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책을 펴낸다면 과연 어떤 영화 같은 이야기가 책속에서 펼쳐질가? 스크린과 활자의 세상을 오가며 상상력을 펼쳐내는 영화감독들이 있다.
《여섯개의 도덕이야기》를 쓴 영화감독 에릭 로메르는 다른 누벨바그 감독에 비해 훨씬 뒤늦게 알려졌지만 “최후의 누벨바그”라는 말을 들을 만큼 가장 지속적으로 누벨바그 영화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감독이다. 60년에 발표한 그의 첫 장편영화 《사자의 신호》는 성공하지 못했다. 로메르는 동료들이 영화감독으로 전업해 활동하고 있는 동안에 편집장을 력임했고 서서히 자신의 작품세계를 준비하고 있었다. 로메르의 야심은 18세기 철학자 파스칼, 라브와이예르, 라 로슈푸코 등과 같은 ‘도덕주의자’의 실천을 영화로 옮기려는 것이다. 프랑스말로 도덕주의자는 도덕이라는 말의 일반적인 뜻과는 다르다. ‘도덕주의자’는 인간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묘사하는 데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과연 로메르의 영화는 “난 사람들의 행동이 아니라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 도중 뭘 생각하는지에 관심이 있다. 행동이 아닌 생각을 담은 영화 말이다.”라고 말한 언명을 증명하는 바가 있다. 로메르는 식탁에서 등장인물이 파스칼의 철학을 읊는 따위의 사소한 대화장면에서도 등장인물의 마음을 읽어내는 놀라운 영화기법과 정신의 소유자이다.
에릭 로메르는 10년이란 결코 적지 않은 시간을 들여 《여섯편의 도덕이야기》 시리즈를 완결짓고 나서 전작들과는 다른 세계 속으로 진입을 감행했다. 그의 다음 작품은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소설을 충실하게 각색한 것이였는데 로메르는 고전적 기품과 균제의 아름다움을 갖춘 이 시대극을 만든다는 게 스스로 아주 만족스러웠던 모양이다. 앞으로 자신의 창조적 노력을 오로지 이런 령역에만 바치겠다고 단언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여건만 허락되였다면 과연 로메르는 그렇게 했을가? 알 수 없지만 여하튼 더 많은 제작비가 필요하고 그렇다고 더 많은 관객을 끌어들이지도 못하는 이런 프로젝트에 그는 실제로는 더이상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매우 혁신적인 또 다른 시대극 《갈로아인 페르스발》을 끝으로 로메르의 영화는 친숙한 동시대 이야기로 되돌아왔고 그리고 다시는 과도한 ‘일탈’을 시도하지 않았다.
《시간의 각인》을 쓴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로씨야의 시인이자 영화감독이다. 미조구치 겐지 감독,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과 더불어 롱테이크의 상징으로 꼽히는 거장이다. 미조구치가 롱테이크를 통해 미학적 탐구를, 앙겔로풀로스가 정치적, 력사적 문제를 다루었다면 타르코프스키 감독은 종교적, 철학적 문제을 주로 다루었다. 누벨바그를 비롯한 여러 감독들이 편집이나 씨나리오에 집중해 영화미학을 발전시킨 반면 타르코프스키 감독은 시간에 영화의 새로운 성질이 있다고 보았으며 그 독특한 미학을 통해 세계영화사에 한획을 그었다.
그의 초기작인 《이반의 어린시절》은 쏘련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렬의 영화적 특징을 보여준다. 어린시절 비상의 꿈은 억압받고 있는 민중들의 리상향이자 관객들이 자발적으로 영화에 참여하도록 이끌기 위해 롱테이크의 미학을 중점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시적 령감은 현실 너머의 세계라기보다는 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자 공감대이다. 그러므로 마치 우리의 무의식을 헤매는 듯한 영상미와 주인공들의 려정은 기억의 탐색이자 영화가 시간 예술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준다. 2시간짜리의 시간 모험, 그것이 《봉인된 시간》이라는 자전적인 저작을 통해 우리에게 들려주는 고백담이다. 그러나 망명 시절의 생활은 병과 고향에 대한 향수로 더이상 영화를 만들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희생》은 그의 고별사인 셈이다. 마른 나무가지에도 매일 물을 주면 언제가는 꽃을 피울 수 있다는 신념은 최고의 영화감독이 남긴 인간 구원의 메시지이다. 그의 영화 역시 인간의 령혼에 물을 주는 물주전자와 같다.
《폭력적인 삶》을 쓴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혁명가이자 영화감독인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는 현대영화의 거장이다. 폭력에 대한 과격한 묘사와 파시즘과 반파시즘의 기묘한 줄다리기는 그를 언제나 론쟁의 중심에 세웠으며 그 스스로도 론쟁가이자 영화리론가이기도 했다.
1942년에 첫 시집인 《카사르사의 노래》를 시작으로 이딸리아 문화의 중심이 된 파졸리니는 파시스트 장교인 아버지와 농민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여났다. 이 기묘한 운명은 그를 극단적인 세계관에 몰입토록 한다. 그의 첫 시집은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파졸리니 영화와 달리 프리울리 농부들에 대한 애정의 표현이자 목가였다. 그러나 농부들의 대지주에 대한 반란과 스스로 동성애자 혐의로 당조직에서 추방되면서 비운의 삶이 시작된다. 로마로 옮겨간 파졸리니는 생계를 위한 활동과 자신의 정치적 강령을 고수하면서 투쟁의 삶을 시작한 것이다. 1961년에 만든 데뷔작 《걸인》은 자신의 소설을 토대로 하여 계급적인 립장을 드러낸다. 이때부터 부르죠아에 대한 혐오와 공격을 시작하여 《마마로마》, 《백색 치즈》 등을 만든다.
또한 미술적인 재능도 그의 영화에 큰 령감을 불어넣었다. 그의 영화가 상당부분이 신화적인 공간에서 벌어지는데 이러한 분위기를 한층 돋우기 위하여 색채 사용에 항상 신중했다. 혹자는 그의 평면적인 영화 공간을 중세 회화의 시각적인 특성과 련결하여 설명하기도 한다.연변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