료심지역 조선족 혁명인물(12)중공봉천특위 제1임 서기 진덕삼
发布时间:21-07-28 12:00  发布人:金卓    关键词:   
진덕삼(陈德森, 1881-1950)의 원명은 홍남표(洪南杓)이고 리극화(李克和), 강삼(姜三), 강우(姜宇), 강방(姜方) 등 이름도 사용했다.

그는 1888년 조선 경기도 양평에서 태여났다. 1919년에 ‘3.1’운동에 참가했다가 그 해 6월에 중국 동북으로 망명했다. 8월에 한족신문사(韩族新闻社)를 꾸리고 <새배달> 신문의 책임주필을 맡았다. 10월에 재만독립운동자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을 맡았다.

 

1926년 9월 진덕삼은 상해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1929년 10월에 당조직의 파견으로 동북에 왔다. 1930년 8월 그는 중공만주성위 순시원의 신분으로 청원 일대에 파견되여 당조직 건립사업을 지도하고 중공청원현위를 설립했으며 잇달아 철령, 개원, 서풍에 청년단특별지부를 설립했다. 1930년 11월 진덕삼은 중공만주성위 후보위원으로 당선됐고 이듬해 1월 중공북만특위 위원이 됐으며 같은 달에 중공만주성위의 지시로 중공할빈시위 서기 겸 조직위원의 중책을 맡았다.

 

1931년 9.18사변이 폭발한 후 봉천(심양)의 정치형세가 험악해지자 중공중앙의 지시에 따라 중공만주성위는 그 해 12월에 성위기관을 할빈에 옮겨가게 됐다. 봉천을 떠나기 전 중공만주성위는 봉천과 남만 지역의 당사업을 강화하기 위하여 중공봉천특위를 설립하기로 결정하고 진덕삼을 서기로 임명했다. 진덕삼은 중공봉천특위의 첫 서기이다. 중공봉천특위는 극히 악렬한 환경 속에서 대련, 청원, 무순, 반석, 료양, 단동, 봉천 등 지역의 지하당조직의 혁명활동을 지도하고 군중들을 발동하고 령도하여 일본침략자와 견결한 투쟁을 진행함으로써 봉천 및 남만 지역의 항일투쟁에 큰 공헌을 했다.
1932년 가을에 진덕삼은 상해에 돌아갔으며 12월에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여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제공: 료동항전연구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