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빨 래 판
发布时间:21-09-17 09:04  发布人:金昌永    关键词:   

수필

빨 래 판

(심양) 리은향

“우리 집 뽀로통이 이젠 철이 많이 들었네. 엄마 도와 빨래도 할줄 알고 ......”

화장실 세면대에 마주 서서 도정신해 속옷을 열심히 빨고 있는 딸내미를 보고 싱겁게 말을 걸었다. 고중생인 딸내미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나를 화장실 밖으로 밀어냈다.

“근데 말이야. 지금 니가 쓰고 있는 빨래판 말이지. 네 나이보다 퍽 많은거 알고 있니?”

딸내미는 순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쩍 벌렸다.

“정말이예요? 이 빨래판이 내 나이보다 많아요?” 

“그래, 엄마가 소학교 다닐 때부터 외할머니께서 늘 쓰시던 빨래판이야.”

딸내미는 또 다시 경이로운 표정을 지었다.

“어우 마이갓! 엄마, 내가 시집 가면 나한테 물려줘. ”

딸내미의 생뚱같은 말에 나는 웃음보를 터뜨렸다.

항상 화장실안 변기통 뒤켠 눈길이 닿지 않는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이 빨래판은 손빨래를 할 때만 제 구실을 충분히 발휘한다. 푸르무레한 색갈을 띤 이 플라스틱 빨래판은 색상도 그리 이쁘지 않고 가격 또한  저렴하지만 도저히 바꾸지도 버리지도 못하는 귀한 빨래판이다. 내가 소학교를 다닐 때부터 엄마가 늘 쓰시던 빨래판이였는데 열손가락이 모자랄만큼 수십년이란 세월을 함께 흘러보냈다.

하루도 빠짐없이 빨래판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양말이나 속옷들을 씻을 때면 시골에서 생활했던 엄마 생각이 절로 난다. 특히 엄마가 부엌에서 마후라를 푹 눌러 쓰고 팔소매를 걷어올리고 대추빛갈이 나는 크나큰 대야에 재물을 허옇게 풀어놓고 식구들의 더러워진 옷들을 재워 빨래판에 문지르고 비비고 주물럭대던 모습이 눈앞에 생생하게 나타난다.

모꽂기가 한창인 봄이면 엄마는 어뜩새벽에 나가 날이 어둑어둑해져서야 집으로 돌아오곤 했는데 지쳐 맥빠진 다리를 끌다싶이 집에 들어서서는 식구들의 저녁 밥상 차림에 또 바빠진다. 세살차이인 나와 남동생은 소학교를 다니기에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밥을 짓고 채소를 볶는 일은 참으로 어슬픈 일이였다. 그나마 엄마와 함께 들어오신 아버지께서 가끔 일손을 도우긴 하나 부엌은 시종 엄마의 손길이 가야 모든 게 제대로 돌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잠자리에 눕기 전 대야에 쌓여진 빨래감들을 잊지 않고 꼭꼭 씻어 널군 했다. 진종일 허리를 굽혀 모를 꽂느라 얼굴도 한층 부어오르고 눈두덩도 벌에 쏘인 듯 퉁퉁해졌지만 빨래를 마무리지어야 잠자리에 들 군 했다. 그나저나 그 때 시절엔 이집 저집 다들 살림이 넉넉치 못해 옷가지도 변변히 갖추지 못한 원인도 있겠지만 일거리가 생기면 무조건 해치워야 속이 시원하게 느껴지는 성미가 더욱 큰 작용을 일으킨듯 싶다.

북풍이 기승을 부리며 옷섶을 헤집고 파고드는 겨울이면 엄마는 검정 무쇠솥에 물을 펄펄 끓여 빨래감이 담긴 대야에 쏟아붇는다. 그러면 코구멍만한 부엌은 시뿌연 김으로 꽉 찬다. 워낙 48평밖에 되지 않는 비좁은 집이라 안방 하나에 부엌 한칸 간단한 구조이다. 엄마는 부엌문을 활짝 열어제끼고 김을 어느 정도 빼고서야 손빨래질을 한다. 말끔하게 헹군 빨래를 탁탁 털어 집문앞 마당에 있는 빨래줄에 반듯하게 펴서 하나하나  걸어놓는다. 젖은 빨래는 어느새 맵짠 북풍에 굳어지고 엄마의 두손도 찬기운에 파래진다. 옷에서 물기가 빠지면서 흘러내린 물방울은 어느새 고드름으로 되여 해살에 반짝인다. 겨울빨래는 도저히 잘 마르지 않는다. 이틀, 사흘이 지나도 얼어붙은 데를 찾을 수 있는데 그대로 거둬들이고는 따끈따끈한 구들 아래목에 반듯하게 펴서 계속 말리워야 한다. 때로는 뜨끈한 솥뚜껑우에도 올려놓을 때가 있다.

