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친정길
发布时间:20-09-21 08:45  发布人:金卓    关键词:   

수필

친정길

    (심양) 심용숙

  시집간 녀성에게 있어서 친정길은 과연 어떤 길일가? 가슴 설레는 그리움의 길? 아님 마음 편안한 여유의 길?

  오늘도 나는 덜컹거리는 완행렬차를 타고 친정으로 향한다. 분비는 공간, 혼탁한 공기, 비좁은 자리에 끼여 멍하니 스치는 창밖만 주시한다. 대지는 첫눈이 내린 뒤라 흰눈으로 장식되여 있다. 가끔 시끄무레한 콘크리트건물들이 눈앞을 가로막는 가운데 자연은 하얀 세계로 활기를 띠고 있었다. 깨끗한 눈, 자연을 정화시켜주는 눈, 그토록 고대하던 첫눈의 왕림이건만 반가움과 설렘도 잠시 이젠 어디선가 서늘한 기운이 느껴진다. 내 몸은 추운 겨울이라는 계절과 함께 차디찬 눈의 이미지에 따라 점점 시려나기만 했다.

  구십고령을 바라보며 현재 앓고 계시는 엄마, 얼마나 편찮으셨으면 엄마 고집에도 입원까지 하고 계실가. 만년의 고통스러움과 세월의 무상함에 막무가내임을 절감하면서 나는 아픔과 그 어떤 두려움에 점점 떨고 있다.

  친정길은 구경 어디까지일가? 가슴이 먹먹해오면서 눈물이 차오른다. 나의 친정길은 어느 때부터였을가. 아련한 추억이 떠오른다.

  90년대초 가난한 집에 시집을 간 나는 새색시의 첫 삼일날에 시댁친척들의 바램을 받으며 역전에 도착한 후 마을 뻐스를 타고 친정에 갈 수 있었으련만 남편의 권유도 마다하고 한사코 칠리길을 두 걸음으로 택했다. 때는 정월이라 대지는 펑펑 내린 흰눈으로 두터운 이불을 덮어쓰고 있었다. 무연한 들판, 앙상한 나무들이 길을 지켰지만 청신한 공기, 춥지 않은 날씨, 엄마품으로 향하는 내 마음은 붕 뜨기만 했다. 대문에 들어서기 바쁘게 엄마 하고 소리 치며 문을 떼고 들어서니 엄마가 눈이 둥그래서 하던 일을 멈추고 나를 보고 계셨다.

  "뭘 타고 왔니? 차가 없던?"

  "천천히 걸어 왔어. 겸사겸사 해서."

  "첫 친정길인데... 그 먼 길을 터벅터벅 걸어와?"

  엄마는 몹시 서운해하는 눈치셨다. 썩 후에야 나는 녀자들의 첫 친정걸음이 힘들면 그후의 시집살이가 쭉 고되다는 말이 있음을 알게 되였다. 그때 엄만 철 없는 이 딸, 딸의 앞날을 두고 얼마나 속상해 했으며 걱정하셨을가.

  그후 교육사업에 종사하면서 나는 함수공부를 하게 되였다. 쥐꼬리만한 월급이라 고소비의 연길에 가서 한달간 주숙하며 공부하려면 큰 목돈이 수요되였다. 녀자들이 가장 아쉬울 땐 친정이 떠오르는가. 나는 울며 겨자먹기로 친정에 발길을 돌렸다.

  "엄마, 나 연변에 공부하러 가야 하는데 돈 좀..."

  "얼마?"하며 엄마는 인차 장농을 열고 서랍에서 빨깍빨깍하는 백원짜리 넉장을 꺼내셨다. 아껴 먹고 아껴 모으신 돈, 나는 월급이 나오면 갚을게 하며 석장을 들고 문을 나섰다. 흐르는 눈물이 앞을 가리웠다. 역전으로 향하는 그 칠리길은 그야말로 속눈물의 길, 다짐의 길, 목 메임의 길이였다.

