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날개
(대련) 리향옥
휴계실은 무거운 적막에 휩싸였다. 째깍째깍 시계소리는 마음을 어지럽히기에 충분했다. 자유로이 드나들던 빌딩문이 잠기자 순식간에 봉페된 공간에 갇혀져 버렸다. 저녁식사 시간이 퍼그나 지나갔지만 마스크를 벗지 말라는 지시에 배고픔을 참았다. 18시반에 핵산검사를 마치고 우리는 심판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회사에 대기하고 있었다. 날개라도 돋쳐 당장 포근한 보금자리로 날아가고 싶었다.
잔업으로 분망한 직원들, 핸드폰을 뚜지는 직원들,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직원들을 피해 나는 휴계실의 긴 의자에 누웠다. 하루 동안 혹사한 어깨와 허리가 아우성을 치는 것 같아 아예 휴식모드를 취했다. 허리병이 도져 10분도 앉아 있을 수 없어 물리치료를 받으며 꼬박 두주일 동안 침대신세를 지고 복귀한 첫날이였다. 한치 코 앞의 일도 모르는게 세상사였다. 하필 그날 웃층 직원 한명이 바이러스 양성이라는 판정이 났고 오후 세시 쯤에 빌딩은 문을 닫았다. 전원 핵산검사를 진행하고 결과에 따라 집에 돌아갈 수 있을지 미결이였다. 침침한 공기 속에서 시간은 일분일초 느리게 흘렀다. 직원들 사이에서 혹시 집중격리를 할 가능성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집에는 부모와 아이들이 있는데 집중격리를 할 경우의 가족들을 고려하면 착잡하기만 했다.
빌딩에서 N95급 마스크를 한사람당 한개씩 무료로 발급했다. 텅 빈 배 속은 마스크보다 밥이 더 필요했다. 하지만 만일 양성자가 나올 가능성을 대비해 마스크를 벗지 말고 안전을 지켜야 했다. 이튿날 빌딩은 통째로 페관하고 전반 소독을 한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사무실에 자료가 많으니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쓰레기 회수를 목적으로 대량 주문한 봉지가 한몫을 막았다. 책상 밑에 있는 자료를 우에 올려 놓고 시커먼 봉지를 씌웠다.
밤은 하염없이 깊어갔다. 그날이 거의 지나갈 무렵, 눈이 빠지게 기다리던 방송이 울려퍼졌다. 검사결과 전원 음성이여서 집에 돌아가도 된다는 통지였다. 자유를 허락받은 직원들의 흥분으로 열기를 띄였다. 자정이 넘은 해변도시는 한산했다. 가로등은 외롭게 졸고 있고 인적이 드물었다. 창문을 열자 습한 자유의 공기가 페부 속으로 깊게 다가왔다. 집에 들어서니 살 것 같았다. 엄마와 남편의 걱정어린 얼굴이 보였고 달게 자고 있는 애들을 보니 안심이 되였다.
이튿날 재택근무로 분망한 하루가 지났다.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어 갈 무렵, 빌딩에서 새로운 통지를 받았다. 빌딩은 일주일 페관할 예정이고 어제 출근했던 직원은 해당 가도의 지시에 따라 외출을 금지하고 집에서 자가격리모드에 들어가야 했다. 20시가 넘어가는 시각에 가도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빌딩에 출근하던 천여명 직원정보가 각 주택구역 가도에 날아왔고 한밤중에 비상에 걸렸다. 22시 쯤에 하얀 방호복 차림인 젊은 남자와 녀자가 다녀와 온 집식구 핵산검사를 진행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주택구역이라 방역사는 한보한보 계단을 오르내리느라 수고가 많았다. 그날부터 일주일간 격리가 시작됐다.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격리생활이였다.
