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그대는 꽃길로
(청도) 구인숙
살면서 절대 그 누구처럼 살기 싫다 라는 생각은 가끔 해봤지만 그 누구처럼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별로 해보지 않았다. 그러는 내가 한국에 있는 시댁의 외할머니를 찾아뵐 때마다 나도 할머니처럼 곱게 늙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거의 18년동안 해왔다. 나의 마음 속, 아니 실제로도 외할머니는 한결같이 곱고 우아했으니깐. 그렇게 곱게 백세 할머니가 될 수 있으리라 온 가족이 굳게 믿고 있었는데 바로 얼마 전 외할머니가 99세의 일기로 운명하셨다. 그 시점이 바로 내가 서울 공항에 도착한 때였다. 어쩌다 한국을 방문하게 된 일정이지만 마치라도 할머니가 부르신 것처럼 타이밍이 맞아떨어졌다. 공항에서 나와 밤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열심히 달린 덕분에 나는 할머니의 온기있는 마지막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잠자는 듯한 할머니 모습은 우아함보다는 온화했다. 나는 외할머니 귀전에 대고 작은 소리로 저 왔다고 인사를 드리면서 얼굴을 어루만졌다. 외할머니는 내 나이 상관없이 만날 때마다 “요 이쁜 거 구인숙이 왔구나~”하시면서 얼굴을 쓰다듬어주셨다. 외할머니가 일관성있게 나의 이름 석자를 불러주시는 것도 인상이 깊다.
그 이튿날부터 외할머니 장례식이 시작됐다. 드라마에서만 보던 그런 장례식을 처음으로 내가 직접 피부로 느끼면서 값진 경험을 하게 됐다. 나이 50대가 된 내가 여태 한번도 가족상을 치른 적이 없어서인지 마음 한구석은 죽음과 관련된 일에서 늘 나도 잘 모르는 두려움이 존재했던 것 같다. 그러나 백합꽃과 흰 국화꽃으로 예쁘게 장식된 제단 제일 우쪽에 걸려 있는 영정사진 속 외할머니 표정을 보는 순간, 무지의 두려움은 신기하게도 싹 사라지고 오히려 평안함을 느꼈다. 목에 페르시아 무늬의 스카프를 우아하게 두르고 하늘방향을 향해 환하게 웃고 있는 외할머니 영정사진, 그렇게 예쁠 수가...나는 영정사진을 보고 또 봤다. 영정사진은 좀 엄숙한 자태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나 보다. 평소의 우아함이 영정사진 속에서도 그대로 남겨져 있다는 것이 나는 너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인지 리별의 슬픔보다 하늘나라로 가는 외할머니의 길이 꽃길 같아서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결혼식은 부모님을 보고 장례식은 자식을 본다고 외할머니 장례식은 이 말을 립증이라도 해주는 것처럼 자손들과 조문객으로 북적이고 또 화려했다. 슬하에 여섯 자매를 두신 외할머니, 자녀교육을 무엇보다 중요시해 그 시대에 모두가 대학교는 물론, 두명은 박사까지 나와 각자 현직에서 활약을 하고 있는 바이고 사위들도 의사요 교수요 말그대로 빵빵한 엘리트 집안이다. 시어머님의 형제들은 모두가 외할머니에게 지극지성이였다. 평소 한국 갈 때 만나뵙기 힘들었던 시어머니의 형제들, 그날 장례식에서 모두 만나보게 되면서 나는 외할머니의 마지막 길이 전혀 외롭지 않은 축복이 가득한 아름다운 꽃길이라는 생각을 했다. 가는 길이 꽃길이길 바란다는 축복이 저 세상으로 가시는 외할머니께 더이상 적합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세상에서 모두가 행복한 혹은 완벽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아득바득할 때 꽃길을 걸으라는 축복이 얼마나 가슴에 와닿을 수 있을가?
