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효동
몽골족 집거촌인 부신몽골자치현 대판진 대판촌은 과거 빈곤과 락후의 나락에서 계속 몸부림쳤다. 하지만 전 성 빈곤촌, 경제박약촌이자 당조직이 느슨했던 이 마을은 현재 당 건설이 튼튼하고 경제력이 강하며 촌민이 부유한 촌으로 탈바꿈했다. 변화는 언제부터 생겼는가? 료녕성민족종교사무위원회 종교1처 류효동 부처장이 지난 2017년 8월, 료녕성 부신몽골족자치현 대판진 대판촌에서 주재하면서부터다.
“나는 농민의 아들이다. 지금의 성적을 거두기까지 당과 인민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대판촌을 ‘고향’으로 생각하고 대판촌 건설에 모든 지혜와 힘을 다할 것이다.” 류효동의 소박한 언어와 꾸밈없는 모습에는 ‘적자지심(赤子之心)’이 그대로 담겨져 있었다.
당지부 건설 강하게
촌부는 낡고 허름하고, 촌지도부 성원간 갈등은 깊고, 당원대오는 응집력이 부족하고... 류효동에게 놓여진 난제들이다. “탈빈곤 난관공략, 향촌진흥은 절대 혼자 실현할 수 없고 개인의 능력이 아무리 강해도 제한성이 있기에 우리 모두 힘을 합쳐야 목표를 실현할 수 있다.”
기초시설부터 틀어쥔 류효동은 촌부 개조부터 시작했다. 현대화 사무설비 증설에서 포장도로, 록화, 조명시설, 그리고 당건장랑(党建长廊) 건설... 드디여 반년후 멀티기능을 일체화한 표준화 당군중써비스센터가 마을에 일떠섰다. 따라서 군중들에게는 일처리를 할 곳이, 당원들에게는 활동진지가, 촌지도부에게는 근무할 장소가 생겼다.
촌‘량위(촌당지부위원회와 촌민위원회)’ 지도부 성원간의 모순이 많고 내부소모가 엄중한 문제에 대해 류효동은 촌지도부를 협조해 일하기 싫어하고, 일할 줄 모르는 문제를 조사, 분석, 정리해냈다. 촌‘량위’ 지도부, 촌당소조 조장부터 일일이 찾아 담화하고 촌당지부 당원간부들을 조직하여 선진지역을 찾아 고찰 학습하면서 사상전변을 추진했다. 당건 사업계획, ‘4의1심2공개(촌당조직 제의, 촌‘량위’회 상의, 촌당원대회 심의, 촌민대표회의 혹은 촌민회의 결의; 향진 당위, 정부 심사; 실행결의 공개, 실시결과 공개)’, 중대사항 집단결정, 우수선진 평가, 당원지원자 써비스 등 10여가지 제도를 제정 보완하여 교육, 인도, 감화(感化)하면서 모순을 해결하고 민심을 응집시켰다. 현재의 대판촌 당지부 서기, 촌민위원회 주임 류복성을 위시한 촌지도부 6명 성원은 선입견을 버리고 촌민들을 이끌어 틸빈치부에 힘과 지혜를 모으고 있다. 대판촌 당지부는 과거의 ‘문제’지부에서 전 현의 선진당지부로 탈바꿈했다.
집단경제 수익을 무에서 유로
류효동이 촌주재 간부로 임명된 후 두번째로 마음을 먹은 일이 바로 촌집체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이였다. 집단경제가 발전하지 못하면 촌민들에게 필요한 써비스는커녕 촌간부의 로임조차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였다.
류효동은 성기관 간부에서 ‘항목전문가’로 변신했는데 4년간 대판촌을 위해 22가지 항목을 유치했다. 120킬로와트 태양광 발전 항목을 쟁취할 때다. 처음에는 누구도 성공을 예측하지 못했고 더구나 부지문제에 부딪쳤을 때 촌민들은 ‘토지에 농작물을 심으면 더 좋다. 발전은 수입이 없다’라는 생각에 리해를 못했다. 류효동은 매 가정을 방문해 “태양광은 ‘도시사람이 양로보험에 가입’한 것과 같다. 장기적이고 안정적으로 효익을 얻을 수 있다”고 일일이 설명해주었다. 그는 빈곤부축·민위·발개위(发改委)·전력 등 여러 부문과 련계하고 계획을 수정하고 수속을 밟는다 하며 도시와 농촌 사이를 수없이 오갔다. 그의 인내력과 강한 추진력으로 끝내 촌에 태양광항목을 락착시켜 매년 10만원의 안정적인 촌집단경제 수익이 확보됐다.