일년전 11월초, 주택구역 부근에 양성 확진자가 나오는 바람에 한달 동안 구역 전체가 봉쇄된 적이 있었다. 그날도 늦게까지 야근했다. 차량이 드나들던 대문은 이미 굳게 닫겨있고 한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문만 열려졌다. 곳곳에 방호복이 보였고 상점은 간만에 재고처리를 한듯 싶었다. 계란은 한알도 남지 않았고 조미료통은 깔끔하게 비여졌다. 트럭을 몰고 들어와 주택 안에서 팔던 사과 장사는 길옆에 외롭게 서있었다. 밤에는 트럭에서 잠을 잔다고 했다. 들 수 있을만큼 사과 한봉지를 구매했다. 방역사는 빨리 집에 돌아가라고 독촉했다. 아마도 한달정도 봉쇄가 될 것이라고 했다.
아빠트는 구역별로 자물쇠를 잠그고 통일구역은 커다란 양철로 둘러가며 쥐도 새여가지 못하게 꽁꽁 막혀졌다. 대문이 굳게 닫기고 기나긴 재택근무와 가족들과의 24시간 공동생활이 시작되였다. 숨막히는 제한된 공간에서 미래에 대한 불안에 떨었다. 량식이 떨어지면 구할 수 있을지, 부모와 애들이 아프면 병원에는 갈 수 있을지, 자택근무로 회사일은 문제없이 진행할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애들은 매일 계란을 먹어야 하니 어른은 아까워서 먹을 엄두를 못했고 몇알이 남았나 헤여갔다. 그렇게 흔하던 빵을 구할 수가 없었고 지어 커피나 라면마저 사치로 되여버렸다. 돼지고기를 작게 토막내여 조금씩 넣어 볶고 감자 한알, 푸른 야채 한줄기도 아껴가며 이제 며칠동안 먹을 수 있나 계산했다. 다행히 가도에서 준비한 구매앱이 나오며 계란과 채소를 세트로 주문할 수 있었다. 자원봉사자가 집 부근까지 배달한 푸르싱싱한 야채와 계란을 받고 나니 뒤심이 든든해졌다. 랑비가 심했던 우리 생활에는 음식을 아껴먹는 바람이 불었다.
영업부에 출근하는 남편의 핸드폰은 줄기차게 울렸고 부산했다. 7학년생 딸애는 교복을 입고 머리를 대충 매고 온라인 수업에 참가했다. 유치원생인 아들애는 깡충깡충 뛰여다니며 장난을 쓰느라 여념이 없었다. 방마다 인터넷에 련결되여 일하고 공부하는지라 인터넷 속도에 영향을 주었다. 재택근무는 상상과 훨씬 많이 달랐다. 잠옷바람에 노트북을 켜고 하루 일과가 시작됐다. 메일을 체크하고 전자파일로 업무를 확인했다. 회사에서 프린트한 재료와 전자파일을 함께 확인하던데로부터 모든 업무를 전자파일로 보는지라 눈이 아물거렸다. 심심할 때마다 뛰여들어오는 아들애의 시찰에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음성회의를 진행할 때마다 방안으로 잠그면 아들애는 문을 두드리며 울었다.
점심 휴식시간, 베란다에 서서 창문을 활짝 열고 멀리 바라보았다. 구름 한점 없이 맑은 하늘을 보니 가슴이 뚫리는 것 같았다. 비둘기가 줄을 지어 훨훨 날아갔다. 하얀 비둘기와 파란 하늘의 조합은 한폭의 그림이였다. 비둘기의 날개가 그리웠다. 나도 날개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가 하는 부질없는 상상을 해보았다. 한순간에 중지버턴이 눌리워진 우리는 자유를 잃고나니 그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전염성이 강한 바이러스가 터지고 려행은 이미 사치품이 되여버렸다. 지어 고향에도 마음대로 다녀갈 수가 없었다. 매년마다 솔로 려행으로 일년동안 쌓인 마음의 쓰레기를 정화하고 새로운 기운을 받았다. 물론 가족과의 려행시간도 가졌지만 며칠만이라도 나만의 독립된 시간을 갖고 싶었다. 낯선 도시와 자연이 하사한 매력적인 풍경을 보며 차곡차곡 행복을 쌓았다. 관광을 거치며 가족이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아무리 찬란해도 가족과 직장이 있는 도시의 매력을 느꼈고 활기찬 자신을 되찾았다. 아직도 가고 싶은 곳이 많지만 바이러스 앞에서 아득하기만 했다. 날개만 있으면 원하는 곳을 마음대로 다닐 수 있을가 싶다.
