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무영(无影) 최태렬 소설가를 기리며
(심양) 서정순
언제부터 최태렬 소설가에 대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어떻게 손을 대야 할 지 몰라 차일피일 미루어왔다. 벌써 최선생님께서 저 먼 세상으로 떠나가신 지도 수년이 되였다. 해마다 립동이 다가오는 때면 나는 최선생님을 떠올린다. 내 기억으로는 아마 이 쯤해서 그분의 타계 소식을 들은 듯하다. 한국에서 갑작스럽게 돌아가셔서 추모식도 없었다. 료동문학 위챗방에 리문호 시인께서 추모시 한수를 올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러면 안되는데, 이렇게 지나가서는 안되는데 하면서도 지금까지 미루어왔다. 이제 더 쓰지 않으면 최선생님은 내 기억의 깊은 창고 속에서 영영 잠들어 버릴지도 모르겠다.
나는 간혹 선생님이 소설가가 아니라 철학가가 되였으면 어땠을가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할 때가 있다. 훤칠한 키, 수척한 몸매, 웃음기 없는 근엄한 표정, 깊이를 알 수 없는 웅숭깊은 눈, 도대체 어떤 사명을 타고 났길래 항상 침묵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가. 그 침묵 속에 앙금처럼 가라앉은 마음의 정열과 세상에 대한 자신만의 랭정한 판단과 생각을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분출하려고 했던 것일가. 그분의 소설 쓰기는 어쩌면 태여날 때부터 천직처럼 주어졌던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압록강은 말한다》라는 책에 선생님의 프로필은 이렇게 적혀있다. “최열(다른 곳에서는 최렬이라고 썼음), 본명 崔泰烈, 1945년 요녕성 신빈현에서 출생.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회원. 심양시조선족문학회 이사, 1980년 단편소설 〈약속〉으로 문단에 데뷔. 중•단편소설, 수필 등 50여편의 문학작품을 발표. 수차 국내의 문학상 수상. 그외 10여만자의 번역작품이 있음.”
50여편의 문학작품을 발표했다고 하는데 지금 내가 찾아낸 것은 고작 5편뿐이다. 《압록강은 말한다》에서 중편소설 〈거리의 여인〉을 만날 수 있었고 《료동문학》5집에서 단편소설 〈저무는 해〉(2003년), 《료동문학》8집에서 단편소설 〈알 수 없는 행선지〉(2005년), 《료동문학》12집에서 단편소설 〈친구 주가〉(2007년), 《료동문학》17집에서 고 김군 선생에 대한 추모문 〈그리움만 남겨놓고 간 사람〉(2010년) 등 작품들을 접할 수 있었다. 나는 이런 소설들에서 선생님의 모습이 비치지 않을가 싶어 곰곰히 읽어보았다. 나는 선생님의 소설들에서 혹시 선생님의 자전적인 모습들이 비쳐질가 싶어 곰곰히 읽어봤지만 중편소설 〈거리의 녀인〉을 내놓고는 기타 단편소설들은 아주 랭정하고도 객관적으로 2000년 좌우 코리아드림으로 격변기에 처한 조선족 농촌의 시대상을 소설 속 인물들을 통해 리얼하게 반영하고 있다. 소설가답게 현실을 보는 선생님의 안목은 예리하고 랭철했다.