첫걸음을 내디디니 두번째 걸음은 어렵지 않았다. 류효동은 촌조 간부들을 이끌고 사상이 뒤떨어진 가정부터 설득하여 촌민들의 광범한 지지를 얻었는데 7개 토지구역의 약 1,000무 땅을 류전하여 촌집단항목을 하나하나 락착했다. 그는 사비를 털어 촌민들이 고추를 실험 재배하도록 했고, 당원치부선도자를 지지해 부몽현 ‘민족일가친(民族一家亲)’ 전문재배합작사를 설립하도록 했다. 빈곤호들에게 정기적으로 수익을 배당해줄 뿐만 아니라 매년 촌집단 경제수입을 2.5만원이나 올렸다. 농기계합작사는 촌민들에게 저렴한 가격에 우수한 써비스를 제공했고 매년 촌집단 경제수입을 0.8만원 올렸다. 빈곤부축자금 100만원을 쟁취하여 당원치부선도자가 식용소사육(肉牛养殖) 항목을 하도록 했고 1,000평방미터의 사육장을 건설해 매년 8만원의 촌집단 경제수입을 올리게 했다. 올해초, 류효동은 방역을 틀어쥐는 동시에 생산회복도 틀어쥐였는바 유기 검정목이버섯 전원종합체 항목, 100무 감자재배 항목을 유치하여 대판촌 경제발전에 또 한번 활력을 주입했다. 현재 대판촌 집단경제는 매년 20만원의 안정적인 수입을 거두고 있으며 2021년말에는 40만원에 달할 전망이다.
빈곤호들이 가난에서 부유로
류효동은 100호, 229명의 빈곤등록 인구의 실정에 근거하여 가정 단위로 다원화로 집단경제 성장과 동시에 군중들의 지갑도 두둑해지게 했다.
재배구조가 단일하고 토지수익이 낮은 현황을 감안해 류효동은 31호 촌민, 11호 빈곤호를 대상으로 사상교육을 하고 토지류전, 빈곤부축자금 투자 등 형식으로 이들을 고추, 감자, 가지, 파 등 200무 고효률 재배항목에 가입시켜 무당 1,500원 이상의 수입을 얻도록 함으로써 마을의 산업구조를 조정하고 빈곤가정 100가구의 수입을 증가했다. 동시에 그는 부신화윤(和润)생물과학기술유한회사의 치커리(菊苣) 항목을 유치해 ‘기업+기지+농호+제품’ 모식으로 기업이 생산-관리-판매-회수가공 원스톱 써비스를 제공하게 함으로써 무당 1,500원 이상의 순수입으로 17호 촌민들이 치부길에 들어서게 하였다. 대판촌 촌민들에게 고효률 재배품종과 치부증수에서 또 하나의 선택이 생겼는가 하면 부신화윤생물기술유한회사는 에너지 전환 및 효률 제고의 효과에 치커리차, 이눌린(菊粉), 치커리전병, 치커리월병 등 계렬제품으로 시장의 호평을 받았다.
류효동은 가정마다 빈곤에서 벗어나게 하는데 주력했다. 매개 빈곤호에게 3개 이상의 산업항목을 지원하여 빈곤인구들이 년평균 1,000원 이상의 수입을 증가하도록 추진했다. 그는 또 도움이 필요한 곳에 즉시 조치를 취했는바 재배호, 양식호, 료식업 경영호에게 기술자문, 고객유치, 제품홍보 등 써비스를 제공했다. 전염병 발생기간, 류효동은 전자상거래 플랫폼과 지인을 통해 촌민과 빈곤호를 도와 7만여원 가치의 재고 농산품을 판매했다.