비가 뿌리던 눈이 날리던 핵산검사는 거의 하루 건너 진행됐다. 기온이 령하를 범하는 나날들, 방호복 한장으로 막은 방역사의 고난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이 고되보였다. 진눈깨비가 내리던 그날 밤, 림시로 이동된 버스 문 앞에 쭈크리고 앉아 면봉을 하나하나 뜯어가며 검사를 진행하는 모습을 보니 안쓰러웠다. 자원봉사자는 우산을 쓸 겨를도 없이 찬비를 맞으며 줄을 선 시민의 한미터 거리를 유지하느라 뛰여다녔다. 땅거미가 어둑해진 얼어든 공기 속에 핸드폰으로 건강코드도 제대로 찍혀지지 않았다. 해변도시의 겨울은 칼바람이 휘몰아쳐 으스스 떨렸다. 자유를 잃은 생활은 답답하고 불편해도 그나마 안전을 확보할 수 있었다. 방호복 천사는 위험과 추위를 무릅쓰고 임무를 완수하느라 몸과 마음이 혹사됐을 것이다. 초조한 격리생활에 거의 미쳐갈 무렵, 봉쇄구역 전체가 풀렸다. 12월초, 겨울 밤은 흥분된 시민의 폭죽소리에 들떠있어 마치 새해를 맞는 기분이였다. 자유의 몸을 도로 찾고 석달 동안 별탈없이 지냈다.
재택근무로 다망한 일주일은 느리게 지났다. 1일, 3일, 7일째로 세번 핵산검사를 거쳐 갑갑한 격리생활을 마쳤다. 문에 붙혀있던 센서를 떼내고 나니 인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는 충동을 감추지 못했다. 3월말의 초봄은 꽃봉오리로 꿈틀거리며 오색찬란하게 단장했다. 그렇게 질리던 출근길이 신나기만 했다. 려행객으로 붐비였던 기차역은 바이러스가 터지며 조용해졌다. 비여있는 가게를 보며 번영하던 옛시절이 그리웠다. 바이러스가 가까이에 다가오며 우리는 예상외의 많고 많은 이야기를 담아냈다.
5월부터 매주 한번씩 전시 핵산검사를 진행한다는 뉴스가 떴다. 주기적으로 확인하고 양성자가 나오면 일주일내에 공제하는게 목표였다. 2년전의 두세시간 줄을 서며 받던 검사시간은 제법 경험이 생겨 30분내에 완수할 수 있었다. 바이러스와 공존 속에서 우리는 대응방법을 터득했다. 줄을 서야 할 타이밍을 맞춰 시간을 절약했다. 방역사는 일회용 종이고뿌 밑을 도려내고 가운데 공간을 리용하여 해빛반사를 피해 제법 익숙하게 건강코드를 찍었고 자연스럽게 면봉으로 검사를 진행했다.
일층 주민이 키운 비둘기는 매일마다 푸른 하늘을 열심히 날았지만 식사시간이나 잠을 잘때면 어김없이 돌아왔다. 날개가 있으면 자유로울 것 같았지만 비둘기만의 룰이 있는듯 싶었다. 려행은 가까운 곳에도 충분히 존재했다. 가끔 바다가를 거닐고 공원을 산보하고 찜질방에서 땀을 빼며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집 앞에 화사하게 피여난 라일락 향기에 취해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힘껏 들숨을 쉬니 가슴 한가득 향기로 피여올랐다. 부드러운 봄바람은 마음의 날개를 펼쳐 멀리로 훨훨 날아갔다. 바이러스와의 공존 속에 언젠간 적합한 교제점이 나오고 또다시 자유분방한 그날이 올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3년이 지난 오늘 나는 마스크를 벗었다. 려행도 다니고 간만에 고향에 다녀왔다. 인젠 날개가 없어도 자유롭게 다닐 수 있지만 그때 그 시절은 아마도 기억 속에 깊이 남아 은은한 향기로 남아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