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삶의 흔적과 마음속의 유토피아
-서정순의 근년의 수필에 대해서
(일본)엄정자
서정순은 20여년의 수필창작경력을 가진 베테랑 작가이다. 2010년 수필집 『흰눈이 내리면 그리움이 내린다』 (료녕민족출판사)를 출간하였고 『도라지』 수필 대상, 료녕신문 수필 금상, 길림신문 수필 대상, 그 외에도 국내외 문학상을 다수 수상한 중견 수필가이다.
이 글은 서정순 작가가 선정해서 보내온 근년의 수필들을 읽고 분석한 글이다.
서정순은 비교적 평탄한 삶을 살아온 작가이다. 하지만 사회적으로도, 가정적으로도 별 부족함이 없는 삶에 그는 오히려 결핍을 느끼게 된다. 그것이 불혹의 나이에 들어서는 지점이었고 그런 결핍으로 인한 갈증이 그를 문학으로 이끌었다.
또한 그가 처한 삶의 환경은 작가가 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연변대학교 조문학부를 졸업했고 심양시조선족중학교에서 조선어문을 가르쳐온 그는 한어漢語문화권 안에서 살면서도 한글을 자신의 삶의 주축으로 삼을 수 있게 되었다. 거기에다가 그의 주위에 있는 기자, 작가, 그리고 료녕성조선족문학회는 그가 순조롭게 작가의 길에 들어설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이러한 삶의 궤적과 환경은 서정순 수필에 “담수(淡水)와 같은 심정으로 바라본 인생이나 자연을 자유로운 형식에 담은 산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라는 수필의 특징을 잘 체현될 수 있게 하였다.
이글에서는 요동반도遼東半島에 삶의 토대를 둔 조선족 수필가인 서정순 수필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그가 그려낸 삶의 흔적을 따라서 드러나는 작가적 의식과 창작경향, 글쓰기에서 그가 지향하려는 유토피아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 ‘작은 블록들’에서 보이는 삶의 흔적
“수필은 개성적이며 고백적인 문학”인 만큼 자기 삶에서 제재를 찾게 된다. 서정순의 수필도 예외가 아니다. 그는 큰 기복이 없이 평탄하게 흘러가는 자신의 삶에서 깨치게 되는 인생의 도리를 자기 글의 주제로 삼고 있으며 그렇게 흘러가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들을 글의 소재로 삼고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비평가인 롤랑 바르트(1915~1980)는 글쓰기는 “불안정한 작은 블록들이나 잔해들을 쓰는 일이다.”고 하였다.
서정순의 ‘작은 블록들’은 그의 주위에 있는 가족, 친구, 동료들을 통해서 만들어지 고 있다. 그 무지개색 같이 다채롭고 ‘작은 블록들’을 쌓아 올린 것이 서정순의 수필이다. 「천상에 보내는 편지」, 「호로도에서의 만남」, 「가을이 되면 사람들은 왜 단풍 구경을 떠날까」, 「텃밭 정원」, 「련꽃늪과 화장실」, 「멋짐과 편함 사이」, 「텃밭 이야기」, 「숨어서 피는 꽃」, 「주위 풍경들을 돌아보면서」, 이 수필들 모두가 그런 ‘작은 블록들’로 지어진 아롱다롱 예쁜 집들이다.
글쓰기는 힘든 작업이다. 그럼에도 그가 20여년이란 긴 세월 수필창작을 계속할 수 있은 것도 이같이 그의 주위에 그를 사랑하는 좋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어머니, 남편, 딸, 형제자매 모두가 그의 열렬한 팬이고 지지자이다. 이런 사랑이 그가 계속 글을 써 나가는 동력이 되고 있다. 더욱이 어머니의 사랑이 제일 컸을 것이다. 그 사랑이 하도 커서 이미 결혼하여 한 가정의 아내이고 엄마가 되었는데도 친정집에 가면 또다시 그는 ‘아이’로 돌아갔다.