참으로 빨래질은 생활속의 사소한 가무로동에 불과하지만 세탁기가 희귀했던 그때 시절엔 잔손이 많이 가야 했고 또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였다. 엄마는 경제형편이 곤난해서 비싸고 쫄쫄한 옷을 사입지는 못해도 항상 깨끗하고 산뜻하게 입어야 남들한테 깔보이지 않는다면서 부지런히 빨래일에 달려들었다.

나는 초중에 다니기 시작해서는 가끔 엄마를 도와 빨 수 있는 것들을 자진해서 대야에 모조리 집어넣고 엄마가 쓰시던 빨래판을 꺼내 엄마가 하시던 대로 빨 군 했었다.

“엄마, 매일마다 하는 빨래질 질리지 않아?”

“엄마가 하지 않으면 할 사람이 있겠나. 엄마가 해야 할 일을 좋으나 싫으나 하는거지. 우리 딸은 공부나 열심히 하면 되는거고.”

이것이 바로 생활에 대한 엄마의 태도다. 학교에 다니는 나와 동생은 일심전력으로 공부에 열중할 것을 바랬고 아버지는부지런히 출근을 하시면서 돈을 벌어 가정에 보탬이 되도록 지지하였으며 자신은 가정주부로서 자신의 직책과 사명을 태연하게 받아들이면서 식구들을 보살폈다.

내가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아버지가 한국에 나가 돈을 벌면서 우리 집 생활조건이 펴나기 시작하였다. 아버지가 한국에 나간 지 3년 만에 아빠트 한 채를 구매하게 되였고 이사하면서 세탁기요 랭장고요 전자레인지요 등 가전제품들을 사들였다. 그때로부터 엄마는 세탁기로 빨래를 하셨는데 한편으로는 편리해서 좋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허전함을 토하기도 한다. 시골에서 아빠트로 이사올 때 엄마는 유독 빨래판을 들고 오셨다. 그래도 손으로 빨아야 때가 더 잘 지고 깨끗하다며 속옷이나 흰색 옷감들은 손빨래질을 고집했었다.

지금은 엄마와 남동생이 한국에 나간지 벌써 1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엄마랑 함께 살던 아파트집은 텅 비여 세집으로 내놓았고 집정리를 하면서 오로지 엄마가 쓰시던 빨래판을 들고 내가 사는 집으로 이사를 왔다. 결혼하고 난 후 식구들의 빨래감은 자연적으로 내 몫이였다. 나는 매일 식구들이 벗어놓은 옷들을 분류하여 세탁기에 넣을만한 빨래감은 세탁기로 돌렸고 수건이나 속옷 그리고 양말 같은 것들은 서슴없이 엄마가 쓰시던 빨래판을 꺼내들로 열심히 씻었다. 때기가 빠진 옷을 단정하게 입고 하루를 시작하는 식구들을 떠올리면 마음이 한없이 뿌듯해지고  엄마가 그 때 나와 같은 심정으로 지겹게 보였던 일도 즐겁게 할수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코로나 사태로 엄마를 만나뵙지 못한지도 벌써 2년이 되였다. 그전엔 방학 때마다 애들을 데리고 엄마를 보러 가군 했었는데 지금은 위쳇영상으로 위문을 전하는수 밖에 없다. 래년이면 엄마는 70고개를 올라선다. 자식들한테 부담주기가 싫어 그리고 팔다리 움직일수 있을 때 기껏 벌어야 한다며 엄마는 아직도 한국에서 청소부아줌마로 일을 하고 계신다. 요즈음 들어 엄마는 늘 팔이 쑤셔나고 기력이 딸린다는 얘기를 종종 하신다. 여러번 일을 그만 두고 남은 여생은 여유롭게 살라고 권하여도 일을 하지 않으면 살 재미가 없다며 들으려 하지 않는다.

요즘 위챗통화할 때면 엄마가 꼭 하는 말이 있다.

“래년 칠순엔 너희들이 다 나올수 있을가?”

아버지께서 59세로 돌아가신후 엄마는 여직껏 홀로 남은 인생을 걸으셨다. 환갑을 앞두고 한국으로 달려가 번뜻하게 큰상을 차려주려고 벼르고 별렀으나 엄마는 아버지와 잔치상도 받지 못했는데 혼자서 큰상을 받을 용기가 없다면서 호의를 마다하였다. 온 가족이 함께 모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면서 친척들이랑 친구분들을 모시고 단촐하게 보냈다. 하여 엄마 칠순잔치는 꼭 멋지게 차려드리려고 맘먹고 있지만 코로나 상황을 풀려 한국으로 나갈 수 있을지가 근심이다.

딸내미가 빨래를 끝내고 제 방으로 들어가는 기척이 들린다. 나는 침실에서 나와 방금 딸내미가 쓰던 빨래판을 들고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빨래판 한가운데 엄마얼굴이 선명하게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