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긴병에 효자 없다 했던가 -리의정 조경자 부부의 극진한 효성
发布时间:20-07-02 05:10  发布人:金卓    关键词:   

누가 긴병에 효자 없다 했던가

-리의정 조경자 부부의 극진한 효성

  

우리 민족의 속설에 “긴병에 효자가 없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병간호가 힘들다는 말이다. 대련시 금주구에 살고있는 리의운(65세), 조경자(60세)부부는 20여년을 하루와 같이 병환에 계시는 량가부모€뿳?로인을 극진히 모셔 실제행동으로 “긴병에도 효자가 있다”는 아름다움을 실천해 대련시 금주구조선족사회의 미담이 되고있다.

  

  리의운, 조경자 부부는 원래 흑룡강성 목단강시 목단강북방공구공장(국영병기공장)의 직원이였다. 리의운씨는 공장소방대대 대대장(정과장급)이였고 조경자씨는 화험원이였다. 리의운씨는 30세에 소방대 대장이 되여 련속 3년간 목단강시 소방대원 기본기능시합에서 1등을 따내기도 하였고 화재진압에서 용감하게 두려움을 무릅쓰고 불속에 뛰여들어 사람을 구하고 국가재산을 지켜내여 수차나 공로를 세웠으며 시정부로부터 표창을 받기도 한 능력있고 열정이 있으며 사업에 충성하는 멋진 사나이였다. 1995년 공직을 두고 부부가 한국에 가 돈을 벌고 2000년 귀국한후 지금까지 대련시 금주에서 개인사업을 하며 부모님들을 극진히 모셔오고있다.

  

  리의운씨 부부는 한국에서 귀국한후 년로한 부모들이 환경이 아름답고 기후가 좋은 곳에서 1년이라도 더 편히 오래 살도록 하기 위하여 2001년 대련시에 아빠트를 마련하고 동생과 함께 생활하던 부모님을 목단강에서 대련시로 이주시켰다. 리의운씨의 처가집에는 자식이 딸 셋이였는데 리의운씨가 맏사위였다. 리의운씨의 큰처제는 한국에 가있고 막내처제는 심장병에 복수로 자신도 돌보기 힘든 상황이였다. 리의운씨는 2004년 장인장모와 병이 엄중한 막내처제를 돌보기 위하여 자기가 사업하고있는 대련시 금주구에 아빠트를 사고 장인장모와 처제를 목단강에서 금주구로 이주시켰다. 그후 량가 로인들을 모시고 병간호를 하는데 편리를 위하여 대련시내에 있는 리의운씨 부모들이 살던 집을 팔고 리의운씨의 처가집과 같은 층 맞은편의 집을 사서 대련시내에 살던 부모들을 금주로 이주시켰다. 그리고 두집사이의 벽을 허물고 문을 내여 왕래를 편하게 하였으며 리의운부부는 웃층에 집을 사고 거주해 한집아닌 “한가정”이 되였다. 또 량가 부모들방에 원격조종카메라를 장치해 밖에서도 수시로 부모들의 행동을 관찰할수 있도록 하였다.

  

  리의운씨의 부친 리영춘(1933년 생)은 1995년(63세)에 중풍으로 인해 반신불수가 되였다. 2003년에는 부친의 병환이 가중되여 자립능력을 잃고 완전히 자리에 눕게 되였다. 리의운씨의 부친은 장장 21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병환속에서 시달리고 13년간 자리에 누워앓다가 2016년4월(84세)에 세상을 떴다. 리의운씨의 어머니가 계시지만 어머니 라해금(85세)도 년로하고 신체가 약하며 심장병 등 지병이 많아 그들의 보살핌을 떠날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리의운씨의 장인 조중학(1934년생)이 2008년(75세)에 중풍에 걸렸고 2009년에는 신장암에 걸려 한쪽 신장을 절제한데다 2012년에 재발하는 바람에 완전히 자리에 누워 일어날수가 없었다. 장인은 2016년1월(83세)에 세상을 떴다. 리의운씨의 장모 리문단(81세)도 원래 신체가 약하고 고혈압에 심근경색으로 심혈관이 세곳이나 막혀 십여년을 고생해 오고있었다.리의운부부는 어머니를 모시고 2011년 한국까지 가서 진단하고 심장동맥드탠드시술(心 支架,搭 )을 하려고 계획하였지만 고령인데다 신체가 너무 약해 수술을 할수 없다는 병원의 만류로 부득이 그냥 돌아오고말았다.

