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대련시조선족학교
发布时间:21-01-26 03:14  发布人:金卓    关键词:   

천시, 지리, 인화 조화를 이룬 대련시조선족학교

배움의 즐거움, 성장의 희열 만끽

 

대련시조선족학교는 1946년에 설립되였다. 대련대학 류병호 교수에 따르면 그해 4월 20일, 대련조선인로동동맹 회장 문지현 등이 세운 대련시조선인학교가 현재의 대련시조선족학교 전신이다. 광복직전 4만명을 웃돌던 조선인 인구가 광복을 맞으며 90% 이상이 귀국하고 4천여명만 남게 되자 조선인 유지들이 교육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히 느껴 학교를 세우게 되였다는 것이다.

 

1980년대 중기까지 대련조선족은 시종 4,000명 정도였으나 문화수준은 당시 중국의 평균수준을 훨씬 초과하였다. 이들 모두 대련시조선족학교를 졸업했다고는 할 수 없으나 당시까지 대련시조선족학교의 교육질이 타민족 교육에 비해 월등했음을 알 수 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련시조선족학교가 학생수의 증가와 더불어 거족적인 발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천시, 지리, 인화의 조화로운 융합과 갈라놓을 수 없다고 리종윤 현임 교장은 말한다. 개혁개방과 중한수교는 대련시조선족학교로 놓고 보면 ‘하늘이 준 기회’였다. 바다를 옆에 낀 상대적으로 우월한 도시환경은 대련 특유의 ‘지리적 우세’였다. 개혁개방과 더불어 급물살을 탄 도시화 물결 속에 조선족들은 타민족에 비해 먼저 뛰여들었고 수도 북경을 비롯하여 상해, 광주, 청도 등 연해도시가 새로운 정착지 1번지였다가 급기야 정서적으로 우리에게 어울리고 소비수준이 알맞는 대련을 선호하기에 이른다. 다른 한면 중한수교후 한국로무를 통해 목돈을 쥔 적잖은 조선족들이 귀국후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고향과 멀지 않은 대련에 아빠트를 마련하고 도시생활을 시작하며 대련시 조선족 상주인구의 증가에 한몫 했다. 1980년대 중기까지 4,000여명이던 조선족 상주인구가 2000년대에 이르러 5만명 선을 돌파한 것을 보면 개혁개방 30년 동안 10배 이상 증가한 셈이다.

 

대련시 조선족 상주인구의 증가는 실제로 대련시조선족학교 학생수의 증가로 이어졌다. 리종윤 교장에 따르면 1990년대 초엽부터 늘어나기 시작한 학생수는 2001년 400명 선을 돌파한후 3년간 안정세를 유지했다.  2004년부터 대련시의 아빠트 가격이 천정부지로 올라가자 대련에 정착했던 적잖은 조선족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며 학생수에도 얼마간 파동이 있었으나 2010년부터 다시 상승세를 타기 시작, 현재 430명으로 호황기를 맞고 있다.

 

우리 성 조선족학교 중 대련시조선족학교는 학생래원 구성에서 독특성을 갖고 있다. 이는 학생들의 부동한 호적에 극명하게 나타난다. 현재 대련시조선족학교의 430명 학생들중 대련시호적을 갖고 있는 학생은 193명(44.9%)으로 거의 절반수를 차지하나 대련 원주민은 17명으로 0.04%에 불과하다. 17명을 제외한 176명 학생은 외지에서 대련에 이사와 호적에 올린 것이다. 현재 대련에 호적이 없는 학생은 211명으로 길림성에 호적을 둔 학생은 74명, 흑룡강성에 호적을 둔 학생은 53명, 대련 제외 료녕성에 호적을 둔 학생이 50명, 북경, 상해, 광주에 호적을 둔 학생이 6명이다. 기타 4명 학생은 아직 호적을 올리지 못한 상황이다. 이외는 모두 한국 류학생이다.

 

원주민 학생이 17명 밖에 안되는 대련시조선족학교의 학생수가 430명인 것은 많은 점을 시사해준다.‘천시, 지리’인소 외에 ‘인화’의 요소를 외면할 수 없다.

 

‘박애, 자신, 구지, 건강’이라는 교육리념과 상대적으로 높은 교육질이 핵심요인이다. 최근년간 선후로 수십명의 북경대학, 복단대학 등 명문대 대학생이 배출되고 2014년 대학입시에서 료녕성문과장원이 나타난 것이 이 점을 충분히 설명해준다.

