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혼가정의 효도며느리
-심양시 흥성촌 박선옥씨
20년 전이다. 심양시 흥륭대진 흥선촌 촌민 박선옥(1966년생)은 부모님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평범한 나날을 보냈다. 시집 갈 나이가 되다보니 혼사를 소개하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찾아왔다.
어느날, 언니의 친구가 찾아왔다. 부인이 병환으로 돌아가고 혼자서 딸내미를 키우는 괜찮은 남자가 있는데 만나보겠냐고 물었다. 만나보니 남자다웠고 마음씨가 착한 사람이였다. 주변의 축복 속에서 1997년 8월, 심양시 우홍구 대흥가두 흥성촌의 전봉화(1962년생)와 결혼식을 올렸다.
시집에는 고령의 시부모와 8살짜리 녀자애가 있었다. 결혼하고 얼마 안지나 그 녀자애까지 데리고와서 키웠다. 시켠 친척인 애 어머니는 암으로 세상 떠났고 아버지는 한국으로 로무를 나갔기에 돌볼 사람이 없었다. 3살도 안되는 애가 너무 안쓰러워 데려온 것이였다.
알콩달콩 신혼생활을 즐기고있는데 기업에 출근하는 남편한테 외지파견 통지가 내려왔다. 시부모를 보살피고 커가는 두 아이(남편 본처의 아이까지)를 키우는 막중한 책임이 모두 박선옥의 어깨에 짊어졌다.
2001년, 시어머니의 건강이 갑자기 악화됐다. 애들을 공부시키면서 2년간 극진히 병시중을 했다. 2003년 3월, 시어머니가 돌아갔고 생의 마지막까지 며느리의 빈틈없는 보살핌을 받았다.
매사에 착실하고 꾸준함이 돋보이는 박선옥은 그후 촌부녀주임으로 되여 촌일을 위해서도 열심히 뛰였다. 2005년 시아버지가 돌연 뇌혈전으로 반신불수가 되였다. 행동능력을 잃은 시아버지를 보니 가슴이 아팠다. 부득불 부녀주임을 그만두었다.
언어능력까지 상실한 시아버지는 의사소통이 안되여 자주 짜증을 부렸다. 처음에는 남몰래 눈물도 많이 흘렸다. 하지만 매일매일 시아버지의 눈빛과 반응을 관찰 분석하며 애쓴 보람으로 지금은 둘도 없는 ‘말벗’으로 될 수 있었다. 목욕과 대소변도 그녀의 도움 없이는 안되였다. 체중이 180여근이나 되는 시아버지의 옷을 갈아입히는 것만 해도 쉬운 일이 아니였다. 게다가 시아버지는 전립선염으로 배뇨장애까지 있어 소변 볼 때마다 뇨도카테너(排尿管)까지 사용해야 했다. 욕실에 가지 못하는 시아버지를 위해 3일에 한번씩 수건으로 온몸을 구석구석 닦아드렸고 수염까지 깎아드렸다.
2010년쯤, 외지에서 사업하는 남편이 드디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남편은 홀몸으로 로인을 시중하면서 애를 키워온 안해를 보는 순간 너무나도 고맙고 미안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돌아온 남편과 함께 시아버지를 모시면서 자식을 키우는 박선옥은 아무리 힘들어도 얼굴에는 항상 밝은 웃음이 떠날줄 몰랐다.
올해 아흔을 넘은 시아버지는 며느리의 극진한 효도로 지금도 불편을 모르고 지내고 있다.
재혼가정의 효도며느리 이야기가 주변에 퍼지면서 찬양소리가 자자했다. 70살이 넘은 시형은 “그동안 마음고생이 많았겠지만 짜증내는 것을 한번도 못봤다. 이처럼 훌륭한 제수씨를 두었다는 것은 가문의 복이다.”고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 박선옥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효도하는 부모의 행동을 직접 보면서 자랐다. 뿐만 아니라 부모는 조카까지 데리고와서 키웠다. 부모님의 솔선수범의 ‘효도교육’이 자식들을 효자효녀로 만든 것이다. 현재 박선옥의 언니도 시집에서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시고 있다고 한다. 최동승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