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선교사ㅣ"몸이 허락할 때까지 담임을 맡을 것"
发布时间:20-12-11 03:32  发布人:金卓    关键词:   

 

심북신구조선족학교 배연홍 교사

 

[백일정 기자] 어릴 적 어떠한 물음에도 척척 대답하는 선생님이 너무 위대하고 존경스러웠다는 배연홍(1976년생) 교사는 1996년, 료녕성조선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꿈에 그리던 자신의 교사생애를 시작했다.

 

배연홍 교사의 첫 근무지는 석불사향 립신촌조선족학교다. 2001년도 흥륭태향 조선족중심소학교로 전근하였다가 학생 수가 점차 줄어듬에 따라 2002년도 9년일관제 심북신구조선족학교가 세워지면서 현재까지 줄곧 그곳에서  1선교학을 담당하고 있다.

 

교학 초기에는 고학년 담임을 자주 맡았다. 매 학년마다 학생들의 상황 또한 다르기 때문에 그는 문제발생시 스스로 부딪쳐야 진정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하여 유치원부터 6학년까지 아이들의 담임을 해보고 싶다며 학교 지도부에 스스로 신청했다. 하얀 백지장 같은 아이들이 자신의 보살핌과 가르침 하에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고 이와 동시에 처한 상황이 다름에 따라 해결방법 또한 다르다는 점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그 때의 뜻깊은 경력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장기간 한 반급을 맡던 기간 다른 반급을 맡아주었으면 하는 학교 지도부의 제안을 받은 적 있다. 하지만 자신이 심혈을 기울이고 자신의 손때가 묻은 반급을 포기하기란 여간 쉽지 않았다. 그리하여 배연홍 교사는 한동안 두 반급의 담임을 겸하기도 했다.

 

담임을 맡은 초기에는 넘치는 열정으로 더욱 많은 지식을 전수하기 위해 교수내용을 가득 준비했고 학교에서 진행하는 공개과 수업에도 적극 참여하면서 로교사들의 조언을 구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배연홍 교사는 한가지를 깨달았다. 얼마를 배워주는가에 욕심을 부리지 말고 어떻게 가르치는가에 신경을 쓸 것, 수업을 할 때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춰 수업해야만 그 효과가 배에 달하는 것을 느끼게 되였다.

 

배연홍 교사가 고안해낸 방법은 '실천'이다. 열번의 강의보다 한번의 실천이 낫다고 여긴 그는 직관연시와 실천조작을 진행했다. 계절 관련 수업이면 직접 교실을 벗어나 대자연 속에서 각 계절의 특점에 매력을 느끼게 하였고 지식점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직접 교구를 리용해 그 속에서 지식점을 터득할 수 있도록 했다. "아이들이 직접 만들고 느끼는 것이 가르치는 것보다 효과가 더욱 좋아서 지금까지도 이러한 교수방법을 적용하고 있답니다."

 

교학외에도 학생들의 심신건강 또한 담임으로서 책임져야 할 부분이다. 배연홍 교사는 매 한기의 학생들을 맡을 때 마다 꼭 하나쯤은 ‘아픈손가락’이 있었다고 말한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학생은 남아선호사상이 짙은 가정에서 태여난 녀자아이였다. 엄마 대신 가정부의 보살핌 아래에서 자랐기에 자립심이 무척이나 강했다. 배연홍 교사 역시 자식을 둔 엄마였기에 녀학생의 모습에 마음이 더 아파서 도움의 손길을 자주 건넸다. 녀학생과의 인연이 깊었던 탓일가. 졸업시킨 후 다시 맡은 반급에는 그 녀학생의 남동생이 있었다. 남동생은 모든 교사들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 정도의 말썽꾸러기였다. 가정상황을 몰랐던 초기에는 남동생의 공부를 부탁하기도 했었지만 누나에게 함부러 대하는 모습과 아들만 챙기는 부모의 모습에 배연홍 교사는 어떻게든 녀학생의 어깨의 짐을 덜어주고 싶었다고 털어놓았다. "앞으로 너 걱정만 해. 동생의 공부는 선생님이 책임질테니"라고 말해주었고 시간을 쪼개여 남동생의 공부를 지도해주었다. 초중에 진학한 녀학생은 미안한 마음에 한동안 자신을 피해 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의 진심이 전달되였는지 가끔 만나면 자신의 가슴팍에 폭 안긴다면서 그 때마다 배연홍 교사는 더욱 힘껏 안아준다고 했다.

 

자신의 24년 교학의 길을 되짚어본 배연홍 교사는 "힘들고 고달팠지만 매일 커가는 아이들과 마주할 수 있어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그렇게 아이들을 좋아하는 그였지만 성대에 문제가 생긴 탓에 2년간 아이들을 마주할 수 없게 된 기간이 있었다.

 

"수술을 해야 한다고 처음 들었을 때 드는 생각은 ‘아… 더이상 교사를 못하게 되는 건 아닐가’였다. 너무 두려웠다."

 

이토록 교사생활을 사랑하는 그는 퇴직할 때까지, 자신의 몸이 허락되는 날까지 학생들과 함께 하는 담임을 맡을 것이라고 전했다.

 

심양시조선족교육협회 협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