그저 친정에만 가면 그 시간은 오롯이 나만의 쉬는 시간이었습니다. 푹 자다 깨여나어 보면 엄마는 동그라니 앉아서 잠자고 있는 나를 정 깊게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엄마한테 딸은 바로 그런 존재였습니다. 바라보기만 해도 행복한, 바로 그런 거였습니다. “힘들 텐데 왜 더 자지.” 엄마가 나에게 제일 많이 한 말이었습니다. (「천상에 보내는 편지」)
작자는 자신이 엄마가 되어서도 깨닫지 못했던 ‘엄마’라는 말의 무거운 의미에 대해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야 비로소 깨닫는다. “엄마라는 이 바다에는 사랑과 인내, 관용과 베품, 희생과 용납만이 존재한 듯싶습니다. 하기에 엄마가 있는 곳은 언제나 한 가족의 중심이며 가족들 마음속의 메이커였습니다.” 이런 성찰을 거쳐 어머니의 자애로운 품성은 서정순의 작가적 의식에 ‘사랑’이라는 기본바탕을 깔아주었다. 이렇게 ‘사랑’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상실에 대한 아픔은 강렬한 서정으로 터져 나오는 것이다.
“엄마, 엄마를 보내고 난 후 나는 노래를 잃은 새처럼 웃음을 잃은 사람이 되여 있었습니다. … 엄마가 살아계실 적에 엄마 곁에 조금이라도 더 머물지 못한 제 자신이 한스러워 길을 가다 가도 저 먼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물을 흘리군 합니다. 그곳에 혹시 엄마가 있지 않을가 싶어서. 사무치게 엄마가 그립습니다.” (「천상에 보내는 편지」)
이러한 어머니에게 다하지 못한 ‘효도’에 대한 후회는 형제자매들에 대한 이해, 사랑으로 이어진다. “나만 빼놓고 기타 남매들이 집 떠나 멀리 있으면서 엄마 보러 오지 않는다고 투정만 했”었는데 그들도 엄마를 사랑했고 “엄마를 잃은 아픔에서 헤여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들에게 가졌던 오해를 풀게 되었다. 가족과의 연대성이 이뤄지며 그의 사랑은 형제자매를 포함한 큰 가족사랑으로 확대되었다.
어머니에게 못다한 사랑은 주위를 살피게 하였고 그러자 작자의 시선에 어린시절의 친구가 들어온다. 갑자기 소학교시절의 소꿉친구가 보고싶어 ‘나’는 료양에 사는 친구와 같이 호로도에 찾아간다.
“중학교를 나와서는 별로 만난 적이 없”고 “중학교를 다닐 때도 한반이 아니어서 접촉은 별로 없었”지만 “먹거리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둘 다 웃기를 좋아했”던 동년의 추억은 마음속에 깊이 간직되어 있었기에 친구를 만나러 떠난 것이다. 이는 작자의 무의식 속에 잠재하여 있던 고향으로의 회귀의식의 표현인 것이다. 정년퇴직을 하며 인생을 되돌아보는 시점에 선 작자에게 ‘동년친구’는 ‘고향’의 표상으로 되고 있다.
서정순은 동년친구를 묘사함에 있어서 ‘음식’이라는 선색線索을 쥐고 풀어나갔다. ‘나’와 동년친구는 어릴 때도 “먹거리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맞지, 맞지, 그 게 제일 맛있지?”하며 “서로 자기가 먹어본 것이 제일 맛있다며 한껏 과시하려고 목에 피대를 세웠”었다. 아직 풍족하지 못하던 그 시절이 친구와 함께 함으로써 작자의 무의식속에 즐거운 기억으로 저장되었던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요리사 못지 않은 실력을 갖고 있었”는데 그녀의 이야기도 주로 요리를 둘러싸고 이어진다. “배추를 20-30포기 사서 김치를 해서 이웃들에게 나눠주군 했’고 “맞은편에 살고 있는 이웃집 여자는 시골에서 박나물을 가져오면 자기보고 해달라고 한단다.”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조선족 학생들을 주말에 자기 집에 데려다 밥을 해먹인 이야기”를 하며 요즘은 남편 아는 분의 딸애가 “밥상을 차려놓고 와서 먹으라고 해도 잘 오지 않는다며 섭섭해했다.”
