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원수기
“아버지가 그랬지. 우리 딸 꼭 잘한다고”
심양시화평구서탑조선족소학교 리영주
코로나로 인한 온라인수업은 나와 학생들을 이어주는 특별한 련결고리가 되였다. 카메라를 켤 때마다 모든 정신을 가다듬어야 했다. 학생만이 아닌 온 가족이 앉아서 시청하는 수업, 매 한시간 한시간이 공개수업이라는 생각에 정말 신경이 곤두서지 않을 수 없었다. 코로나가 기승부리는 동안 온라인수업은 어느새 우리의 일상이 되였다.
코로나로 세상이 어수선한 어느 하루 나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땅이 뒤엎히는 슬픔의 순간을 겪어야 했다. 아버지가 영영 나의 곁을 떠난 것이다. 아버지가 세상뜬 그날 밤, 외로움과 그리움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기댈 언덕을 잃은 듯 슬픔이 넝쿨처럼 나를 휘감았다. 어둠 속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와 함께 했던 따뜻한 순간순간들을 머리 속에 떠올렸다. 나는 아버지 사진을 가슴에 꼭 안고 아버지와 속삭이였다. 집 떠나는 길 아무리 험하여도 조심조심 가시고 오시는 길 잘 기억해서 꼭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시라고 마지막 하늘길 대화를 나누었다.
아버지를 하늘나라로 떠나보내고 나는 나른한 몸을 일으키고 또 컴퓨터 앞에 앉아야만 했다. 수업준비를 하는 컴퓨터 화면 하나하나가 바늘처럼 나의 가슴을 찔렀다. 정말, 모든 교학업무를 다 외면하고, 아버지와 단둘이 가상의 세계에서 실컷 울고 싶었지만 나는 또 일어나야 했다. 32명의 애들이 컴퓨터 앞에 똑바로 앉아 나를 기다리는걸 보면 나만의 슬픔에만 빠져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맘껏 슬퍼할 새도 없이 나의 온라인수업으로 다시 돌아왔다. 아버지도 아마 책임을 다하는 딸이 더없이 대견했을 것이다. 항상 어떤 역경 앞에서도 초심을 잃지 말라는 아버지의 말씀이 지금도 귀전에 생생하다.
아버지는 생전에 교육사업에 종사하는 이 딸을 참으로 자랑으로 여겨오셨다. 4년 전부터 우리는 국가통용언어로 된 교재를 사용해야 했다. 처음에는 눈 앞이 캄캄하였다. 조선어가 일상용어였던 내가 어떻게 중국어로 애들을 가르치지? 집에 와서 식사 때에 아버지와 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뭐가 걱정이야, 우리 아이들이 앞으로 조선말, 중국말 다 능통해질 거야. 우리 딸도 중국어로 얼마든지 산수 잘 가르칠 수 있지.”
아버지 세대에는 수학이 산수로 통했다. 아버지는 옛날 수학용어까지 써가며 나를 고무해주셨다. 정말 될 수 있을가? 혼자서 의문도 갔지만 한번 잘 해보기로 했다. 매일매일 거울을 마주 보고 그날의 수업안을 줄줄이 줄줄이 랑독을 하였다. 인터넷에서 명교사들의 수업영상을 보면서 수업용어들을 하나하나 익혀갔다. 그렇다. 어버지 말씀처럼 차츰차츰 교수언어들이 입에 잘 올랐다. 거울 속의 나도 점점 환하게 웃으며 수업안을 엮어내려갔다. 더는 랑독이 아닌 내 나름대로의 구술이 되여갔다.
우리 애들은 어떠할가? 처음에는 애들도 많이 어슬펐다. 머리 속은 풀이사로가 훤해서 필로는 답을 잘 적는데 입으로 서술하라면 엉망이다. 규범화된 수학언어가 아닌 내 나름식의 조선어식 구두표달이다. 정말 우스운 이야기도 많았다. 어떻게 하면 우리 애들도 수학언어를 잘 구술할 수 있을가고 나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였다. 연구과제를 정하고 “조선족 학생들의 수학언어 표달능력제고를 위한 연구”에 매진하였다. 연구한 만큼 방법이 생겼고 수업현장효과도 보였다. 공개수업시간에 수업참관을 오신 선생님들은 어떻게 이렇게 애들이 수학언어표달을 잘할 수 있냐며 혀를 끌끌 찼다. 내가 과제연구성과의 영예증서를 아버지께 보여드렸을 때 아버지는 그렇게 환하게 웃으셨다.
“아버지가 그랬지. 우리 딸 꼭 잘한다고.”
짧은 한마디 말씀이였지만 나에게는 또 한번 큰 힘이 되였다.
아버지의 칭찬의 말씀, 격려의 말씀, 정말 듣고 듣고 또 듣고 싶지만 이젠 추억에서나 들을 수 있는 아련한 기억으로만 남았다. 아버지가 나의 곁을 떠나신 것은 생에서 감당할 수 없는 아픔이지만, 아버지가 나에게 남겨준 한마디 한마디의 격려의 말씀은 나에게는 한줄기 빛으로 다가온다. 어둠 속에서 내가 잡고 있는 그 빛 한줄기, 내가 교육사업에서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며 계속 나아가도록 밝혀주는 밝은 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