또한 선생님께서 혼을 모아 쓴 작품들을 읽느라면 적중하고 능란한 언어구사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작품 속의 언어들은 마치 화선지에 반듯하게 그려진 그림 같은가 하면 물 흐르듯 유연하기도 하고 또한 찰떡처럼 찰져서 그 무궁한 매력에 깊이 빠져들게 된다. 이것은 나만의 느낌만은 아닌 것 같다. 선생님께서는 중편소설 《사막의 정한》으로 2005년 제1회 《료동문학》심기협문학상을 받으셨다. 그때 심사평을 했던 김호웅 교수께서는 이 소설은 인물성격부각과 배경설정, 이야기의 전개력 및 장면묘사에서 장점을 보이고 있으며 언어구사의 정확성과 비유의 생신함이 돋보인다고 하면서 구체적인 실례까지 들었다. 아래에 인용해본다. “‘공연히 장부책만 벌컥거리던 부기원은 애함애함 밭은 기침만 했다’, ‘앞이가 다 빠져 입이 합죽했다’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유일어의 정확한 구사, ‘그제야 란이는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구 헝클어진 머리는 흡사 두드려 잡은 부엉이 꼴이였다’, ‘논판인지 피판인지 모를 논에 모진 령감 수염보다 작은 벼이삭을 놓고 소출을 기대한다는 것부터가 어리석은 생각이였다’의 경우에서 보다싶이 상투적인 비유-‘죽은 비유’가 아니라 참신한 비유들을 창조함으로써 형상의 감화력을 한결 높이고 있다.” 언어란 것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부단히 변화되여 간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만약 선생님의 작품집이 있었다면 먼 후날 풍부한 우리말을 참고하게 되는 보물고로도 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2013년 8월에 접어드는 어느 여름날, 나는 한권의 책을 빌리려고 선생님을 찾아갔던 적이 있다. 선생님 집 주위 역에 내리니 선생님께서는 내가 필요하는 《심양조선족지》를 들고 벌써 뻐스역전에 나와 계셨다. 그날, 필요한 페이지를 복사하면서 나는 선생님께 소설집을 출간해야 되지 않겠냐고 조심스레 물어봤다. 그 때 선생님께서는 “누가 보지도 않을 책을 만들어선 뭘 하려고?”하며 단칼에 거절하셨다. 다같이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나는 그 때 말할 수 없는 비애를 느꼈다. 가슴도 짠해왔다. 모든 혼을 다 쏟아부어 글을 썼는데 그 글을 보아주는 사람이 없다는 현실에 나도 할 말을 잃었다. 그 때 선생님께서는 한창 《신흥툰촌사》를 집필하고 계셨다. 신흥툰을 대표할 수 있는 인물을 넣을 때 나를 넣겠다고 하셔서 “선생님, 제가 뭘 했다고요?”했더니 수필집을 이미 출간하지 않았냐고, 충분히 자격이 있다고 하셨다. 내가 “선생님, 자격으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선생님과 편선생님을 올리셔야지요.”라고 했더니 “작품집도 내지 못했는데 무슨 자격으로 …”하시였다. 선생님은 아니다 하면 아닌 거였다. 그때 집필하셨던 《신흥툰촌사》는 선생님의 마지막 작품이 된 셈이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뒤 선생님의 타계소식을 들었다.
최선생님과 나의 인연은 사제지간의 연을 맺으면서 이어졌다. 그전에는 한 마을에 있어도 멀리 떨어져 살고 있어서 어렸던 나는 최선생님에 대해 잘 몰랐다.
소학교 4학년 때인가, 한어선생님으로 선생님께서 우리 반에 들어오셨다. 어린 개구쟁이들이지만 귀로 들은 것은 있어서 “이 선생님 쎄대(수준이 있다는 말).”하며 서로 속삭거렸고 책상보다 엄청 높이 솟아있는 선생님을 보면서 수준있는 사람들은 다 저렇게 엄숙하고 키가 클가 하는 생각을 했다. 선생님 시간만 되면 조무래기들은 입을 다물고 꼼짝을 못했다. 키가 크신 선생님께서 웃지도 않으시고 그 깊은 눈으로 쳐다보면 엄한 꾸중 열마디보다 더 위력이 있었다. 아무리 까불이들도 선생님 시간만 되면 자라 목 들어가듯 쑥 들어가군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온다 간다 말도 없이 선생님께서 나오지 않으셨다. 30년이 지나서, 선생님께서 쓰신 글을 본 후에야 나는 그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쓰셨다.
“내가 학교로 들어갔던 그 시절은 지금 생각해보아도 조금 한심하던 시절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시기 교원의 래원이 고갈된 상태였고 그러면서도 무슨 바람인지 소학교에 모자를 씌워(戴帽) 중학반을 꾸리게 했었다. 학생은 있지만 선생이 없어서 절절 매는 시기였다. 내가 학교로 들어가기 전 벌써 많은 사람들이 교원으로 초빙되여 학교에 들어갔었고 또 그러다가 다시 촌에 내려온 사람도 여럿이였다. 빈하중농이 교육을 관리하던 시기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학교를 들락날락했어도 그런 ‘행운’이 나에게는 쉽게 차려지지 않았었다. 이 사람 저 사람 자꾸 갈아대다가 나중에는 더 바꿔댈 사람이 없으니 나를 생각했던 모양이였던지 나는 늦게나마 버젓이 민영교원의 한 사람으로 되는 ‘영광’을 가지게 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영광의 력사는 너무 짧았다. 교학을 제대로 해내지 못해서 그러했는지 아니면 처세술에 능란하지 못한 내가 학교 어른들과의 관계를 넉넉히 이어놓지 못해 그랬는지 교원을 줄이는 일이 생기면 나는 언제나 남먼저 축출대상이 되군 했었다.”
