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혜 기자] 딸부자집 셋째딸, 동네에서 '똑똑이'로 이름이 자자했던 박홍청(1974년생) 철령시조선족고급중학교 교사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그만큼 부모님이 자신에게 건 기대가 무척 컸다면서 그 때의 기억을 더듬었다.
공산당원인 부모님은 자녀들을 그 누구보다 엄격히 요구했다. 학업면에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정기적으로 다양한 신문, 잡지, 도서들을 주문하는 아버지로 인해 박홍청 교사의 집은 동네의 작은 도서관이였다. 그런 리유 때문일가, 어릴 때부터 그는 독서를 유독 즐겼다. 생활, 학업 모든 면에서 우등생인 둘째 언니도 그의 거울이 되였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건강 악화로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그의 둘째 언니는 부득불 대학을 포기하게 된다. 교육열이 남달랐던 부모님의 마음을 일찍이 읽은 그는 그 때부터 언니의 몫까지 다해 그들의 ‘자랑’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 시절, 동네에서 유일한 본과생으로 연변대학에 입학했어요, 통지서가 내려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먼 거리도 마다하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통지서를 가지러 가던 아버지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그는 한국행, 일본행을 택한 대학 동기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흔들린 적은 있어도, 지금껏 직업 선택을 후회한 적은 단 한순간도 없었다 한다. 마음을 다잡고 사업에 림할 수 있었던 데는 가족의 영향이 무엇보다 컸다.
교학 24년차, 화학교사로, 담임교사로, 학급조장으로, 정교처 주임으로 그리고 2016년부터는 당위 판공실 주임까지... "과거에도 지금도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내고 있는, 흔들림 없는 자세로 맡은바 사업에 늘 최선을 다하고 있는 박홍청 교사는 우리 학교 '만능 교사'나 다름없어요." 오장환 교장은 이 같이 그의 열정을 긍정했다.
현재는 담임교사를 맡고 있지 않지만 그래도 그 때 아이들과 부대끼던 일상이 더더욱 행복하다고 한다. 반급의 분위기는 담임교사의 성향에 의해 좌우지된다고 했던가, 털털하고 외향적인 성격 탓에 그가 맡은반급은 늘 긍정적인 에너지로 가득찼다. 대학입시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시기에도 경쟁보다는 서로 '으쌰으쌰'하며 이끌어주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박홍청 교사는 간건강에 적신호가 켜져 학업을 포기하려 했던 제자 한명을 떠올렸다. 그 아이는 반급의 우등생으로 매사에 적극, 열정적이였다. 밝은 성격으로 반급의 행복전도사 역할을 자처했던 아이가 건강에 문제가 생긴 뒤부터는 태도가 180도 달라졌다. 가정방문을 통해 아이의 집안사정을 료해한 그는 학교에 조학금을 즉시 신청했을 뿐만 아니라 개인 인맥을 동원해 아이에게 ‘애심장학금’도 마련해주었다. 무사히 고중학업을 마치고, 대학입시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동북재경대학에 입학한 제자는 지금도 명절 때면 꼬박꼬박 문안인사를 전하군 한다.
'경력파 교사'임에도 불구하고 박홍청 교사는 교학 질을 높이기 위한 연구를 끊임없이 해오며 자신을 엄격히 요구해왔다. 그가 쓴 론문 <학생들의 혁신능력 배양>이 료녕성교육학회 조선족학교생물화학전문위원회 제5차 년회에서 1등상을 수상, <조선족지방과학기술문화자원이 화학교학에서의 응용>이 중외기업인잡지에 실렸는가 하면 <화학교학질을 제고할 데 관하여>는 료녕성조선족중학교 고중화학교학연구토론회에서 2등상을 수상했다. 이외에도 료녕성우수교사, 료녕성골간교사... 굵직한 영예들이 그간의 노력을 고스란히 긍정해주고 있다.
교사라는 직업을 열애하기 보다 일사천리로 취직이 되여 24년간 '피할 수 없으면 즐기자'는 마음가짐으로 사업에 림해온 박홍청 교사, 그 어떤 영예, 그 어떤 성공보다 학생들로부터 "선생님은 저의 '귀인(贵人)'이나 다름없어요, 존경합니다!"라는 말을 들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