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학동네에 은은히 울려퍼지는 워낭소리
发布时间:22-10-25 10:12  发布人:金昌永    关键词:   

우리 문학동네에 은은히 울려퍼지는 워낭소리

-80대 한 로옹의 문학 사랑은 오늘도 진행형이다

            림금산

료녕의 조선족문학동네에는 여든을 넘긴 오늘날까지도 묵묵히 그리고 끈질지게 문학농사를 짓는 ‘실농군’이 있다. 분명 이 동네 원로의 한사람으로서 ‘꼰대’로 자처한들 누가 탓하랴만 그는 언제 어디서나 항상 설교 대신 경청 모드를 취하고 있다. 말하자면 육성으로가 아닌 글로 말하는 ‘글쟁이’에 다름 아니다. 이쯤하면 이 동네사람이라면 ‘그’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짐작했을 것이다. 그렇다, 바로 동네사람들이 푸근한 ‘옆집 아저씨’, ‘옆집 할아버지’ 쯤으로 여기는 그분, 이 글의 주인공 박병대 로옹이다.

우리 주인공은 워낙 과묵하고 항상 저자세여서 료녕조선족문학동네에서는 1세대의 대선배이고 문학창작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룩한 선구자의 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학 사랑은 료녕의 조선족문단에서조차 별로 회자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 문학동네에서 제법 긴 세월 함께 해온 후배로서의 필자가 이 글을 쓰게 된 리유이기도 하다.

우리 주인공은 한국 경상북도 안동군에서 갓 결혼한 부모님이 징병, 징용을 피해 연고도 없이 흑룡강성 극산현에 이르러 이사짐을 풀고 중국인 지주의 버려진 습지를 개간하여 벼농사를 짓기 시작한 지 이듬해인 1942년 1월에 7남매의 맏이로 태여났다. 몇년후 광복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빈주먹 뿐이라 떠날 엄두도 못내였다. 수확철을 기다려 벼를 팔아 차비를 마련한 그들은 가장집물을 버리고 무작정 마을을 떠나 극산역을 찾았지만 돌아온 것은 차길이 막혔다는 싸늘한 대답 뿐이였다. 다시 살던 곳으로 되돌아왔지만 당시는 정국이 어지러운 때이라 토비무리들이 시도때도 없이 출몰하여 략탈을 일삼는 탓에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정처없이 가다 쉬다를 반복하며 그들이 이른 곳은 할빈 교구의 취원창이란 마을이였다. 이곳에 정착하여 한해 농사를 짓고 나서 1947년초에 민주련군이 이 마을에 입주하게 되였는데 조만간 이곳은 국민당군대와의 전쟁터가 될 것이므로 안전한 지대로 보내주겠으니 이사짐을 챙기라고 하였다. 그 길로 민주련군이 마련해준 마차에 이사짐을 싣고 달리고 달려 나흘 만에 이른 곳은 해방구인 위하현성이였다. 이곳에서 원래 군영으로 쓰던 방에 칸막이를 하여 여러 집이 들게 되였고 한달 쯤 지나 토지개혁을 맞게 되였다. 토지개혁공작대에서는 위하현성 북쪽에 위치한 천여무 토지를 조선족들에게 분배하기로 하고 공작대를 도와 토지개혁을 진행할 간부를 선출하였는데 그의 아버지가 농민대표로 당선되였다. 박대표는 그곳에 모여든 조선족농호들을 인솔하여 농토 근처에 터를 잡고 초가집을 대충 지어 마을부터 세운 후 상급의 동의를 거쳐 마을 이름을 신승촌으로 명명하고 박대표는 초대 촌장으로 추대되였다. 이어 1949년 봄 제대군인 허근이란 간부가 이 마을에 ‘위하진신승조선인학교’를 세웠다.

