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무순시조선족제1중학교
发布时间:21-01-27 02:10  发布人:金卓    关键词:   

주류사회에서 칭찬받는 조선족완전중학교

 

최근 8년간 학생수가 58%나 줄어드는 객관적 위기를 모면하지 못했으나 전반 학교운영과 유용한 인재 양성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8년간 대학입시에 참가한 1,051명 졸업생 중 600점 이상 학생이 62명으로 북경대학, 청화대학에 10명이 입학하였다. 특히 2014년에는 중점대학 진학률 36.63%, 2015년에는 본과대학 진학률 88.2%를 기록하며 무순시 주류사회를 놀라게 했다. 교수질의 향상과 높은 대학 입학률은 이왕 성적이 괜찮은 학생일수록 더 좋은 조선족학교나 한족학교로 전학해가던 상황을 근절하는 요인이 되여 지금까지 학생수가 상대적인 안정세를 유지하고 있다. “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대학교에 입학한거나 마찬가지다.”란 입소문까지 한족들 사이에 퍼져있는 이 학교가 바로 무순시조선족제1중학교이다.

 

60여년 변천사

 

무순시조선족제1중학교 건교 60주년 기념문집에 실린 당시 김광산교장의 축사를 보면 무순시조선족제1중학교는 1950년 3월 20일 정식건립되였다. 당시 학교명은 ‘무순시립조선중학교’였다. 제1임 교장에 김의선, 교도주임은 허동수였으며 9명의 담임교원과 186명의 학생이 있었다. 그중 5명 학생은 이미 자식을 둔 아버지였고 90% 이상 학생이 남자였다. 설치된 과목은 조선어, 로씨야어, 수학, 물리, 화학, 력사, 지리, 동물, 식물, 체육이였다. 2년후인 1952년에 고중부를 증설하여 완전중학교로 탈바꿈했다.

 

건교 60주년 기념문집에는 1947년 봄 무순시 순성구 전전향 포가촌, 한국교육회 학부모위원회, 기독교회 등 단체의 노력으로 건립된 ‘근명중학교(槿明中学)’가 전신이라는 기록이 있으나 “1948년 10월 31일, 무순이 해방되면서 료동성의 지시에 따라 조선족사업소조 구성, 조선족중학교 설립준비에 나섰다.”는 자료를 보아 1950년 건립이 정설인 듯 하다.

 

1962년 성민족사업회의에서 무순대표 김창걸은 성교육청에 성내 33개 소수민족학교 중 성급 중점학교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반영했다. 심사를 거쳐 학교는 성내 조선족학교 중에서 유일하게 ‘료녕성중점중학교’란 칭호를 획득했다. 1985년 학교는 초중부를 분리시키면서 학교명을 ‘무순시조선족제1학교’로 정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그간 학교는 또 무순지역 조선족소학교 교원이 결핍한 문제를 감안하여 사범부를 증설하고 70여명 소학교원을 양성한 동시에 무순시의 경제건설에 이바지하기 위해 ‘무순시조선족직업고급중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전국민족교육선진단위’, ‘료녕성문명단위’ 등 국가급, 성급 영예를 수십차 받아안은 학교는 현재 고중부 227명, 초중부 195명으로 총 학생수가 422명이며 교직원이 121명이다.

 

위기를 기회로

 

2009년만 해도 고중부에 학생이 518명, 초중부에 424명, 총 942명이 있었다. 하지만 2011년부터 학생이 급감하기 시작했다. 초중부에서 해마다 평균 32명씩 감소되니 고중부 학생수를 보장하기 어려웠다. 조선족학교 학생래원 감소문제를 따져보면 하나는 조선족유치원이 적고, 다른 하나는 자식을 조선족학교로 보내는 학부모가 적어졌기때문이다. 학생수가 지속적으로 감소되는 상황에서 학교 지도부는 대안찾기에 고민을 거듭했다.

 

우선 학교는 소반화 수업모식과 지도교원제도를 실시하여 수업효과를 보장했으며 학생의 학습, 생활 상태를 수시로 체크했다. 이 조치는 학생들의 학습열정을 크게 불러일으켰으며 학업과 학우관계로 쌓이는 여러가지 스트레스도 즉시 풀어주었다.

 

맞춤형 수업으로 학생들의 실정에 어울리는 학습지도를 하였으며 학생들에게 ‘틀린문제집’을 만들어주어 각 과목 기초를 튼튼히 닦아주었다. 또한 정기적으로 ‘학생 + 교원 + 학부모’ 토론회의를 개최하여 현단계 우세, 약세 및 기대치를 전면적으로 분석하는 동시에 시험성적 예측과 실제 득점을 비교하면서 명확한 노력방향을 제시했다.