작자는 이같이 ‘먹거리’라는 인간생존의 가장 필수적인 요소를 쥐고 친구의 넉넉하고 배려심 깊은 성격을 묘사했기 때문에 ‘동년친구’의 모습이 친근하게 따뜻하게 독자들에게 다가올 수 있었다. 작자의 ‘사랑’이 친구를 통해 고향에로 확장됨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회감回感의 정서는 작품에 애틋함과 따뜻함을 느끼게 하며 정서적이고 시적인 분위기를 만들어준다.
「가을이 되면 사람들은 왜 단풍 구경을 떠날까」는 작가적 시각이 자연과 주위 사람들에게 넓혀진다. 작자는 사람들이 단풍구경을 떠나는 원인을 두가지로 찾고 있다. 하나는 아름다운 자연에서 찾고 있다. “겹겹이 포개져 멀리 저 멀리로 아득하게 펼쳐져가는 산은 언제 보아도 마음을 편안하고 풍요롭게 해준다. 영근 햇살 아래 비스듬히 누워있는 산들은 도심의 소음과 매연에 시달린 마음을 풀어주기에 족할 것 같았다.” 작자는 자연을 통해서 일상의 스트레스와 힘든 삶의 피로감에서 해방되어 치유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단풍구경을 떠난다고 말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함께 간 사람들이다. ‘나’는 사진을 찍으며 여러가지 포즈를 취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화끈하고 활력있고 역동적이고 열정적인 사람들과 함께 해서 많은 에너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멀어도 기어이 단풍 구경을 떠나는 것이다.”고 결론을 이끌어냈다.
이 작품에서 서정순 작가는 기행 수필 답게 본계 록석구(绿石谷)에 가서 단풍 구경하면서 본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묘사와 사람들의 즐기는 모습을 생동감 있게 그려내고 있다. 특히 ‘사진’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묘사함으로써 작자 자신은 현장 밖에서 관조적 시선으로 응시하기 때문에 글의 객관성이 높아지고 설득력이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이 작가 서정순은 일상의 ‘작은 블록들’을 쌓아 올려 ‘사랑’의 경지를 확장해가면서 작가적 의식의 심화를 이루었다.
- 사회적 부조화에 대한 메시지
서정순은 사랑으로 주위사람들을 품는 동시에 사회적 문제에도 시선을 돌리고 있다.
“글쓰기는 인간들의 현실적인 파롤을 그의 반사 장소로 받아들인다. …마치 그것은 사회적인 부조화의 세세한 부분을 재현함으로써만 그것을 알려주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은 모든 다른 메시지에 선행하여 직접적인 보고를 자신의 임무로 삼는다.” (바르트, R., 『글쓰기의 제로섬, 새로운 비판적 에세이』)
「텃밭 정원」은 학교 사택 1층 마당에 일군 텃밭을 둘러싸고 사회와 주위사람들이 보여주는 반응을 통하여 사회적 여론이나 인간 욕망의 부조화적 부분을 비판적 시선으로 그리고 있다.
“원래 이곳은 잔디와 관목을 심었으나 관리가 잘 되지 않아 몇 년이 지나자 쑥대밭이 되였고 여름이면 모기가 앵앵거리며 극성을 부렸다.” 그런 곳에 “사람들은 흙을 사서 나른다, 거름을 준다 하며 원래 돌멩이와 모래, 건축물 쓰레기 따위로 형편없던 땅을 제법 근사하게 만들어 놓았다. 텃밭은 해마다 파릇파릇한 야채들로 풍경을 이루었다.” 그렇게 되자 “1층에 살면 시끄러운 일이 많을 거예요.”하며 싫어하던 사람들도 “지금 땅값이 한평에 얼만데, 저 텃밭이면 얼마야?” “자기가 직접 가꾼 야채를 먹으니 얼마나 안전해.” “나도 당초에 1층을 살 걸 그랬어.”하면서 관심을 보이고 질투하기 시작하였다. 상급에 ‘고발’하는 사람까지 나타났다.