우리 주인공의 학창생활은 이렇게 아버지가 일떠세운 마을에서 시작되였다. 일찍 시 쓰기와 서예에 조예가 있었던 외조부의 피를 물려받아서였던지 그는 책읽기를 무척 즐겨했고 소학교 4학년때부터 연변에서 출판하는 《소년아동》 잡지를 주문해보았는데 잡지에 실린 동화와 동시는 그의 어린 심령에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리고 그 감동을 주체할 수 없어 직접 동시를 지어 편집부에 보냈다. 물론 채용은 되지 못했지만 그때 받았던 편집선생님의 격려 편지가 후날 그가 문학을 사랑하게 된 계기가 되였는지도 모른다.

소학교를 졸업하고 상지현조선족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담임선생님은 그에게 학습위원 겸 조선어과 과대표를 맡겨주었다. 공부에 별로 부담감이 없었던 그는 이 시기에 조선의 작가, 시인들의 작품을 탐독하였고 조선과 중국의 고전작품을 섭렵하였다. 그리고 학교에서 조직한 문학써클활동에서 앞장에 섰다.

1958년 초중을 졸업할 때 그는 다른 한 학생과 함께 학교의 추천을 받아 당시 상지현제1중학교인 일면파고중에 면시로 진학하였다. 지금까지 조선족동네에서 살았고 조선족학교를 다니면서 소학교 5학년이 되여서야 한어문을 배우기 시작한 그가 일약 한족고중을 다니자니 우선 문자부터가 큰 난관이였다. 그래서 그가 택한 것은 중문으로 된 《림해설원》, 《청춘의 노래》 등 장편소설을 사서 읽는 방법이였다.

이 시기에 어머니가 중환으로 앓게 되여 아버지는 수토를 바꾸면 치유될가 싶어 당신이 몸소 세운 신승촌을 떠나 할빈 교구의 한 한족동네에서 논물을 봐주었는데 그해 홍수로 페농하게 되자 다시 할빈을 떠나 아성현의 사리툰이라는 작은 역전마을로 자리를 옮겼다. 따라서 우리 주인공도 아성1중으로 전학하였다. 학교에서는 학기마다 학년별로 수학경연을 가졌는데 워낙 수학에서 뛰여난 재능을 보였던 그는 련속 3학기 학년에서 1등을 차지하였다. 그때부터 그는 동창들 속에서 ‘수학박사’로 불리웠다. 이에 눈이 잔뜩 높아진 그는 대학에 가려면 북경대학이나 청화대학에 가야 한다며 전 성적으로 이름난 몇몇 학교를 찾아 전학할 의향을 밝혔으나 모두 정원이 찼다는 리유로 거절하였다. 다시 본교로 돌아가자니 면목이 없어 결국 수화조선족중학교로 전학하게 되였고 이 학교에서 1961년 7월에 고중을 졸업하게 되였다.

고중을 졸업하고 집에 돌아와서야 그는 명문대학을 가겠다고 이 학교 저 학교를 전전했던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이였는가를 실감하게 되였다. 당시 동네사람들은 자연재해와 인재로 극심한 기아에 허덕이고 있었다. 당장에 먹고 사는 것이 문제였다. 그때 그네 집은 7남매에 부모 아홉식구였는데 어머니는 장기 병환으로 로동력을 잃었고 아버지 혼자 가족을 먹여살려야 하는 형편이였다. 그 와중에 지인을 통해 오상현의 금성촌이란 데는 그래도 밥은 굶지 않고 산다는 말을 듣고 연줄을 달아 그 동네로 이사짐을 옮겼다. 그런데 ‘재수없는 놈은 자빠져도 코를 깬다’고 했던가. 원래 금성촌에서는 가을에 ‘꼼수’를 써서 량식을 숨겨두었다가 어려울 때 촌민들에게 나눠주어 배는 곯지 않게 해왔는데 그 일이 들통나 얼마 전 숨겨둔 량식을 몽땅 몰수당하는 바람에 여기서도 배를 곯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다시 이사짐을 쌀 수도 없는 형편이라 그 해는 집도 없이 생산대 대부에서 살게 되였다. 그때 대부의 방 천정에는 집체식당할 때 쑤어둔 메주덩이가 대롱대롱 걸려 있었는데 며칠이 지나자 메주덩이가 하나 둘 얼금뱅이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굶주림을 참다못한 어린 동생들이 메주덩이에 박힌 콩알을 후벼내여 ‘포식’을 해버린 것이였다. 그때 어머니께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모습은 지금도 눈 앞에 삼삼하다고 주인공은 말한다.