류효동은 또 잉여인력이 아주 많은 대판촌 현황에 비춰 인력을 리용한 치부방법도 생각해냈다. 빈곤촌민 손봉진에게 일자리를 소개해주려 하자 손봉진은 “일은 할 수 있지만 고향을 멀리 떠날 수 없어요. 집에는 보살펴야 할 로인과 어린이가 있고 농사일을 해야 해요. 로임도 너무 낮아서는 안돼고요. 이러한 표준으로 어느 기업에서 나를 채용하겠어요?”라고 말했다. 류효동은 조사연구를 거쳐 적지 않은 잉여인력이 같은 상황에 처해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이들의 4가지 요구를 만족시키려면 오직 기업을 농촌으로 옮기는 수 밖에 없었다. 어떻게 기업을 농촌으로 옮길가? 그는 고민끝에 심양, 대련 등지를 전전하며 기업들과 상담을 하여 의류가공, 장갑가공, 수공품제작 등 일거리를 대판촌의 빈곤부축가공장에 유치했다. 그리하여 촌민들은 가공장에 출퇴근하거나 집에서 근무할 수 있게 됐다. 기술을 모르는 촌민들에게는 무료로 집중훈련을 진행했다. 이렇게 한패의 촌민이 농업생산, 가정돌봄, 부업 등 3가지 일에 영향주지 않는 상황에서 매달 500원 이상의 수입을 보태게 됐다. 류효동은 빈곤호를 촌집단 산업항목에 투입하도록 하여 연인수 5,000명의 일자리를 해결했다. 그는 진촌(镇村) 환경위생정돈 공익일자리를 만들어 로동능력이 있는 빈곤인구의 취업을 도왔다.
빈곤촌민 정옥곤과 석보권은 사육업으로 각각 순수입 1만 3,400원과 1만 1,700원을 올렸고, 빈곤촌민 로중화는 사육과 다른 일을 하며 년평균 순수입을 1.9만원 남짓 올렸다. 현재 대판촌 빈곤등록인구의 인당 년평균 순수입은 1만 2,700원 이상으로 2016년의 4배를 기록, 대판촌 촌민들은 생활의 달콤함을 맛보았고 초요사회로 나아가는 희망을 보았다.
촌민들의 행복지수를 낮은 데서 높은 데로
모든 일은 인민들을 위하고 인민들이 행복감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 류효동의 가장 큰 추구이다.
대판촌은 도로가 큰 문제였다. 류효동은 촌주재사업팀을 이끌고 민위·교통·국토 등 부문과 적극 련계하여 300여만원의 자금을 조달받아 대판촌 도로를 수리하고 밭길을 냄으로써 촌민들의 출행과 농산품 운송에 편리를 제공했다. 85세 로당원 왕숙금은 몽골어로 “과거 개인 날엔 흙투성이, 비온 날엔 진흙투성이로 도로가 엉만진창이였는데 지금은 평탄한 아스팔트길로 되였어요. 생전에 이런 길을 걸을 수 있어 너무 행복해요. 류대장처럼 훌륭한 간부를 파견해준 공산당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대판촌은 대판진의 중심마을이다. 류효동은 마을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대판진의 발전에도 이바지했다. 대판진의 몽골족특색마을 개조에 도움이 필요하자 류효동은 주동적으로 400여만원의 자금을 쟁취해 3킬로미터 도로의 경화, 록화, 량화(亮化)를 완성시켰고 4A급 풍경구인 해당산(海棠山)에 패루(牌楼)를 건설하는 등 민족요소도 추가하여 대판진의 품위를 제고한 동시에 마을의 모습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마을에 문화장소가 없었는데 류효동은 20여만원의 자금을 쟁취하여 대판촌에 민족문화광장, 민족단결운동광장을 건설하여 촌민들의 여가생활을 풍부히 했다. 촌 양걸팀, 에어로빅팀도 조직하여 향촌문화생활을 풍부히 해주었는바 촌민들이 마작판에서 벗어나 문예 달인으로 되게 했다.
그는 대판진 당위, 정부를 협조하여 700만원의 자금을 쟁취하여 수도물공장을 건설해 음용수문제를 해결했다. 촌민들이 상수도관을 설치해 안심한 수도물을 마실 수 있도록 하였으며 빈곤호들에게 무료로 상수도를 설치해주고 일반 농호가정에게 200원의 설치 보조금을 지급하는 등 여러가지 혜택정책을 폈다.
이외에도 만 80세 이상 로인에게는 인당 매년 장수보조금 200원씩, 본과대학에 입학한 학생에게는 인당 300원의 조학금을 지급하는 등으로 촌민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
류효동은 시종 ‘고향’과 인민을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실제행동으로 자신의 약속을 리행했다. 대판촌 촌민들은 가난한 우리 마을에 “복덩이”가 날아왔다며 행복한 웃음꽃을 피우고 있다.
내용: 료녕성민족종교사무위원회 제공
정리: 백일정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