  90 년대 중반 하루 친정에 놀러 가니 아버지의 면상이 엉망이셨다. 덮게덮게 덕지가 붙어있었다. 팔과 다리에도 여기저기 고약을 붙이고 계셨다. 나는 웬 일이냐고 물었다. 엄마의 말이 령감 로망을 해서 자전거 타고 현성을 다녀오던 중 내리막길에서 넘어졌다는 것이였다. 나는 믿음이 가지 않았다. 아버진 마을에서도 자전거 제일 잘 타는 분이 아니신가? 백오십키로나 되는 청원까지도 하루 새에 갔다오시지 않았는가. 나는 엄마한테 따지고 들었다. 엄마는 사위 돈 마련해준다고 오십리길 현성으로 자전거에 쌀 이백근씩 싣고 련 며칠 내다 팔았는데 그날은 마지막으로 저녁 늦게 돌아오면서 내리막길에서 그만 큰 차를 피하느라 구렁텅이에 박혔다는 것이였다. 나는 가슴이 꺽 막힌채 할 말을 잃었다. 돈이 무엇이라고 친정 아버지까지 이렇게 고생시키고 목숨까지 위태롭게 만들다니!

  90년대초 시고모의 첫 한국방문길을 이어 둘째가 부모님 모시고 많은 고생 했다며 한국에 계시는 시큰아버님이 시아버님을 초청하는 덕에 남편은 아버지를 모시고 향항을 경유해 한국 땅을 밟게 되였다. 석달기한 뿐이라 가는 걸음에 차비라도 뽑겠다며 록용이요 웅담이요 청심환이요 이것저것 큰 돈을 들여가며 산 같은 보따리를 끌고 떠났다. 하지만 한달후 중국에서 펼쳐진 대회가 폐막되면서 한국인들이 대량으로 중국물품을 사서 귀국하는 바람에 약 팔아 목돈 쥐려던 꿈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남은 약을 친척에게 넘기고 기일이 되여 돌아온 남편은 빚을 짊어지게 되였다. 빚이란 물건은 괴물과 같아 육신을 고달프게 하고 생활을 암담하게 했다.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애면글면 애 쓰던 중 남편은 일본수속을 밟게 되였다. 이만원이란 선불금을 마련하기 위해 나는 부득이 또 친정에 손을 내밀게 되였다. 엄마는 돼지 두마리 판 돈에 그동안 아낀 생활비며 아버지가 현성에 가서 쌀 판 돈까지 합쳐 큰 돈을 가져오셨다. 하지만 그 선불금도 결국 사기를 당하고 일본출국길은 물 건너간 격이 되고 말았다. 눈앞 캄캄한 날 "얘야, 날아가는 돈 잡으려 하지 말고 본분 맞게 살거라. 현실에 안착하여 하루하루 착실하게 사는 삶이 가장 안정한 삶이란다." 젊은 패기에 아버지의 말씀이 큰 달통이 되지는 않았지만 그 가르침대로 살기로 마음 먹었다. 온당한 걸음을 걷기로 마음 굳힌 나날이였다.

  아버지의 농군다운 착실함에 엄마의 느긋한 뒤받침에 친정은 비록 잘 살지는 못했지만 속살은 있었다. 명절무렵이면 친정은 늘 부산함으로 들끓었다. 돼지머리며 족발이며 전기풍구 돌려놓고 지지는 그스름내가 뜰안에 진동했고 창고에는 순대, 떡, 강정 먹거리가 큰 독 두세개에 골똑골똑 채워지군 했다. 초이튿날부터 딸 사위들이 줄레줄레 들이닥쳐 엄마집은 대만원을 이루었다. 부모처럼 욕심이 없어서인가? 네 형제들은 한국 간 사람 하나 없이 평범한 일터에서 나름 열심히 살아가며 평온한 나날을 지내고 있었다. 농망기때면 친정에 모여 아버지 개황농사 거두매질 하느라 농사군으로 둔갑했고 겨울철이면 앞뜰에 큰 비닐 깔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손으로 강냉이 까면서 마을에 웃음을 남겨 동네분들의 부러움을 자아냈다.

  아버지가 세상 뜨신 후로 엄마 홀로 친정에 계시자 우리 형제들은 더욱 신경을 쓰게 되였다. 엄마는 자신의 삶의 방식대로 앞채마밭을 열심히 가꾸면서 자식들에게 이것저것 채소를 장만해주시는 즐거움으로 조용한 나날을 보내오셨다. 세월의 흐름에 점점 왜소해가는 엄마, 고독과 외로움이 가끔 묻어나는 친정, 엄마 살아계심에 감사해하며 늘 먼곳도 아랑곳 않고 자주 다니던 친정길이였다.

  그런 친정길이 위태위태하며 엄마가 입원해 계신다.

  엄마한테로 가면 나는 어린 아이가 되는데.

  따뜻한 엄마의 손 꼬옥 잡고 엄마 하는 순간 나는 달콤한 나락으로 빠져드는데.

  대지를 허얗게 덮은 눈, 저 창밖의 눈은 언제 쯤 녹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