이같이 남이 잘 되는 것을 배 아파하는 시기 질투는 인간의 본성의 하나이다. 다만 그것이 도를 넘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다른 사람의 이익에 해를 끼친다면 그것은 질타를 받아야 할 행위가 되며 그런 행위가 풍기로 된다면 그것은 사회적 문제가 될 것이다. 때문에 서정순 작가는 이런 “사회적인 부조화의 세세한 부분을 재현”(바르트)하여 사람들에게 알려주면서 사람들에게 주의를 주고 있다. 작자는 “멀리 피해서 바라만 보고 있”는 관조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지만 그러한 사회적 문제를 제기하였다는 점에 이 글의 의미가 있다고 본다.
「련꽃늪과 화장실」에서는 아름다운 연못에 세워진 화장실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있다. 아무리 진흙 속에서 자라면서도 오염되지 않는 것이 연꽃의 아름다움이라 해도 그 사이에 화장실이 있다면 아름다움에 손상이 갈 수밖에 없다. 운치 있게 지은 예쁜 화장실도 아니고 “벽돌과 시멘트”로 대충 지은 “옛날의 재래식 화장실”이라면 더욱 경관을 파괴하며 사람들의 흥을 깰 것이다. 서정순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화장실혁명’”을 하는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진 발상이라는 점에 초점을 두고 비판을 하고 있다. 단지 ‘화장실’ 문제가 아니라 결국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사회적 관념 문제임을 지적하였다.
「멋짐과 편함 사이」는 여성들이 애용하는 하이힐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여성이라면 거의 누구나 신는 하이힐은 그 사람의 인생관을 나타내는 표상이기도 하다.
작자도 원래는 하이힐 애용자였다. 그가 인생에서 처음으로 산 하이힐은 “연변 서시장에서 사 신은 7원짜리 하아얀 하이힐”이었다. 그 하이힐을 신고 놀러 갔다가 “친구와 나는 발이 너무 아파 그 하얀 하이힐을 벗어 들고 인적이 없는 밤 깊은 거리를 맨발로 걸어온 적이 있다.” ‘편함’보다는 ‘멋짐’을 선택하던 시기였다. 그 시기에는 하이힐만 아니라 모든 일에서 그러한 인생관으로 살아갔을 것이다. “남편과 데이트할 때도 늘 그의 키에 어울리려고 시중에서 파는 최고로 높은 하이힐을 신고”다닌 바람에 남편이 그녀의 키를 착각하고 큰 사이즈의 원피스를 선물해서 낭패 본 일도 있다. 학교에서 수업할 때도 “하이힐은 높이 서서 군림하는 듯한 느낌이어서 스스로도 위엄이 있어 보였고 기질도 있어 보였고 은근히 멋도 있어 보이는 것 같았다.” 이 시기의 작자에게 ‘하이힐’은 곧 자존심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작자의 의식에는 변화가 일어난다.
하이힐은 고무풍선에 바람을 넣듯 나의 비여 있는 머리와 마음을 채워주었다. 멋져 보여, 교양 있어 보여, 하나도 꿀리지 않아 하며 속살거리면서. 나의 내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내 마음을 키우는 진정한 자양분은 무엇인지, 왜서 잘 보이려고 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예쁘고 멋지고 매력 있고 녀성적인 외적인 모습만 간절히 원했다. (「멋짐과 편함 사이」)
외면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던 젊은 시절의 인생관에 대한 자아성찰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많은 일을 겪으면서 ‘나’는 점차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고 하이힐을 버리고 편한 운동화를 신었다. 그래서 여자 동창들에게서 ‘녀포신’(신조어, “여자를 포기한 신”) 을 신고 나왔다고 비웃음을 당하기도 했지만 그는 필요할 때는 하이힐을 가방에 넣고 갈지 언정 운동화를 신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외적인 것보다 내면적인 것, 실제적인 것을 추구하는 인생관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언제나 그러하듯 화려하나 텅 빈, 신비로우나 공허한, 경이로우나 불편한 것들은 결국 알차고 실속 있고 필요로 하는 것들에 자리를 내어주게 될 것이다.” 하고 작자는 ‘멋짐’ 대신 ‘편함’을 선택한 이유를 말하고 있다.