선생님의 글을 음미하며 읽어보면 례사롭지가 않다. 글 너머 깊이 잠재되여 있는 선생님의 풀길 없는 한과 아쉬움이 어쩔 수 없는 체념으로 나타난 듯 해 안타깝기까지 하다. 속에 담고 있는 앎의 지혜를 학생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욕구와 그 욕구를 박탈당한 당시의 허탈했던 그 마음이 오죽했을가 싶다.
이 글은 2004년 4월 16일 《료녕조선문보》 압록강 부간에 발표했던 선생님의 글 속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 글은 내가 심양시조선족문학회에 가입한 후 선생님께서 〈글을 써줘서 고마운 서정순〉이라는 제목으로 쓴 글이다. 이 글을 읽으며 나는 이렇게 넘치게 축복을 받아도 되냐고 스스로에게 묻군 했다. 그냥 선생님이라고 불러준 것 밖에 없는데, 선생님께 해준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선생님께서는 심양시조선족문학회에 들어온 내가 대견해서, 글을 쓰는 것이 자랑스러워서 글까지 써서 격려를 해주셨다. 하지만 선생님의 마음은 더욱 높고 더욱 넓은데 있었다. 이 글은 글 쓰는 나를 축복한 것만 아니였다. 이 글은 선생님의 문학회에 대한 바람이였고 한 문학인으로서, 민족 문학을 지켜가는 사람으로서의 사명감과 책임감의 표현이였다. 선생님께서는 그 글에서 이렇게 쓰셨다.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고 입으로 들먹거린들 무슨 소용일가마는 그래도 사람의 마음은 그런 것이 아니였다. 이런 것을 사제지간의 남다른 감정이라고 굳이 꼬집는다면 나는 구구히 변명을 하지 않겠지만 이런 장소에 나올만한 재량이 있는 사람이면 다 나와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내 마음 한구석에 언제나 간직되여 있었기 때문이였다. 이 바람은 선생이 학생에 대한 바람만은 아니였다. 보다 나젊고 패기가 있는 젊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우리 료녕문단의 생력군이 되여 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소원이 담겨져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민족 문학의 번영과 발전은 어느 일개인의 행위가 아니고 우리 민족 성원들이 다같이 노력해야만 할 바가 아닌가.”
지금에 와서 다시 읽어보면 선생님의 이 글은 더욱 가슴을 친다. 못 본 듯 안본 듯해도 누구보다 예리하게 문제점을 보아내셨고 언제나 말씀이 없으셔도 가슴 속에 이렇듯 큰 사랑과 넓은 마음을 가지고 계셨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듣는 것이 전부가 아닌 것임을 선생님을 통해 절절히 느끼게 된다. 이 글은 후배인 우리들에게 우리 문학이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이며 우리 문학을 이어가고 발전시켜 가는 길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를 일깨워주는 것 같다.