 

취재도중 흑룡강 태생으로 상해에서 무역업에 종사하는 분을 우연하게 만났다. 그 분은 “3일간 학교의 전반 상황을 상세히 료해했다. 듣던 바와 같이 교육질이 확실히 높다. 딸애를 입학시키기로 마음굳혔다. 래일부터 학교 부근의 아빠트를 알아보고 구매한후 상해에서 대련으로 살림터를 옮기겠다.”고 속마음을 내비쳤는데 이 또한 대련시조선족학교에 대한 사회 각계의 평가를 대변하고 있다.

 

대련시조선족학교는 부동한 력사시기 ‘천시, 지리’를 기본 바탕으로 ‘인화’의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계영자 전임 교장에 따르면 대련시조선족학교는 1990년대 중기 나라의 개혁개방혜택으로 민족언어의 위치가 크게 개선되며 학생수가 늘어나는 상황에 발맞추어 교육질 제고를 위한 교수개혁을 과감하게 진행했다. 당시 우리 성 교육계통에서는 처음으로 ‘쇠밥통’을 까부시고 경쟁기제를 도입했었는데 구체적으로 ‘시간수당금(课时津贴)’제를 실시한 것이 그 실례다. 교원들의 로임에서 30%를 떼내여 기타 수입의 수당금액과 묶어 배분하는데 수당금수는 매개인의 과당시간 등 실무성과에 의하여 결정된다. 이 조치는 교원들의 사업의욕과 승벽심을 불러일으켰으므로 전반 학교운영의 일대 혁신을 일으켰다.

 

다각적인 취미활동을 통해 학생들의 다방면 능력을 양성하는 것도 대련시조선족학교의 ‘인화’가치 창출의 한 방면이다. 대졸생들의 취업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는 실정에서 중점대학 진학생 양성도 중요하지만 졸업후 사회에 진출하여 취업할 수 있도록 어려서부터 다방면의 능력을 양성하는 것도 그만큼 중요하다는 판단아래 대련시조선족학교는 정상수업외 음악, 무용, 체육, 미술 등 여러 방면에서 다각적인 취미활동을 활발하게 조직하였다. 과외 작문지도를 비롯하여 바둑, 성악, 무용, 기악, 과학기술보급 활동들을 정기적으로 조직, 진행하였다. 음악예술부문은 대련시조선족문화예술관의 무료지도를 통해 학생들이 제가끔 장기를 갖도록 하였다.

 

대련시조선족학교의 ‘인화’가치 실현의 핵심요인은 학생들로 하여금 공부하는 즐거움을 만끽하게 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웃음과 기쁨, 랑만과 행복이 넘쳐나는 교정건설은 학생들의 개성발전을 통한 전면발전으로 이어졌는바 이는 또한 한족학교를 다니던 조선족학생들이 대련시조선족학교로 전학해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리종윤 교장에 따르면 대련시에서 한족학교를 다니던 조선족학생들이 대련시조선족학교로 전학해오는 상황은 이전부터 한두명씩 있었으나 지난해에는 동시에 20여명이 전학해오기도 하였다. 학부모들의 조선족 일원으로서 자식들에게 민족의 언어와 문자를 잊지 않도록 가르쳐야 하겠다는 민족자각성을 부인할 수 없겠지만 그들의 시대발전에 따른 교육관념의 변화와 대련시조선족학교에서 실시하고 있는 웃음과 기쁨, 랑만과 행복이 넘쳐나는 교정건설과 갈라놓을 수 없다.

 

리종윤 교장은 한족학교의 경쟁은 조선족학교들에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치렬하다고 말하고 있다. 한족학교에서 초중에 올라가면 밤 11전에 휴식하는 학생이 거의 없다. 한족학교에서 이름있는 고중에 승학하는 것이 명문대학에 입학하기보다 더 어렵기 때문이다. 경쟁이 치렬할수록 그만큼 압력도 크고 힘도 든다. 경쟁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과도한 경쟁은 학생들의 개성발전에 불리하고 따라서 온 가정이 긴장속에 빠지게 된다. 대련시조선족학교는 경쟁이 상대적으로 약한 반면 학생수가 적은 ‘우세’를 극대화하여 교원마다 ‘부모’가 되여 매 학생들의 개성을 존중하고 개성발전을 추진함으로써 좋은 효과를 보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대련시조선족학교에 전학해온 학생 중 두명의 부모는 대학교 교수다. 리종윤 교장은 두 교수에게 아이를 대련시조선족학교로 전학하는 리유를 물었다. 아이들이 한족학교에서 치렬한 경쟁으로 행복한 소년시절을 우울과 긴장속에 보내게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들의 하나같은 대답이였다. 그중 한 학생은 소학교에서 말도 잘하고 웃기도 잘하는 활발한 학생이였는데 초중 승학후 과중한 학습부담으로 인해 우울증 증세까지 보여 조선족학교에 전학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지금 두 학생은 대련시조선족학교에서 공부하는 즐거움을 만끽하며 훌륭히 자라고 있어 부모들이 아주 만족해하고 있다고 리종윤 교장은 소개했다.    

