에는, 언제나 열려있는 슈뢰딩거의 상자가 놓여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