최선생님은 료녕성조선족문학회의 전신인 심양시조선족문학회 초창기 때부터 줄곧 우리 문학회에 몸을 담고 계신 분으로 료녕조선족문단의 원로이시고 대선배이시다. 지난 세기 80년대 말과 90년대 초 길지 않은 동안 ‘압록강문학상’ 평심활동에도 참여하셨고 한때는 료녕문단의 소설분과 주임으로 료녕조선족문단의 소설문학을 위해 묵묵히 자신의 재능과 열정을 기여하셨다. 선생님의 손을 거쳐 많은 소설들이《료동문학》에 발표되였고 소설가들과도 깊은 친분을 쌓았다. 특히 고 김군 선생님과는 나이 차이가 열살이나 나지만 호형호제하며 지내는 막역지우였다. 고 김군 선생님을 추모하는 수필 〈그리움만 남겨놓고 간 사람〉을 읽어보면 두분은 문학창작을 두고 거의 일주일 혹은 열흘에 한번씩 메일을 주고 받으며 문학 탐구를 진행하신 것으로 적혀있다. 이렇듯 문학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으로서, 료녕조선족문단의 중견작가로서 얼마든지 료녕조선족문단에 대해 큰 목소리를 낼 법도 한데 선생님은 한번도 자기를 내세우려고 하지 않았고 언제나 한켠에 조용히 앉아 지켜보고만 계셨다. 이 글을 쓰면서 문학회 선배들로부터 최선생님의 필명이 최렬 외에도 무영(无影)이라는 필명이 더 있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이것은 살면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선생님의 삶의 원칙이고 신조이기도 하지만 선생님의 순박하고 맑은 심성의 표현이기도 하리라. 그 대바르고 정직하고 깊은 문학적 수양으로 부조리한 현실과 세태를 꼬집고 익지도 않은 벼이삭처럼 잘났다고 빳빳하게 고개를 쳐드는 후배들을 따끔하게 혼내주기라도 했으면 얼마나 좋을가만 선생님은 묵언한 채 그 모든 것들을 자신의 작품 속에 펼쳐놓았다.
하지만 문학회의 사명이 글 쓰는 것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셨던 선생님은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싶으면 야속하다 할만치 혹독하게 지적해주시군 했다. 내가 서탑에 있는 최정옥이라는 녀인을 취재하고 그 녀인의 립장에서 《삶의 뒤안길에서》라는 글을 써서 《료동문학》에 발표하였다. 그때 문체를 실화소설이라고 달았다. 그것을 본 선생님께서는 메일로 긴 글을 보내오셨다. 소설이면 소설이고 실화이면 실화지 실화소설이 뭔가고. 무엇에 근거하여 실화소설로 달았냐고 추궁을 하시였다. 편집선생님이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냐고 해서 생각없이 좋다고 했는데 선생님의 지적을 듣고 보니 생각이 많아졌다. 글이라는 것은 일단 신문이나 잡지에 발표하면 다시 되돌릴 수가 없다. 쏟아진 물과 같다. 그만큼 자기가 쓴 글에 대해 책임을 지고 생각을 깊게 하고 발표해야 함을 그때 심심히 느겼다.
이제 와서 조금이나마 위안을 받는 것은 선생님께서 내가 근무하는 학교로 찾아오셨던 일이다. 물론 나를 보러 일부러 찾아오신 것은 아니였다. 외손자 학부모회의에 참석하러 왔다가 나에게 전화를 주시였다. “예까지 왔다가 너를 찾지 않고 그냥 가기가 좀 그래서 전화했다.” 선생님한테 나는 영원한 제자였다. 그날 한 학교에 근무하는 로춘애 선생님과 함께 선생님을 모시고 학교 앞의 자그마한 식당을 찾았다. 선생님께서는 내가 돈을 쓰실가봐 로심초사하시였다. 그날 초라하게 대접했던 그 음식 앞에서 별로 드시지 않던 선생님의 모습이 눈앞에 선히 떠올라 가슴이 아파온다.
더러운 물보다 맑은 물을 고집하셨던 선생님, 둥근 것보다는 오히려 모난 돌이 되여 정직함을 사랑하셨던 선생님, 입보다는 눈으로 세상의 거짓을 정시하고 바른 길을 추구하셨던 선생님, 겉으로 보면 랭정한 듯하지만 누구보다 여린 마음과 사랑의 마음을 담고 계셨던 선생님, 우주를 담을 듯 깊은 그 눈은 삶의 진실을 통찰하려는 선생님의 예지의 로출이였으며 그것은 그대로 선생님의 소설로, 수필로 이어졌을 것이다.
지금도 문학회 행사에 가면 대나무처럼 꼿꼿한 선생님이 문을 열고 들오실 것만 같다. 세월 속에 영원할 사람은 없지만 선생님의 타계는 너무나 뜻밖이고 실감이 나지 않아서 오래동안 이것이 현실일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수년이라는 긴 세월을 건너 이제야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선생님, 저 세상에서는 선생님의 재능을 마음껏 펼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