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친구야!
发布时间:22-11-04 08:45  发布人:金昌永    关键词:   

수필

친구야!

   (심양) 박선태

   

   “친구야!”, 참으로 귀맛이 좋은 말이다. “선생”이라는 말을 들으며 수십년간 교단을 오르내렸지만 “친구”라는 말보다 귀맛이 당겨지지는 않는다. 어원을 따져보니 친구에서 “친”자는 섰다는 “립”자 밑에 나무 “목”자였고 그 옆에는 볼 “견”이 붙어있는데 뜻인즉 “나무처럼 많은 자식들을 보살핀다”는 말로 되여있다. 우리가 흔히 아버지를 “가친”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뜻 때문이리다. “구”자는 풀밭에서 부엉새 “추”가 절구 “구”우에 올라있는 모습인데 뜻인즉 “수리부엉이가 절구우에 앉았다”는 말로 되나 다만 “구”자는 이러한 풀이와는 관계없이  오랠 “구”자와 음이 같다는 리유로 “오래되다”라는 뜻으로 가차된 문자다. 그러고보니 부모들처럼, 오래동안 오로지 서로를 위하여 보듬고 보살필 수 있는 사이라야만 “친구”의 호칭에 걸맞는다고 할 수 있지 않을가?  

   “친구야!”, 참으로 정감이 통하는 말이다. 호형호제하면서 반평생을 넘겨왔지만 “친구”라는 말보다 정이 붙지는 않는다. “친구”에 대한 전설들을 따져보니 거개가 송가였고 미담이였다. 전국시기, 제나라에서 일인지하인 재상 포숙아는 자기의 자리를 친구인 관중에게 양도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국왕에게 추천하였다는 “지성”의 이야기가 있고, 거문고로 산조가락만 연주하여도 악사인 유백아가 무엇을 생각하는지를 친구인 종자기는 알 수 있었다는 “지음”이야기도 있다. 이 모두가 수천년이 지나도록 “지기”의 화신으로 되여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주었고 사람들의 입에서 절차탁마되면서 력사의 한페지를 장식해오지 않았던가! 재상자리에 오르면서 “나를 낳은 이는 부모이지만 나를 아는 이는 포숙아뿐이노라!”며 감개무량해 하는 관중의 비장한 모습이라든가, 종자기가 죽자 “지음이 없는데 거문고를 타서 무엇하랴!”며 거문고를 내동댕이치는 유백아의 분노로 치를 떠는 모습이 눈앞에서 보는 듯이 얼른거린다.

   하긴 지금의 실생활에서 어원의 말처럼 경중하면서도 성스러운 “친구”가 얼마나 있으며 실화에서나 볼 듯한 “관포지교”나 “지음” 같은 감동적이면서도 거창한 “친구”가 또 얼마나 있으랴. 오죽하면 송조의 시인 안수가 한을 남기면서 “지음이 어디에 있는지 찾을길 없어 가슴엔 늘 한만 맺히누나.”라고 한탄을 금하지 못했고 중국현대문학의 정초자인 로신선생까지도 구추백에게 서한을 보내면서 “한평생 지기가 한사람으로도 족하니라.”고 하였으랴. 그러니 “지기”같은 친구를 만나기는 하늘에 별따기나 다름없지 않을가?   