서정순 작가는 이 글에서 ‘하이힐’을 외적인 것을 추구하는 허영의 표상으로 쓰고 있다. 물론 하이힐을 신는 것을 다 허영심의 표현이라고 볼 수는 없다. 하이힐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으로 자신감을 찾고 멋진 인생을 살아가는 여성들도 많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그 자신감과 아름다움으로 성공의 길로 나아가는 여성들도 많다. 다만 이 글에서 작자는 ‘하이힐’을 외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상징적인 ‘표상’으로 삼고 그 대조속에서 내적인 아름다움의 중요성을 어필했을 뿐이다. ‘하이힐’을 통해서 인생관의 변화를 보여준 것이다.
이같이 서정순 작가는 사회적 문제에 시선을 돌리고 의미작용을 하는 상징성적인 사물을 선택하여 의미전달을 함으로써 문학적으로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 자아에 대한 직시와 성찰
서정순 작가에게 ‘텃밭’은 의미가 깊은 ‘대상’인 것 같다. 사회적 문제제기를 할 때에도 ‘텃밭’을 묘사대상으로 삼았고 자기의 ‘자아’를 직시하는 글에서도 「텃밭 이야기」를 쓰고 있다.
서정순은 자신이 텃밭을 좋아하는 원인을 고향과 어린시절의 기억에서 찾고 있는데 이는 무의식속의 회감回感의 작용으로 인한 것이다. “심고 싶은 꽃이나 꽈리들을 심군 하였”던 동년의 작자에게 “텃밭은 나의 놀이터였고 나의 정서의 요람이었다. 시골을 떠나 도시에 살면서도 텃밭은 나에게는 하나의 소망이었다.”
처음에 ‘나’는 “손으로 풀이나 뽑고 씨만 뿌려 놓으면 되는 줄 알았다.” “놀이용 호미와 넙죽한 삽 한 자루, 이렇게 나의 텃밭 일구기”가 시작되었지만 풀을 뽑고 박힌 돌과 벽돌장을 주어내느라 몸은 고달팠고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달 동안 견지하여 끝내 밭을 일굴 수 있었던 것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 과정이 자기의 ‘자아’를 수련하는 과정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온 몸이 물주머니로 되는 힘든 상황인데 ‘나’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낀다. ‘달빛’, ‘날벌레’가 ‘벗’이 되고 자연의 숨결을 느끼고 있다. 자연과 합일된 ‘자아’의 모습, 학교와 집 안에 폐쇄되었던 자아가 자연속에 녹아 들며 ‘나’는 자기가 하는 일에 뿌듯함과 성취감을 느낀다. 자아의 발전이 보여지고 있다.
황무지가 ‘텃밭’이 되고 거기에서 생명이 자란다. ‘자아’의 성장이 보이고 있다. 무엇을 어떻게 심어야 하는지 알게 되었고 남을 따라하지 않고 자기에게 필요하고 적합한 것을 알게 되며 의존적인 ‘자아’로부터 독립적인 ‘자아’로 발전하고 확립되었다. 이렇게 “나를 즐겁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텃밭 가꾸기”는 작가 서정순의 ‘자아’의 성장기가 되었다.
「숨어서 피는 꽃」은 관상용화분으로 사온 칼라테아 루피바르바(波浪竹芋)가 뜻밖에 꽃을 피운 이야기를 쓰고 있다. 관엽식물이라 이 나무가 “꽃을 피울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했”었는데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꽃이 피며 의외의 경희(惊喜)”를 준다. 작자는 숨어서 피는 그 꽃의 ‘겸손함’, 더욱이 “외계와는 관계없이 오롯이 자신만의 생리에 따라 때가 되면 꽃을 피우는 그 진지함, … 구석진 뿌리 주위에서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열심히, 열심히 꽃을 피워가는, 바보스러울 만큼 고집스러운 그 강대한 생명의 힘”에 감동을 느낀다.