  

  이와 같이 이 부부가 모시는 량가 부모는 모두 하루도 마음놓을수 없는 중환자들이였다. 그중 두 부친은 자립능력이 없어 밤낮없이 간호해야 했고 두 어머니까지 병중에 있으니 모든 짐은 리의운부부 어깨에 놓이게 되였다. 량가부모들은 60세를 조금 넘어 모두 중병에 걸렸지만 두 부친은 80세를 넘어 세상을 떠났고 두 어머니는 아직도 80여세의 고령으로 살아계신다. 그들을 잘 알고있는 사람들은 리의운부부의 량가부모들이 병환속에서도 고령으로 “장수”할수 있는 비결을 리의원부부의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극진한 효성과 병원에서나 집에서나 하루같이 열심히 잘 간호해준 덕분이라고 혀를 차고있다.

  

  리의운부부는 련 20년을 병원에서 살다싶이 하였다. 병원에 입원해있는 량가 부모를 극진히 간호하는 부부를 보고 한 병실에 있는 병우(病友)들은 며느리인 조경자를 친딸인가고 물었고 사위인 리의운을 친아들인가고 착각을 하였으며 현시대 보기드문 “효자효녀”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리의운씨의 부친은 21년을 병환으로 앓는 기간 13년을 병석에 누워있었으며 장인은 8년간 병석에 누워있었지만 돌아가실 때까지 그들의 극진한 간호로 등창 한번 나지 않았고 깨끗한 몸으로 세상을 떠났다. 담당의사들도 “기적같은 일이다”고 하였다고 한다. 리의운씨는 “아들이건 사위건 다 자식이다. 부모들이 행복해야 자식들도 행복할수 있다. 부모를 잘 모시고 병환에 계시는 부모의 고통을 덜어주는것은 자식으로서 응당 해야 할 효이고 지켜야 할 의무이며 당연한 책임이다”고 하였다.

  

  어려서부터 리씨가문의 장남으로 자란 리의운씨는 남다르게 효심이 깊었고 책임감이 강했다. 4살때 어머니가 가난한 생활환경에서 자신과 아버지, 동생들은 옥수수밥을 먹으면서도 자신에게만 쌀밥을 골라 담아서 먹도록 한것을 목격하고 이것은 어머니가 큰아들만 고와서 쌀밥을 담아준것이 아니라 맏아들로서 더욱 큰 책임감을 갖도록 하기 위한것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커서 꼭 부모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효성을 다하겠다고 다짐하였다. 리의운씨는 열살때 어머니의 병치료를 위하여 랭증에 좋다는 익모초탕약을 끓여드리기도 하였다. 열살도 되지 않아 남의 집 민며느리로 팔려가 갖은 고생을 다한 자신의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고 자연스럽게 부모들에게 효성을 다하게 된다는 리의운씨는 많은 가정의 로인들이 젊어서는 갖은 고생을 하고 늙어서는 가정생활이 좋아졌지만 병환으로 행복을 누리기도전에 세상을 떠나는 안타까운 사실들을 보고 많이 가슴아파하였다. 리의운씨는 “우리 가정에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할수 없다! 부모들의 만년행복을 위해 부모들이 비록 병중이지만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생명을 연장시키기 위해서는 지금부터라도 내가 의학지식과 의술을 열심히 배우고 연구하여 부모들의 병을 잘 치료하고 간호해야겠다”고 굳은 결심을 하였다.