   “친구야!”, 참으로 가슴에 와닿는 말이다. 나는 어쩐지 친구가 너무 좋다! 리유여하를 떠나 덮어놓고 열넉냥이다. 지기같은 친구면 어떻고, 설면설면 지내던 친구면 어떠랴. 설면설면하다가 손을 꼭 잡게 되는게 부지기수 아니더냐! 구면의 친구도 친구요, 초면의 친구도 친구이다. 한번 보면 초면이요 두번 보면 구면이라 구면이면 구면지기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성이라고 친구가 못된다는 법이 있더냐? 고루하고 케케묵은 시기에는 “남녀칠세부동석”이라고 했지만 지금은 온 나라가 똘똘 뭉치는 시기라 사람들은 “남녀가 어울리면 아무리 일을 하여도 힘든 줄 모른다.”는 말을 입에 자주 올리고 있지 않는가? 부모님의 은공은 하늘같다고 하지만 부모에겐 할말이 있고 못할 말이 있는 법이고 아무리 친척들의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지만 형제들이라도 례외는 못된다. 아니해야 할 말을 함부로 옮겨놓고는 경을 치르게 되고 아니해야 할 일을 저질러놓고는 큰 코 다치는 일이 비일비재가 아니더냐! 그러나 친구이라면 경우가 달라진다. 그들이라면 못하는 소리가 없고 못하는 노릇이 없다. 말이라면 천냥 빚을 갚았고 하늘의 별도 따줄 수 있는 게 친구이고 거지라면 태산도 옮겨놓는 무소불위의 힘을 떨칠 수 있는 게 친구이다. 때로는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들 하지만 덩달아 하는 일도 덮어놓고 나쁘다고 할 순 없다. 첫술에 배부를리 없듯이 처음엔 보고 배우며 익혀야 다음엔 발견할 수 있고 발명이 뒤따르게 되면서 창업으로 이어지고 종당에는 달인으로, 대가로, 총수로 등극하지 않겠는가! 발명의 대가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도 그랬고 아이폰, 아이패드로 IT업계에 새로운 혁신을 불러온 스티브 잡스도 그랬다. 그러니 부지런히 친구를 사귀여야겠다. “친구가 한사람 더 늘어나면 살길이 하나 더 생기게 되나 적이 한사람 더 늘어나면 장벽이 하나 더 생긴다”는 말도 있다.  

   “친구야!”, 참으로 그예 부르고 불리우고 싶은 말이다. 그것은 나뿐만이 아니라 하많은 사람들의 공통으로 되는 심정일 것이다. 그대는 호칭에 대하여 고민해보았는가? 만약 책가방을 메고 학교로 가는 학생들이며, 손가방을 들고 직장으로 가는 공직자들이며, 작업복을 입고 현장으로 가는 로동자들이며, 장바구니 끌차를 끌고 장보러 가는 늙은이들이 한길에서 붐빈다고 하자. 이때 그 누가 큰 소리로 “녀사님!”, 또는 “선생님!”이라고 불렀다면 뒤돌아보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가? 그러나 나는 확신한다. “녀사님”이요, “선생님”보다 “친구야-”를 불렀다면 젊은이는 물론이고 장년 지어 로인들까지 발길을 멈추고 고개를 돌릴 것이며 더욱 희한한 것은 비록 자기가 불리운 대상이 아니라 할지라도 당황함보다는 편안함이, 섭섭함보다는 자상함이 그들 모두의 얼굴에 묻어나있게 될 것이다!

   사실 우리는 “친구”라는 단어를 람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흔히 많은 시간을 좋아하는 사람 혹은 정이 통하는 사람과 보낸다지만 그 사람들이 꼭 나의 친구라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좋아하지 않으면 정감의 교류가 불가능하겠고 우정의 교류가 없이는 서로가 등을 돌려야 하는게 인간상정이다. 그러니 “친구”가 되기에 앞서 우선 갖추어야 할 것은 서로를 좋아하는 몸가짐이요, 서로 껴안을 수 있는 정감의 소양일 것이다.

친구가 있으면 손벽도 마주쳐 소리를 낼 수 있고 종이장도 더욱 가볍게 들 수 있지 않는가! 반면에 친구가 적을수록 당신은 역경과 고난을 딛고 일어서기가 더욱 힘들어질 것이 강건너 불보기이다.

 나는 오늘도 친구가 그리워진다. 이 친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가? 저 친구는? 홀제 위챗의 메세지소리가 울려온다.

“친구야, 잠간 나와서 가볍게 술이나 한잔 하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