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영 기자] 지난 6월 심양시조선족문화예술관은 남풍극장에서 문예공연을 진행하였다. 소수민족교향악단의 교향악 《아리랑》으로 막을 연 공연은 우리 민족 특색이 짙은 문예종목으로 장내를 시종 뜨겁게 장식했다. 공연이 끝난 후 기자는 심양시조선족문화예술관 박석호 관장을 만나 인터뷰를 하였다.
박석호 관장은 “이번 공연은 늘어나는 시민들의 문화수요를 만족시키고 우리 민족의 우수한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기 위한 취지에서 조직했다. 이번 공연에 문화관의 무용대와 소속 예술단을 주축으로 심양 소재 각 조선족중소학교의 무용대와 문화지원자들을 동원했다. 예기의 목적에 도달해 기쁘다”고 심중을 토하고 “관장에 부임한지 1년여 밖에 안된다. 이번 공연의 성공은 상기 참가단체와 전체 관원들의 노력과 갈라놓을 수 없다.”면서 지난 1년간의 문화관 사업상황을 상세히 소개했다.
지난 1년간의 사업성과에 대해 박석호 관장은 전임 최무삼 관장의 사업선상에서 이룩한 것이라면서 전임 관장에 진심으로 되는 감사를 표했다. 그에 따르면 심양시조선족문화예술관의 특색사업은 아래의 몇가지가 있다. 심양시민위, 심양시문광국에서 주최하고 심양시조선족문화예술관에서 주관한 ‘심양시소수민족새해맞이교향악음악회’가 첫째다. 심양시위 선전부, 심양시문광국에서 주최하고 심양시조선족문화예술관에서 주관한 ‘아름다운 심양풍- 보름명절야회''가 그 다음이다.
박석호 관장은 지난해 심양시조선족문화예술관이 심양시문광국, 심양시민위, 화평구정부에서 주최한 소수민족문화계렬활동을 가동시킨 것을 특별히 꼽았다. 가동식에서 교향악, 민족가무, 아동무용 등 각 민족의 15개 대표종목을 전시, 관중들에게 농후한 민족풍정을 선물하였다. 이번 계렬행사는 심양시소수민족무용시합, 심양시소수민족악기시합, 시버족이리무변253주년문화계렬활동, 심양시조선족예술전시활동, 심양시회족문화절, 심양시만족문화절,심양시민족예술단 민족지구 순회공연 등 8개 대형행사가 포함됐다. 또한 ‘행복한 심양’ 군중문화광장계렬활동은 1,000명으로 구성된 광장무용전시공연, 민족무용순회공연, 종합문예야회 등 6개 대형행사가 포함됐다.
문화활동 방면에서 심양시조선족문화예술관은 지난 한해 전시 200여명 중소학생들이 참가한 료녕성조선족청소년문화예술절활동, 150여명 선수들이 참가한 심양시조선족보름명절윷놀이시합, 료녕성조선족미술작품전시회, 제15기 료녕성조선족장기시합, 심양시조선족카라OK시합, 료녕성조선족촬영미술서법전시회 등을 조직, 진행했으며 한국 대구시예술가협회와 공동으로 ‘중한문화교류공연’을 진행하였다.
박석호 관장은 지난해 관장에 부임하자 바람으로 원만한 사업 전개를 위해 문화관의 지나온 력사를 다방면으로 료해했다.
그에 따르면 심양이 해방된 후 심양시정부는 조선족들의 문화활동을 아주 중요시했다. 료심전역승리 후 심양시정부에서는 김신종, 리인본, 리순, 김로한, 박근산, 송일평 등을 파견하여 조선족문화관의 설립을 추진했었다.
1949년 6월 심양시정부의 관심과 시민정국 민족과의 지도하에 정식적인 준비사업을 시작해 1949년 11월 8일 전국에서 제일 첫번째로 되는 시급 조선족문화관을 설립하였다. 당시의 이름은 심양시조선족인민문화관이였다.