 

교원들도 정기적인 시험요강 분석회의를 열고 최근 5년간의 대학입시문제를 통해 그해의 출제방향을 예측하고 이에 따른 겨냥성 복습계획안을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최근 몇년간 본과대학 진학률 80% 이상을 보장하는 요인이 됐다.

 

고중부는 대학입시 준비, 초중부는 흥취양성

 

학교가 완전중학교로 되면서 학교는 고중부와 초중부의 원활한 련결을 둘러싸고 여러가지 조치를 취했다. 먼저 정기적인 초고중 교원교류회에서 초고중 련관성이 긴밀한 수학과 영어의 교학련결을 둘러싸고 의견을 통일하였다. 다음으로 정기적으로 초고중 우수생좌담회를 조직하여 초중생들에게 미래에 대한 신심을 심어주었다.

 

이 기초에서 고중부는 예전부터 이어온 대학입시 준비에 계속 중점을 두었으며 초중부는 입학압력이 약한데 비추어 학생들의 전면적 발전에 중점을 두었다. 구체적으로 시험문제 위주의 수업에서 취미성, 실용성 수업을 통한 능력 양성에 중점을 두었으며 축구, 무용, 컴퓨터, 미술 등을 아우르는 폭넓은 동아리활동을 전개하여 학생들마다 장기를 갖추도록 좋은 환경을 마련해주었다.

 

뢰봉이 찾아왔던 조선족학교

 

무순시조선족제1중학교의 강세인 덕육교육을 살펴본다면 ‘뢰봉정신’과 ‘흥태정신’이 가장 특징적이다.

 

1961년 5월 22일, 학교의 초청으로 뢰봉은 전교 사생 앞에서 개인 감수를 이야기했다. 당시 교장 김창걸은 뢰봉이 보고하는 장면을 사진기에 담아 뢰봉 생전의 진귀한 자료로 남겼다. 상해미술출판사는 그 흑백사진을 칼라사진으로 처리했으며 루계로 200여만장이나 인쇄했다. 현재 학교는 뢰봉 따라배우기를 덕육교육의 중요한 일환으로 두고 해마다 무순시조선족양로쎈터를 방문하며 뢰봉기념관에서 뜻깊은 성인의식을 개최하군 한다. 다년간 학교는 또 선후로 ‘뢰봉 전우’ 김국길, 무순시뢰봉따라배우기선진사적보고단, ‘뢰봉식 소방전사’ 김춘명 등을 초청해 보고회를 진행하기도 했다.

 

특히 ‘뢰봉정신’을 계승한 ‘흥태정신’은 이 학교 덕육교육의 표징이다. ‘흥태정신’ 주인공 리흥태는 2004년 무순시조선족제1중학교에서 졸업하고 중경과학기술대학에 입학했다. 재학기간 장강에 빠진 어린이를 구하기 위해 젊은 목숨(당시 21세)을 바쳤다. 그후 중경단시위, 중경시위 교육공위, 중경시 구룡파구정부, 중경과학기술대학, 무순시조선족제1중학교에서는 리흥태에게 각각 ‘중경시견의용위우수공청단원’, ‘중경시견의용위(见义勇为)우수대학생’, ‘중경시구룡파구견의용위영예공민’, ‘견의용위우수대학생’, ‘견의용위우수졸업생’ 등 칭호를 수여했다.

 

무순시조선족제1중학교는 리흥태가 생전 공부했던 3반을 흥태반으로 임명하고 2005급 1학년 3반을 제1기 흥태반으로 선정했다.

 

한편 최근년간 항일전쟁 승리를 기념하면서 학교에서는 료녕성사회과학원을 비롯한 력사연구단위의 전문가들을 초청해 조선족 관련 항일투쟁력사를 학생들에게 소개하며 다양한 행사로 애국주의교육을 펼쳐 왔다.

 

발전에 동반한 문제

 

최근년간 무순시조선족제1중학교는 자타가 인정하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전반 운영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여러 방면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전 성 조선족학교의 공성으로 보이는 교원부족문제가 뚜렷하다. 교직원들의 평균 년령이 높아지면서 중청년 교원들의 ‘일인다역’현상이 심하며 격려제도의 부진으로 사업 적극성도 떨어지고 있다. 새 교원 모집이 어려운 데다 5년내 전체 교직원 중 20%가 퇴직하게 되면서 일손이 부족한 현상이 엄중하다.

 

경비부족문제도 피할 수 없다. 최근년간 정부에서 학교운영에 필요되는 인당 경비를 계속 인상하고 있지만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학교에 한족교원이 많아지고 한어로 강의하는 현상이 심해지는 현상도 홀시할 수 없다. 학교에서 우리 말 사용이 저하되고 심지어 대학입시 준비에서도 조선어공부를 홀시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 데 대해 학교 지도부는 여러가지 해결안을 모색 중이다.

 

최동승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