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중년 일지
(연길) 구호준
섬을 찾아 캠핑을 떠난다.
아직 남은 젊은 날의 랑만 때문이 아니다. 내 랑만이란 것은 언제나 내가 아닌 타인들이 보고 왈가왈부 하는 것이니 나와는 늘 무관한 일이였다.
섬에서 캠핑하고 싶고 그러면 몸도 마음과 함께 즐거워진다. 산다는 즐거움보다 더 큰 축복은 없으리라.
집에서 두시간을 달려 연안려객터미널에 도착해 인터넷으로 예매한 표를 찾았다.
"중국 어디에서 오셨나요?"
매표원이 내 등록증을 보고 묻는다.
"지린에서 왔어요."
국제지명법에 따라 그 편한 길림성이란 말 대신 지린이라고 발음도 잘 안되는 한어를 더듬었다.
"길림 어디에서 사시니요? 저도 조선족이거든요."
매표원의 말에 순간 대답을 잃었다. 조선족이 려객터미널에서 근무 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연길에 있어요."
"저도 연길이예요. 얼마전에 다녀왔거든요."
"요즘 티켓 많이 비싸지요?".
"네. 140만원이였어요."
말 몇마디 하는 사이에 표가 나왔고 수고하라는 형식적인 인사만 하고 나는 그냥 밖으로 나와 배낭을 챙겼다.
배를 타고 다시 2시간, 늘 안개에 가려져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외연도에 도착하기 전에 나는 이미 나와 한 고향이란 분의 존재를 잊어버렸다.
살아오는 동안 잠간식 스쳐야 하는 인연까지 기억한다는 것은 내 작은 머리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을 중년이 아닌 혈기가 넘친다던 그 시절부터 터득한 나만의 비법 아닌 건방짐이였을까?
외연도에 도착하여 마을을 지나 둔덕 같은 작은 산 하나 넘으니 또 다른 바다가 다가 왔다.
텐트를 치고 몽돌이 파도를 타는 소리를 듣노라니 금방 내가 배를 타고 왔다는 사실조차 던져버린다.
몽돌과 파도와 갈대와 소리와 내가 어우러져 하나가 되여 버린 공간에서 나는 나라는 생각마저 지워버리고 눈 앞의 순간만을 즐기면서 시간을 보낸다.
텐트에서 손만 내밀어도 금방 잡힐 것 같은 몽돌이 구르는 소리와 밤 바람에 젖어가는 별들의 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밤도 그렇게 짧을 수 있음을 새삼 느꼈다.
어둠이 걷히고 날은 금방 밝았지만 짙어가는 안개 속에서 배낭을 다시 꾸몄다.
1박2일의 섬 캠핑을 끝내고 떠나지만 굳이 아쉬움은 없다. 외연도 그 큰 몽돌해변을 혼자 독점하고 하루를 보내면서 즐거웠고 그 즐거움이란 하루건 일년이건 모든 것이 한순간인데 꼭 아쉬움까지 만들어야 할 리유는 없었다.
배낭을 메고 다시 부두에 왔을 때 안개 때문에 오늘은 배가 뜨지 않는다고 한다. 래일도 날씨에 따라 결정된다고 하니 언제 집으로 돌아갈지는 미결이다.
1박2일을 예정하고 먹거리를 준비해서 왔던 길이지만 부족한 생수만 마트에서 보충하고 다시 산을 넘어 몽돌 캠핑장으로 간다.
-하루 더 캠핑하는 것은 신에게 뜻이 있어서리라.
수십키로 되는 배낭을 메고 다시 산을 넘으면서 자신에게 한 속삭임이다.
다시 텐트를 치고 커피 한잔 마시면서 오늘의 놀거리를 찾을 때 휴대폰이 울린다.
낯선 전화번호, 모르는 번호는 받지 않기로 악명이 높은데 한참을 번호를 보다가 혹시 선사에서 걸려온 전화나 해서 폰을 받는다.
역시 짐작대로다.
연안려객터미널에 어제 표를 파신 분이라고 했다. 오늘 떠나지 못한 표는 취소하고 래일 다시 사야 한다면서 자신이 해줄 거라고 자세히 설명해준다. 표는 인터넷으로 취소해도 되는데 전화까지 하면서 배려해주는 그 마음이 고마웠다.
전화를 끊고 다시 생각해보니 혹시 나를 아는 분인데 내가 알아보지 못해 실수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마음에 그늘 한점 떠간다.
연길에 있을 때 행사에서 잠깐씩 만난 어르신들도 기억하지 못하는 건방지기로 한심한 놈이였다.
이젠 그 그늘을 벗어난 줄로 알았는데...
쉰을 넘어 중년이 되여서도 똑 같은 실수만 할 수는 없다.
금방 받은 전화로 문자를 넣었다.
고향이 화룡이고 화룡문화관에서 근무하고 연변인민방송국에 전근하고 내 인적사항 횡설수설 했다.
조금 지나 답장이 왔다. 그런데 갈수록 태산이다. 고향이 화룡이라면 그분 연길에 있다니 금방 도망할 수 있었는데 자신도 화룡이라고 한다.
등록증 보고 나와 동갑이니 혹시나 아는 분인가 해서 물었다면서 자신을 소개했다.
덤으로 얻은 하루 섬 캠핑, 새로운 즐거움에 젖어야 할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한다.
문자를 주고 받으면서 내가 알고 있던 사람이라고 머리가 말해주는데 아무리 쥐어짜도 상대가 누구였는지 녹쓴 기억에서 찾을 수가 없다.
화룡을 떠난지도 20년 넘었고 고향에 있을 때 나를 기억할 만 녀자가 있었다면 시정부에 근무하는 사람 두엇 정도가 내 기억에 있는 전부였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지 못해도 상대가 나를 기억에서 꺼냈다면 중년의 건방짐의 시작이 될 것이다. 되지도 않는 기억이란 것을 억지로 뒤지다가 마지막 방수진을 쳤다.
나를 아시는 분 같은데 캠핑하느라 억망이여서 다음날 시간 괜찮을 때 련락 주면 찾아뵙고 식사나 하자고 했다. 그러자 상대에서 동갑이니 혹시 한 학교 다닌 동창이 아닌가 해서 물었던 것이라고 한다. 동창 아니고 나를 기억하는 사람도 아니니 일단은 인사하고 마무리했다.
대화는 마무리 했지만 외연도 노을을 찾아 산으로 오르는 동안도 그 대화의 연장선이 이어진다. 살면서 때론 내가 기억하지 못한 이에게는 건방진 사람으로 되었을 수도 있지만 그건 어쩌면 나만의 소탈함과 털털함은 아니였을가? 나를 안다고 굳이 내가 상대까지 일일이 다 기억해야 할 리유는 없을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사람들도 꼭 나를 기억할 리유가 없듯이. 상대를 알아보지 못한 것, 삶에 그보다 더 작고 사소한 일은 없는데 나는 언제부터 거기에 집착하고 있었을까?
산 정상에서 안개에 가려진 저 바다 너머의 노을을 만들다가 다시 나만의 공간을 찾아 오면서 나는 마침내 내 중년의 노트에 일지를 한줄 긁적거린다.
소심하다는 것은 나이가 들었다는 의미고 나이가 들었다는 것은 소심해진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뒤에 부록도 잊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것이 사소하다. 실수도 즐거움도 소심함도 나이도 사소한 것일 뿐이요 그 모든 사소함을 즐기는 것, 그게 중년일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