초창기 문화관은 사무실 한칸과 회의실 한칸이 있는 300평방메터의 낡은 집에 5명의 관원이 있었다. 10년 지난 1959년 정부와 각계 조선족들의 열정적인 지지하에 낡은 집을 헐고 1,100평방메터에 달하는 새로운 문화관청사를 지었으며 관원이 40여명에 달했다. 1988년 심양시정부에서는 170만원을 투자하여 심양시 화평구 시부대로124호에 새로 문화관청사를 짓고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5층으로 된 문화관 청사는 건축면적이 2,772 평방메터이고 문예활동부, 문예훈련양성부, 미술촬영부, 도서관부, 행정사무부와 당위사무실 등 6개 부문이 있다. 현재 관원은 19명이다. 그 사이 심양시조선족문화예술관은 과급을 거쳐 정처급단위로 격상하고 국가문화부로부터 국가2급문화관으로 명명되였으며 료녕성문화청으로부터 료녕성1급문화관 칭호를 수여받았다.
70여년간 심양시조선족문화예술관은 심양시조선족들의 문화예술활동의 중심이 되여 무용,성악, 악기, 미술, 촬영, 창작 등 각종 학습훈련반을 통해 조선족업여문예골간들을 양성하였으며 료심대지에 튼튼한 조선족군중문화예술의 기초를 닦아놓았다. 선후로 《군중문예》, 《서탑》, 《료동문학》 등 문학잡지를 출판, 발행해 료녕조선족문단의 성장과 발전에 활력소를 넣어주고 옥토를 제공하였다.
《군중문예》, 《서탑》, 《료동문학》 등 문학잡지에 관해서는 원로문화사업일군인 전룡화선생이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소개에 따르면 심양시조선족문화예술관은 알게 모르게 료녕문단의 형성과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1957년 반우파투쟁때 신명철(申明澈)씨가 관장자리를 내놓고 박병조(朴炳祚)씨가 새 관장으로 부임되여 왔다. 당시 특수한 사회환경으로 말미암아 잠시 중단되였던 군중문예사업은 1958년 서영화씨가 문예조를 책임지면서 활기를 띠기 시작, 번갈아가며 가곡, 가사, 성악, 장고, 사교무 등 학습반을 조직하였으며 대외로 널리 원고를 모집하여 1959년에 난생 처음으로 《군중창작집》 책자 제1호를 내놓았다.
1959년 9월에 새 관사가 락성되여 제집, 제 구락부에서 일하게 되니 더욱 열성이 높았다. 당시 문화관에서는 순회공연을 자주 조직했는데 조선족군중들의 구미에 맞는 공연자료를 구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하여 문화관에서는 《군중창작집》의 기초에서 《연창재료》의 편집를 시작하였다. 1959년 11월 《연창재료》제1기를 펴내고 한달후인 12월에 제2기를 펴냈으며 그후부터 해마다 4기씩 펴내기로 하였다. 당시의 《군중창작집》이나 《연창재료》가 등사본이긴 했지만 각 학교와 단위, 조선족 마을에 매기 500여권씩 발행되며 료녕성의 문화활동과 문학발전에 적지 않은 추동작용을 하였다.
10년 동란시기 심양시조선족문화관은 문을 닫다싶이 하였다가 1978년에야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료녕대학의 교수이며 민간문학 전문가인 우병안(몽고족)씨를 모셔다 소수민족문학사에 대한 강좌를 조직하고 당시 시공청단서기였던 손명산(후에 문화국 국장으로 전근됨)씨를 초청하여 당면 문학의 발전추세에 대한 강의도 들었다. 그리고 업여작가들과의 더욱 밀접한 접촉을 위해 료녕문학계 원로이신 료녕민족출판사 김창대선생의 창작담도 청취했다. 이렇게 노력한 결과 적잖은 성과작들이 나왔는데 그중 《우리네 부업공장》(류광순 사, 리종우 곡)과 《농업기계화 좋을시구》(전룡화 사, 서영화 곡) 등 두 작품이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30주년 기념선집에 수록되였으며 1982년에는 서영화와 최준이 수집정리한 《민요곡집》이 료녕출판사에서 출판되였다.
1981년 연변텔례비죤방송국에서 심양에 와서 료녕지구 작가들이 창작한 노래를 록음하였는데 박화, 리창인, 정철, 렴광현, 정광, 김재현, 전룡화, 김명근, 서정화 등 시인, 작가들이 창작한 노래 30여수를 록음하였다.