또한 칼라테아 루피바르바 같이 묵묵히 열심히 자기 일을 해 나가는 철령 조선족문화관의 김관장의 모습을 그리면서 그와 자신을 비교하고 자기를 돌이켜본다. 작자는 초라하고 작아 보이는 자신을 직시하면서 자아성찰에 들어간다. “주어진 섭리에 충실하며 진지하게 모든 것을 대할 때만이 생명의 가치는 빛을 뿌리는 것 같다. 자신에 대한 진지함은 바로 강한 생명의 힘이며 자신의 생명에 대한 존중이라는 생각이다.” 이런 성찰은 작가의식의 변화를 일으키며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되려는 마음가짐을 가지게 한다.
「주위 풍경들을 돌아보면서」는 ‘정년퇴직’이라는 인생의 변곡점을 맞으면서 느끼는 실존의 불안과 그로 인한 자아성찰을 보여준다.
퇴직하면 뭘 하지 하고 수없이 나에게 질문을 했고 주위에도 물어보았다.
남편에게 물었더니 집에서 글 쓰면 되겠네 한다. 딸에게 물었더니 엄마 하고 싶은 거 해 한다. 동생한테 물었더니 유람이나 다녀 한다. 문학하는 지인한테 물었더니 찾는 사람이 있겠지요 라고 한다. 이틀전에는 시를 쓰는 소시적 고향 친구를 만나 물었더니 함께 동행하는 문학인이 되자고 한다. 이제 남은 것은 내가 판단하고 선택하고 방향을 정하는 일이다. (「주위 풍경들을 돌아보면서」)
실존의 불안으로부터 질문을 던지나 사람마다 다른 대답을 내놓았고 이는 그에게 선택을 종용하였다. 하지만 작자는 선택에 급급하여 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성찰을 통하여 ‘퇴직’은 인생의 마무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로부터 불안은 해소되며 “나를 좀 더 가치 있게 해주고 나로 인해 내 가족과 주위 사람들이 빛을 느끼게 한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나는 선뜻이 해나가리라”고 미래지향적인 결론에 이르게 된다. 서정순은 작가이다. 그러니 그는 자기의 글로 주위 사람들에게 ‘빛’을 줄 것이다.
이와 같이 서정순은 자아에 대한 직시를 통해서 작가로서의 실존의 의미를 찾고 자기의 인생이나 사회, 자연 같은 것에서 느끼고 생각되는 점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바람이라면 그의 수필이 지성에 바탕을 두고 한층 더 깊은 성찰로 새로운 비전을 이룬 수필로 거듭났으면 하는 것이다.
결론
서정순은 일찍 「문학회와 나의 꿈」(2009년)이라는 글에서 “글쓰기는 이미 내 마음의 유토피아가 되였다.”고 하였다.
글쓰기에서 ‘유토피아’는 무엇인가? “유토피아는 신화화된 글쓰기를 쇄신하는 모든 작업과 그 성과로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을 가리킨다.”(김휘택, 「롤랑 바르트의 이론에서 ‘유토피아’에 관한 연구」)
몇 천년의 역사를 내려오며 ‘글쓰기’는 하나의 ‘신화神話’가 되었다. 오랜 시간 내려오며 사람들은 ‘신화神話’라는 기표에 거의 완벽한 의미들을 붙여 놓았다. 문학 역시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그런 의미화, ‘신화화’가 된 것이다.
시, 소설, 희곡에 비하여 수필은 상대적으로 역사도 길지 않고 수필隨筆이란 그 말대로 ‘붓을 따라서, 붓 가는 대로 써놓은 글’이라는 해석으로 비교적 자유롭다고 하지만 기본적 규칙은 대체적으로 통일되어 있다. ‘문학’은 “이미 완성된 질서를 상정한다.” (바르트, R, 『신화학』) 그런 의미에서 글쓰기에서의 ‘유토피아’는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이다. 하지만 기존의 글쓰기를 뛰어넘으려고 하는 시도가 글쓰기에서의 ‘유토피아’로 규정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우리 작가들이 지향해야 할 곳이다.
서정순 작가도 글쓰기에서의 ‘유토피아’가 꿈이라고 한 것만큼 앞으로 계속 끊임없이 자기의 글을 쇄신하며 새로운 도전을 거듭해 나가야 할 것이다. 서정순 작가의 도전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