눈 앞의 현실은 우리 주인공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그는 주저없이 대학 진학의 꿈을 접고 귀향하였다. ‘수학박사’로 불리우던 우등생이 대학꿈을 접어야 할 때 어찌 아쉬움이 없었겠냐만 우선 가족을 먹여살려야만 하는 절실함 앞에서 아쉬운 마음을 갖는 것조차 사치였다. 그리고 은연중에 문학공부를 하는 데는 꼭 대학에 가야 한다는 법도 없지 않느냐는 일념으로 아쉬움을 달래였다.

금성촌에서 농사에 첫발을 디딘 그는 고졸자여서 ‘지식인’으로 받들려 생산대 회계를 맡았고 농사일을 배우는 한편 문학을 좋아하는 동네 친구들과 문학동아리를 무어 각자 글을 써서 교류하였다. 그 때는 조선문 잡지사와는 련계가 없어 한문으로 시를 써서 중문 잡지에 투고도 해보았지만 한강에 돌 던진 격이였다.

1963년, 그네들이 살던 지역에 도열병이 돌아 그 해 농사는 완전 망하였다. 도열병은 한번 생기면 몇년간 반복된다는 소문에 마을사람들은 한집 두집 이사를 떠났다. 우리 주인공네도 인맥을 통해 새로운 삶터를 찾아 떠나게 되였는데 그 때 자리를 잡은 것이 바로 료녕성 개원현의 화순툰이라는 한족동네였다. 여기서 우리 주인공은 생산대에서 막로동을 하고 아버지는 논물관리원으로 있었다. 당시 우리 주인공의 두 동생이 외지에서 중학교에 다녔는데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우리 주인공은 낮에는 생산대에서 일하고 밤에는 집에서 가마니를 짰다. 고달픈 하루하루의 련속이였지만 그 와중에도 령감이 떠오르면 그것을 시로 적어두기를 잊지 않았다. 그 때 우리 주인공이 중문으로 썼던 시 한수를 옮겨본다.

가마니를 짜면서

 

직녀가 노을을 짜는 그림과 마주하고

방안의 새각시 가마니 짜기 바쁘네.

금산 은산 이루 다 담을 수 없어

밤이 늦도록 신선과 솜씨를 겨루네.

 

이렇게 우리 주인공은 언제 어디서든 시상이 떠오르면 종이쪽지에 대충 적어두었다가 짬이 나면 다시 윤색해서 수첩에 옮겨적군 하였는데 이 습관이 후날 그의 문학창작에 큰 도움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화순툰이라는 한족동네에서도 우리 주인공은 생산대 회계를 맡고 아버지는 논물관리원을 맡아 동네에서 평판이 좋았지만 학교에 다니는 어린 동생들을 위하여 우리 주인공은 아버지에게 청을 들어 조선족학교가 있는 북화루조선족동네로 이사하게 되였다. 한족동네에서 조선족동네로 오니 성수가 났다. 조선족동네에서 논일에는 5인 1조로 하는 가래질이 빠질 수 없는데 그 때마다 박씨 부자는 ‘스타’가 되였다. 중장년들은 아빠 박씨와 한조가 되려고, 청년들은 아들 박씨와 한조가 되려고 ‘쟁탈전’을 벌였다. 가래질이란 5인이 한조가 되여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느긋하게 하는 일이였는데 박씨 부자는 견문이 넓고 입담이 좋아 당연 인기 만점이였다. 후에는 가래질이 아니더라도 일하다 쉬는 참이면 일군들은 자연스럽게 중년패, 청년패로 나뉘여 박씨 부자 곁에 모여들었다. 이 시기에 우리 주인공은 예전에 읽었던 중국과 조선의 고전작품들을 기억 속에서 다시 소환하여 나름대로 재창작을 거친 후 청중들에게 들려주었다. 이렇게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논두렁이야기군으로 변신하였다.