1980년 심양시조선족문화관 김영생 관장은 《연창재료》의 기초에서 우리 말 잡지를 꾸려야 할 필요성과 실효성을 수차 유관부문에 반영하고 쟁취하여 끝내 내부간행물로 《군중문예》를 발간하는 비준(《 文 字》 제3호)를 받았다.
《군중문예》는 초창기 문화관에 편집이 없어 료녕민족출판사 조문편역실의 박화, 감창대, 정철 등 분들의 지원으로 제3기까지 꾸려졌다. 1983년 변시홍 관장이 부임되면서 《군중문예》의 편집를 지금처럼 지원받는것이 장구지책이 아니라면서 자체힘으로 편집할 것을 주장, 자신이 직접 총편집을 맡고 전룡화를 편집실 주임으로, 서정화를 책임편집으로 편집진을 무었다. 그후 선후하여 김명학, 황상호, 조정호, 오명림이 편집으로 있었다.
《군중문예》는 제1기가 출간된 이듬해 2기를 출간하고 그 다음해부터 3기씩 출간하다가 1985년에는 계간으로 고정시켰다.
1986년 심양시조선족문화관 지도부는 관사가 서탑지역에 있고 또 서탑이 국내 조선족들에게는 물론 해외에도 널리 알려진 점을 고려하여 잡지 이름을 《서탑》으로 개칭했다. 《서탑》잡지가 심양지역 학생들의 작문수준을 제고시키기 위해 학생작문란을 특별하게 설치한 것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부분이다.
1987년 심양시조선족문화관은 《서탑》잡지의 질적향상을 위해 과외작가대오를 묶어세울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민간단체인 심양시조선족문학회를 설립하기로 결정하고 편집부와 박성군씨가 수차 유관부문으로 다니며 노력한 결과 그해 9월에 설립 비준을 받고 11월 21일 황고구주강가조선족소학교에서 성대한 설립대회를 가졌다.
1997년 내부간행물 정돈에 대한 유관부문의 정신에 따라 옹근 18년동안 58기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서탑》의 페간으로 원지를 잃었던 작가들은 4년이 지난 2001년 심양시조선족문화관과 박성군씨의 노력으로《료동문학》책자를 1년에 2기씩 펴냄으로써 자기의 창작원지를 되찾게 되였다.
박석호 관장에 따르면 심양시조선족문화예술관은 국제무대에서도 여러 방면으로 활약상을 보여왔다. 선후로 한국 30여개 문화 술단체들과 문화예술교류를 진행하였으며 한국세종예술음악협회, 한국춘천예술총련합회와 정기적인 문화예술교류를 진행하고 있으며 한국해군군악단, 한국성남시립교향악단, 한국녀자관악단 등을 심양시에 초청하여 공연을 진행하였다. 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문화교류를 적극 진행해 선후로 조선민예련합총협회, 만수대미술창작사, 조선대동강미술교류사와 합작해 조선미술촬영작품 및 공예품전시회를 조직하였으며 심양시조선족문화예술관의 가수와 무용수들은 여러차 조선의 각종 문예콩클에 참가해 우의와 교류를 증진하고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심양시조선족문화예술관은 각종 국제,국내(성급이상) 문예콩클에서 1,500여차나 수상을 하였으며 심양시조선족문화예술관의 배우들은 지난 세기 50년대와 60년대 전국소수민족문예공연에 참가해 모주석, 주은래, 등소평의 접견을 받기도 하였다.
심양시조선족문화예술관은 국가민위에서 지정한 전국민족문화사업련락지점의 하나이기도 하다.
박석호 관장은 향후의 사업방향에 대해서도 이렇게 언급했다. 중심사업은 문화관 산하 각 단체건설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심양시소수민족교향악단과 심양시조선족기류협회의 발전을 물심량면으로 지지하는 한편 산하 15개 민간예술단체에 대한 예술지도를 강화하는 것이 주요 사업이다. 또한 《심양조선족지》의 편찬사업을 차질없이 밀고나가고 올해 있게 될 ‘제1기 심양.전국조선족민속절’ 활동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힘다하겠다고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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