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부애여산(외 1편)
发布时间:24-04-17 07:48  发布人:金昌永    关键词:   

수필

부애여산(외 1편)

(봉성) 장문철

어느 날 콩트 “산보”를 읽었다. 한 녀자애가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다가 리혼했다. 부녀는 반목했다. 딸은 신변에 아이가 달렸고 생활이 아주 빈곤했다. 어머니는 보기 딱해서 아버지가 산보를 나간 짬에 딸과 애를 데려다 더운 밥을 먹이군 했다. 그런데 비가 내리는 어느날, 조손 3대가 공교롭게 아버지와 부딪치게 됐다. 아버지는 어색해서 말을 했다.

“앞으로 집에 와서 밥을 먹을 때는 피해 다니지 말거라, 비가 오는 날에도 애비가 밖에 나오게 하지 말고!”

나는 이 글을 읽고 울컥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부모가 자식에 대한 사랑은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 나를 배반하지 않는 것중에 하나는 부모이고 다른 하나는 지갑 속에 있는 돈이라고 한다. 부모가 하는 모든 것은 자식들을 위해서다. 아버지는 자식이 기댈 수 있는 산이며 막막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 힘을 주고 방향을 잡아주는 등대와 같은 분이다.

지난 세기 우리 나라가 3년 자연재해로 전 국민이 굶주림에 시달리던 때 다섯살 먹은 나는 너무 배가 고파서 공사 간부로 계시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아버지를 찾아가려면 기차로 두 정거장을 가야 하는데 나는 차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냥 어른들을 따라 차에 올랐다. 그전에 아버지를 따라 한번 가본 적이 있어서 무난히 찾아갈 수 있었다.

공사에서 아버지의 몫으로 나오는 점심은 어린애 주먹만한 옥수수떡 한개였다. 아버지는 점심을 굶으셨다. 오후에 아버지는 나를 다시 기차에 태워서 집으로 보냈다.

아버지는 죽어도 나물죽을 먹지 않는 나를 살리려고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몰래 조선에 보냈다. 그러다 1965년 식량형편이 호전되자 다시 조선에서 나를 데려왔다. 그때까지 나의 호구는 그대로 있었다.

조선족학교가 현성에 있었으므로 나는 현성에서 학교를 다녔다. 아버지는 현성에 출장을 갈 때마다 나를 데리고 나가 점심을 사 먹이군 했다.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다. 조선특무로 몰리여 농촌에서 4류분자들과 함께 로동개조를 하던 아버지께서 하루는 생산대의 물건을 사러 현성에 오셨다.

아버지는 오후 3시 쯤에 나를 호출했다. 차 시간이 아직 남았으므로 나를 데리고 역전 앞에 있는 인민밥점으로 갔다. 아버지는 설탕소삼각찐빵  4 개를 주문했다. 그때는 량표가 바를 때였다. 그래서 나는 늘 배를 곯곤 했다. 나는 사탕소삼각찐빵을 보자마자 세개를 뚝딱 해치웠다. 아버지는 상냥하게 웃으며 마저 먹으라고 했다. 나는 배가 부르다고 했다. 아버지는 남은 한개를 아주 맛있게 드시였다. 점심을 굶은 것이 분명했다. 자기의 굶음보다 자식의 굶음을 먼저 생각하는 아버지의 사랑이였다.

지금도 아버지를 생각하면 눈물이 핑 돈다. 사랑만 듬뿍 받고 효도를 못한 것이 한스럽다. 나무는 고요하게 있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은 어버이를 봉양하자고 하나 어버이가 기다려 주지 않누나! 나는 지금 흔해빠진 사탕소삼각찐빵을 볼 때면 아버지가 사무치게 그리워지군 한다.

                                부모의 애정

   식량이 부족할 때 어머니는 아버지의 밥을 푸고는 입쌀과 잡곡을 마구 섞어버리셨다. 우리는 으레 그런 법이려니 하며 자랐다. 맛있는 것이 있으면 먼저 어른에게 드리는 것을 당연한 도리로 알았다. 두부국을 끓여도 우리의 사발엔 국물뿐이였다. 닭을 잡아도 날개죽지 하나 차례지면 운수대통이였다. 아버지는 닭다리 고기를 우리에게 나누어주었다. 우리는 으레 아버지는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아버지가 특무로 몰려 갇히였을 때 어머니는 한없이 우셨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으면 어떻게 사느냐는 것이였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살아가는 등대였다.

어머니는 2007년 여름에 80 세 일기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하늘이 무너졌다고 하셨다.   60성상을 함께 한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있어서 하늘이였던 것이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골회를 장의사에 기탁하라고 했다. 딱 3 년 두었다가 당신이 죽으면 함께 강에 뿌리고 3 년후에도 당신이 죽지 않으도 그 때는 강에 뿌리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자식들이 아무리 잘 모시노라 애를 써도 가끔씩 탄식을 하셨다. 어머니에 대한 연연함은 시종 변함이 없었다. 딱 3 년만인 2010 년에 아버지는 83 세 일기로 한많은 세상을 하직하셨다.

우리는 보금자리를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