1970년에 북화루조선족동네에 팔보조선족중학교가 세워지고 1972년 초에 이 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면서 우리 주인공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였다. 교사로서도 우리 주인공은 뚜렷한 족적을 남겼는바 본문에서는 간략하게 추려서 소개하고자 한다.

처음 교단에 오를 때 그는 력사 교수를 맡았는데 교과서가 없어 자체로 교안을 짜서 수업에 들어가야 했고 후에는 6학년의 수학과 7학년의 조선어문 교수를 동시에 맡기도 했고 때로는 수학과 물리 교수를 동시에 맡기도 하였다. 고졸 학력의 민영교사로서의 그는 재충전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1977년 시험을 쳐서 철령사범전문학교 함수생으로 입학하였고 졸업을 1년 앞두고 다시 연변대학으로 전학하여 함수생으로 수학 본과를 마쳤다. 그 사이 1978년에 개원현에서는 시험을 거쳐 민영교사를 정식교사로 채용하였는데 기타 민족과 동일한 시험지로 시험을 본 우리 주인공은 수학시험에서 2등을 37점 차이로 따돌리고 당당히 1등을 하여 전 현 교육계를 경악케 하였고 그는 당연히 정식교사로 채용되였다.

1982년, 팔보조선족중학교가 개원조선족중학교로 합병되면서 그는 개원조선족중학교로 자리를 옮겼고 1984년부터 줄곧 고중졸업반의 수학교수를 맡게 되였는데 1986년 대학입시에서 21명이 대학에 진학하여 학교의 력사기록을 갱신하였고 1987년에는 이 학교에서 전 성 조선족수학장원을 배출해 조선족사회를 놀래웠다.

1996년, 개원시조선족중학교 고중부가 새로 세워진 철령시조선족고중으로 합병되면서 우리 주인공은 철령시조선족고중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이 학교에서도 계속하여 고중졸업반 수학교수를 맡는 한편 중국수학올림픽 2급 코치의 자격으로 수학올리픽 참가학생들을 지도하였고 철령시교육국에서 선정한 유일한 ‘고중수학선줄군’으로서 맡은 바 교수에 전력을 다하였다. 그리고 2002년 정년퇴직 후에도 학교의 수요에 따라 1년간 연장근무를 하였고 이어서 대련시조선족학교에 특별 초빙되여 2년 간 더 근무하고 나서야 교단과 작별하였다. 꼬박 20년 간 고중졸업반 수학교수를 맡았던 것이다.

우리 주인공의 본격적인 문학창작은 교단에 오르면서부터 시작되였다. 한때 조선어문과 교수를 맡아서 학생들의 글짓기를 지도하게 되면서 마음 한구석에 잠들어있던 창작욕이 되살아났던 것이다. 내킨 김에  <논물관리원>이란 시를 써서 무작정 연변인민출판사로 보냈는데 그 시가 1973년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 시집 《태양의 별빛아래》에 수록되였다. 드디여 우리 주인공의 처녀작이 볕을 보는 순간이였다. 시집이 우편을 통해 학교에 전달되였을 때 학교에서는 시집을 현관에 버젓이 전시해 놓고 전교 사생들에게 관람시키는 등 완전히 축제분위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1970년대 초만 해도 료녕의 조선족문단은 거의 맹아상태였다.

처녀작 발표에 한껏 고무된 우리 주인공은 내처 여러 수의 시를 써서 연변인민출판사에 보냈는데 편집부에서는 연변에 아직 성인 문학잡지는 없고 유일하게 《홍소병(원 소년아동)》잡지가 있으니 동시를 써서 그쪽으로 투고하라고 알려주었다. 그후 동시를 써서 《홍소병》 잡지에 보냈는데 보내는 족족 발표되였다. 그 중에서 동시 <사회주의 큰길을 지켜>는 1977년 소학교 3학년 조선어문교과서에 수록되였다.