  

  리의운씨는 결심한 그날부터 실천에 옮겼다. 그의 결심은 들뜬기분에 가진 공상이 아니였다. 그는 일정한 의학기초지식을 갖고있었다. 원래 리의운가정은 할아버지대까지 몇대로 내려오는 중의(한의)사 가정이였다. 아쉽게도 아버지대에 와서 아버지의 참군(아버지는 퇴역후 목단강시공안국에서 사업)으로 대가 끊겼다. 리의운이 열살의 나이에 어머니에게 익모초탕약을 달여줄수 있은것도 다 할아버지에게서 배운것이였다. 문화대혁명의 영향 등으로 그는 중의학을 배우는것을 포기했으며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에게 물려준것은 한보따리의 중의학서적이였다. 리의운은 신생사물 접수와 지식습득이 빠른 사람이였다. 그는 공장을 경영할 때 50세의 나이에 혼자서 컴퓨터지식과 컴퓨터사용기술을 자습하여 터득하였고 편집, 조판, 평면설계를 모두 혼자서 하였다. 그는 전에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중의(한의)지식과 실천경험을 기초로 하여 수년간에 의학기초지식부터 시작하여 열심히 학습하여 중의사인증시험에 필요한 모든 지식을 습득해냈다. 리의운씨는 배우면서 량가부모들의 림상병증을 자세히 관찰하고 연구하여 환자에게 제일 알맞다는 치료방법을 연구해냈다. 그는 생각해낸 치료방법과 약처방을 먼저 자신의 신체를 실험대상으로 리용하여 약의 독성과 치료효과를 검증하였으며 의사의 동의를 거쳐 부모들을 치료하여 수차례나 그들을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했다. 따라서 병원에서 발병초기부터 “시한부”를 받은 리의운씨의 부친과 장인이 80여세까지 살수 있었다. 한국병원에서 심장병으로 인해 “1년을 넘기기 힘들것이다”고 했던 리의운씨 장모도 리의운씨의 진심어린 치료와 극진한 간호로 5년을 무사히 넘겼으며 지금도 사위덕으로 이만큼 살고있다고 입버릇처럼 외우고있다.

  

  리의운씨는 자신의 장기간 중병환자를 간호하고 치료한 경험으로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을 성심성의껏 열심히 도와주고있다. 많은 환자들이 효과를 보아 그의 “의술”은 원근에 이름이 났다. 지어는 일본에서도 소문을 듣고 그에게 도움을 청하고있다. 리의운씨는 “내가 중의를 학습하고 연구하는것은 나의 생계를 위한것이 아니라 부모를 위하고 사랑하는 가족들을 지키기 위한것이며 나아가서 도움을 바라는 여러분들을 위하여 열심히 배우고 연구하는것이다”며 올해 중의사자격시험준비를 잘해 래년에는 꼭 중의사자격을 획득하겠다고 신심가득히 말하였다.

  

  리의운부부는 자신들의 부모에게만 극진히 효성을 한것이 아니라 사회에서도 효도와 의리를 지키는 사람이였다. 부부는 정직하고 선량하며 남을 도와주는것을 당연한것이라고 여겼다. 2년전 리의운씨가 금주공원에서 아침산보를 할때 낯모르는 한 한족로인이 갑자기 쓰러졌다. 그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다 방관하고있었지만 리의운씨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서슴없이 로인을 등에 없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제때에 구급치료를 하였기에 로인은 목숨을 건질수가 있었다. 그는 이름도 남기지 않고 돌아서왔다. 리의운씨는 자습하여 여러가지 악기를 다룰수 있는 음악재질을 갖고있다. 그는 수년간을 하루와 같이 금주구조선족로인협회에 활동이 있을 때마다 초청을 받고 로인협회의 문예활동을 위하여 무보수로 연주를 하여주고 문예봉사를 진행해오고있다.

  

  리의운부부의 극진한 효성과 착한 마음, 선행은 대련시 금주구의 조선족들을 감동시켰고 그들의 찬양을 받고있다. 료녕성조선족사회에서 효심, 애심이 지극한 모범인물을 평선한다는 소식을 듣고 금주구조선족사회의 많은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리의운부부의 사적을 이야기하고 시대의 모범이 되기에 손색이 없다며 그들을 추천하였다.                      

윤청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