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만희(柳万熙, 1917-1940)의 원명은 류영준(柳永俊)이고 1917년에 조선 경상북도 안동군에서 태여났다.
1925년 부모를 따라 길림성 반석현으로 이주한 뒤 류하현 삼원포 곽가점을 거쳐 1930년 료녕성 청원현 남산성 삼간방촌에 정착했다. '9.18'사변후, 반일아동단에 가입했고 1933년에 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했으며 그 해 가을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에 입대하여 제5퇀 련락원이 됐다.
1934년 가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1935년에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제3사 정치부 주임이 됐고 서풍, 청원, 개원 등지를 전전하면서 전투를 지휘했다. 그 때로부터 청원 남산성지역에 진입하여 지하교통련락소의 련락업무를 책임졌고 11월 하순 제3사의 서정작전을 조직, 지휘했다. 제3사의 서정이 실패하자 제3사의 한갈래 부대를 거느리고 청원으로 되돌아가던 중 개원을 향해가고 있는 60여명의 일본군을 습격하여 전부 섬멸했다.
1937년 봄 아이당(啊尔当), 흑우(黑牛), 고립자(高砬子), 흑석두(黑石头) 등 여러 곳의 괴뢰군을 습격하여 련전련승했다. 1937년 7월, 주건화 정치위원과 함께 부대를 거느리고 개원현의 동송목령에서 일본군 군용차량을 기습하여 오까다 중좌와 사까모도 소좌를 비롯한 13명을 사살했다. 같은 달 또 부대를 거느리고 청원현 철도하자에서 일본군을 매복 습격하여 20여명을 사살했고 적군의 자동차 한대와 기관총 한정을 비롯한 각종 총기 20여자루를 로획하여 일본침략자들의 기고만장한 기세를 꺾어놓았다. 그 해 가을, 제3사 사장인 왕인재, 정위 주건화, 참모장 양준항 등이 잇달아 희생되면서 제3사의 모든 업무를 책임졌다. 1938년 여름, 일본군 자동차 한대가 서풍현성으로부터 방목진으로 이동한다는 정보를 얻고 즉시 부대를 거느리고 매복하여 일본군 지휘관 다무라를 사로잡고 가메이를 사살했으며 자동차를 소각했다. 8월 1일, 30여명의 전사들을 이끌고 서풍현 송수촌 라자구산에서 적군 20여명과 교전하여 일본군 지휘관 아오가와 자위대원 1명을 사살하고 2명을 사로잡았다. 그 해 겨울 부대를 거느리고 금천현 동산이로 이동하여 양정우가 거느린 부대에 합류했으며 양정우의 통일적인 지휘하에 제3사의 남은 전사들을 인솔하여 일련의 전투에 참가했다. 화전에서 전투를 벌이던 중 오른쪽 팔에 부상을 입었으며 1940년 3월 24일, 림강현 7구 흑할자구(黑瞎子沟) 밀영에서 병을 치료하던 중 변절자에게 살해당했다. 그 때 그의 나이는 23살이였다.
제공: 료동항전연구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