1977년, 우리 주인공은 료녕인민출판사 조선문편역실(료녕민족출판사 전신)에서 조직한 ‘료녕성조선족제1차가사가곡창작회의’에 참가하면서 료녕의 조선족문단에 합류하였고 이듬해 출판한 료녕의 첫 조선족시집 《꽃피는 새봄》에 장시  <영원히 빛나라, 불멸의 태양이여>를 비롯하여 시 3수를 올리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1970년-1980년대 우리 주인공은 시창작을 위주로 하였는데 이 시기에 창작한 100여 수의 시(가사, 시조 포함) 중에서 대표적인 시로서 <출근길>은 건국 30주년을 맞아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 《시선집》에 수록되였고 시 <고향을 다녀왔습니다>는 건국 70주년을 맞아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 《중국조선족시인선집》에 수록되였다.

1980년 료녕성에서 첫 패로 10명이 연변작가협회에 가입하게 되였는데 우리 주인공도 그중 한 사람으로서 료녕 조선족문단에서 립지를 굳히였다.

1984년 《장백산》 잡지에 민담 <리한림의 혼사>를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우리 주인공의 필봉은 구전문학의 수집정리에 집중되였다. 젊은 시절 생산대에서 ‘논두렁이야기군’으로 활약했던 그 경력이 밑거름이 되였던 것이다. 이 시기에 그가 수집정리한 장편력사가사 《한양가》와 중편력사인물전기 《조선조의 명신 학봉 김성일》 등 4편이 료동문학, 조글로 등에 련재되였고 《구수한 조선민담》, 《갈처사의 예언》 등 민담집 5부가 료녕민족출판사에 의해 단행본으로 출판되였다. 그리고 철령시에서는 그의 민담 111컬레를 중문 자막을 곁들인 《철령조선족민담》이란 다큐로 제작하여 타 민족들도 조선족민담을 접할 수 있게 하였다. 민담에서의 상기 업적을 인정받아 ‘철령조선족민담’은 2009년에 성급무형문화재 항목으로 지정되였고 우리 주인공은 ‘료녕성우수민간예인(민담)’, ‘철령조선족민담 료녕성급 대표적 전승인’ 칭호를 수여받아 지금도 ‘민담전승인’으로 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

2000년대에 들어서 료녕조선족문단은 소설창작에서 ‘저조기’를 맞이하였는데 우리 주인공은 오히려 이 시기에 소설창작에 ‘재미’를 붙이고 열심히 창작하여 료녕조선족문단에서 소설창작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우리 주인공은 1982년, 료녕민족출판사의 《새마을》 잡지에 첫 단편소설  <선택>을 발표한 후로 20여년간 민담 수집정리에 몰두하다가 2007년부터 다시 소설창작을 시작하여 2022년 현재까지 중단편소설 30여편을 국내외 여러 잡지에 발표하였는데 그중 단편소설 <경칠령감의 문화유산>은 2013년, 료녕조선문보’기원컵’압록강문학상 금상을 수여받았고  <공부고장의 모친상>은 2018년 심양시조선족문학회 호룡컵료동문학상 금상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료녕성조선족문학회(원 심양시조선족문학회)에서는 근년래 해마다 문학상 시상식을 가지는데 우리 주인공은 거의 해마다 수상대(단편소설로)에 올랐다. 바로 지난 8월에 있은 료녕성조선족문학회 문학상 시상식에서도 우리 주인공은 단편소설 <선택>으로 은상을 수상해 젊은이들과 나란히 수상대에 올랐으니 ‘수상전문호’로 불리워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존경스러운 것은 우리 주인공의 문학사랑은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문학인으로서의 우리 주인공-박병대 로옹에 대한 소개글을 한단락 마무리하고자 한다. ‘한단락 마무리한다’고 함은 우리 주인공의 문학 사랑은 “필을 들 기력이 있는 날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필자는 주인공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끝날 무렵에 “여든을 넘긴 고령에도 건필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오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때 되돌아온 것은 “그저 재미로 할 뿐”이라는 대답이였다. 다소 ‘썰렁’한 그 대답을 들으며 필자는 사래긴 밭에서 보습을 끌고 우직하게 앞만 보고 직진하는 황소의 형상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뒤로는 새벽 안개를 가르는 워낭소리가 긴 여운을 남기며 귀맛좋게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