 

리종윤 교장은 학생들의 깎듯한 인사성, 교정의 깨끗한 위생과 아름다운 환경 또한 ‘인화’교육의 중요한 구성부분이라고 했다. 몇년전 대련시교육국 조양 국장은 새로 부임하자 바람으로 대련시 산하 20개 학교를 순회 방문하였는데 유일하게 대련시조선족학교에서 근 두시간을 머물며 학교 지도부성원들과 좌담을 갖고 학교의 사업보고를 청취한후 학교의 교육모식을 높이 긍정하였다. 한족학교에서 볼 수 없었던 밝은 기상이 조양 국장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이다.

 

리종윤 교장은 ‘인화’가치의 실현에서 학부모와 전반 조선족사회의 물심 량면으로 되는 지지와 성원이 필수적이라고 표했다. 1998년 대련시조선족학교는 대련시정부와 교육국의 비준을 거쳐 초중부를 설립하게 되였다. 대련시조선족학교에 초중부가 설립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대련지역 광범한 조선족군중들과 심양 등 기타 시의 부분 조선족들은 교사확건에 보태쓰라며 50여만원의 헌금을 쾌척하였다. 이속에는 모택동의 조선어통역을 담당하였던 원 려대군부대 대외련락부 부부장 김도영 등 유명인사가 있었는가 하면 장편소설 《고옥보》의 저자 고옥보도 포함되여 있다. 소개에 따르면 고옥보는 만년에 김도영과 절친하게 보냈는바 김도영의 소개로 대련시조선족학교에 교외보도원을 맡기도 했다. 3년후인 2001년 대련시조선족학교 고중부 설립을 위해서도 대련시조선족사회는 해당부문에 의견서를 제출하는 등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최근년에 와서 대련시조선족애심기금회, 대련시조선족기업가협회, 대련시선성물류그룹 등 사회단체와 기업들의 지지, 성원이 끊기지 않고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대련시조선족학교에서는 다년간 학교에 대한 사회의 지지 성원에 보답하고저 해마다 교내 운동회를 학생과 학부모, 대련시 조선족사회가 참여하는 ‘민족운동회’로 조직하군 한다. 이를 두고 어떤 분은 대련시조선족학교 운동회는 대련시조선족민속절이기도 하다고 한다.

 

눈부신 성과도 많았지만 애로점도 적지 않다며 리종윤 교장은 얼굴을 흐린다. 가장 돌출한 문제점이 교수청사다. 1998년 초중부 설립 시 확건한 교수청사는 근 20년 세월이 지난 현재 현대화 교육교수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학생수의 증가로 원래의 실험실을 교실로 개조해 사용하다 보니 실험실이 없는 것은 차치하고 올 9월 입학을 대기하고 있는 신입생들을 모두 수용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400여명이 넘는 학생들이 운동하기엔 운동장이 너무 작은 실정이다. 이에 대비해 학교 지도부는 수차 시정부와 시교육국에 정황을 회보하고 학교 신축을 요구, 해당부문에서도 빠른 시일 내 해결하겠다고 답복은 하면서도 오늘까지도 해결이 되지 않고 있다.

 

다음으로 교사대오문제다. 현재 대련시조선족학교는 정식 편제는 45명이나 턱부족이다. 실제로 교수제1선에서 사업하고 있는 교원은 55명으로 초과된 10명의 로임 등 대우는 학교에서 자체로 해결해야 하는 실정이다. 다행히 시교육국에서 교원 초빙의 문은 열어놓고 있으나 초빙교원 학력 석사 이상, 1명 초빙에 3명 이상 신청 등 문턱이 너무 높아 실시에 객관적 어려움이 따르고 있는 것이 아쉬움이다.

 

근년래 대련시조선족학교는 선후로 료녕성과 대련시의 문명학교, 전국조선족창신교육실험연구선진학교, 료녕성민족단결선진모범집체, 료녕성민족언어교육선진집체, 유엔세계보건기구에서 수여한 건강교육금메달학교, 대련시 10 대최우수학교, 대련시외국학생접수지정학교 등 영예를 수여받으며 대련의 정치, 경제, 문화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여왔다.  

 

김창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