외할머니는 거의 완벽을 추구하는 분이신 걸로 나는 알고 있다. 누구한테는 그 완벽이 괴로움으로 다가올 수 있었겠지만 외할머니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순간 순간의 버거움과 고통을 어느 날은 꼭 꽃길을 걸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잘 버텨내고 이겨왔을 것이다. 긴긴 세월 외할머니가 가족에 들인 공과 노력을 어찌 한두마디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만은 이 세상의 모든 짐을 내려놓고 다른 세상으로 가시는 길만은 진정한 꽃길일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우리 부부가 외할머니를 찾아뵐 때마다 외할머니는 꼭 예쁜 봉투에 그날의 축복을 적어 용돈과 함께 우리에게 주시곤 했다. 길지 않은 그 축복의 메세지에는 꼭 한문과 우리글이 같이 씌여져 있었다. 그런 축복의 메시지가 어찌 우리에게만 있겠는가. 모든 손주들에게 똑같이 해주셨을 것이다.
이번 장례식에서 손주벌들이 영정사진을 보면서 우스개소리를 했다. 할머니의 축복은 한문을 모르면 무슨 뜻인지 모른다고…그런 외할머니 마음이 귀해서 우리 부부는 받은 봉투들을 다 모아두었다. 후에 알고 보니 외할머니의 자녀들도 그리고 기타 자손들도 그런 봉투들을 많이 모아두었다고 한다. 가족들은 그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외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물을 슬그머니 훔치고 했다.
유품중에서도 외할머니의 지난 세월의 순간순간들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외할머니는 일기를 자주 쓰셨다. 한권의 노트에 몇년의 짧은 일기들이 기록돼있는 것도 있었다. 입관식을 할 때 일기장 몇장을 잘라서 관 속에 군데군데 넣어드렸다. 딸들은 그 일기를 읽으면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 그러는 모습이 나에게는 그토록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중 21년도에 쓴 짧은 일기가 정말 기억으로 남는다. 지금으로부터 4년 전 일이니 나이로 보면 95세일 것이다. 일기내용은 간단했다. 어떻게 하면 자식들의 본보기가 될 것인가라는 것, 또 한번 자녀들의 울음을 터뜨렸다. 100세를 달리는 년세, 이제는 자식에게 모든 것을 맡겨도 이상치 않은 년세임에도 자식에게는 항상 본보기가 되야 한다는 그런 지조, 외할머니가 또 존경스러워진다. 곳곳에 존경심과 그리움을 남겨두고 떠나시는 외할머니, 내가 영정사진을 자꾸 보게 되는 리유일지도 모른다.
외할머니는 철저하신 분인 것 같다. 몇 년 전부터 이 세상일들을 차츰차츰 아름답게 정리하셨다. 재산보다도 몇십년의 수많은 추억들을 자녀별로 정리해서 나눠주셨다. 자녀들이 많다 보니 재미있는 해프닝도 있었다. 언젠가 우리가 찾아 뵜을 때 우리 결혼식날 일기를 찢어서 봉투에 넣어주셨다. 너무나도 값진 추억을 주신 것 같아서 엄청 감동했다. 집에 와서 다시 보니 웃음이 터지는 장면이 있었다. 일기장 뒤면이 외삼촌댁 일기였다. 그것도 절반 뚝 잘려있었다. 남편 말이 더 배꼽을 잡게 했다. “우리가 일찍 잘 받아왔구나, 늦게 찾아 뵀으면 외삼촌댁에 전해졌겠지.”
시댁의 외켠 가족에는 가는 곳마다 할머니의 손길이 남아 있을 것이고 또 내가 모르는 수많은 울고 웃을만한 스토리가 있겠지만은 마지막 가는 날까지 오직 정신력으로 최선을 다해 살아가신 외할머니의 의지가 나에게는 더없이 존경스럽다. 더구나 장례식은 순간순간 눈물을 금치 못할 때도 많았지만 그래도 호상인지라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빈소 앞에서 외할머니 영정사진을 모시고 가족사진을 찍고 하트까지 날렸다고 하면 모두가 의아해할지도 모르겠지만 우리는 그렇게 했다. 그리고 또 환하게 웃으면서 가족사진을 찍었다. 리별의 슬픔을 보여드리는 것보다 가시는 길에 기쁨을 더해드리는 것이 외할머니가 더 좋아하실 것 같다. 저 세상으로 가시는 길에 가족이 환하게 웃는 할머니를 선택한 리유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외할머니 가시는 길이 꽃길이니깐.
나는 외할머니처럼 살아가고 싶은 진짜 리유를 이제는 좀 알 것 같다.
외할머니, 이제는 저 세상에서 영원히 꽃길을 걸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