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립무 전승인 김명환
환인걸립무 국가급 무형문화재로 승화시켜
“민간예술가”, “국가급걸립무전승인”, “중화무형문화재전승인공헌상” 등 수많은 칭호와 영예를 받아안은 김명환(69세)선생은 환인태생이다.
“김씨가문에서 태여난것만큼 가문 대물림 걸립무를 전승, 발전시키는것은 응분의 책임이다.” 말은 쉽지만 숙명적으로 받아안은 걸립무의 전승과 발양은 사실 민족적 사명감이 없으면 견지하기 어려운 사회적인 책임이였다. 그만큼 환인걸립무는 “국가급무형문화재”로 등록되고 우리 나라에서 무용류종목중 유일하게 “인류무형문화재대표작명록”에 입선되기까지 100여년동안 김명환선생을 비롯한 김씨가문의 피타는 노력이 슴배여있다.
농악무의 일종인 걸립무는 김씨가문의 중국 이주와 함께 환인지역에 뿌리내리고 100여년간 발전해오면서 농악무의 표현형식을 보존한외에 7, 8명의 6세 안팍 어린이들이 어른들의 어깨우에 서서 녀자애는 꽃송이 들고 춤추고 남자아이는 상모를 휘돌리며 춤판을 고조에로 이끄는 이층춤이다. 환인걸립무의 발전로정에 대한 소개에서 김명환선생의 민족의 전통문화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느낄수 있었다.
김씨가문의 고향은 조선 평안북도 벽동군이다. 1875년생인 증조할아버지 김리청은 락관적인 성격에다 상모를 잘 돌리고 춤을 아주 잘 추어 마을에서 명망이 높았다. 증조할아버지는 1905년 30살 나던해부터 매년 벼모철이 끝나면 전문적으로 가족을 위주로 무용대를 조직하여 부근 마을을 돌아다니며 풍년을 기원하는 농악활동을 진행하였다. 활동이 빈번하게 진행되자 증조할아버지는 원래 자유롭게 추던 춤을 규격화하여 각 구절에 따라 주요무용을 배정했는데 이것이 최초 걸립무의 추형이였다. 증조할아버지의 년세가 많아지자 1895년생인 할아버지 김흥진이 계속 마을사람들을 조직하여 걸립무를 추었다. 당시 동네에는 걸립무를 추는것이 매년의 중요 행사로 되였다. 일본군이 조선반도를 침점한후 할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지금의 환인현 횡도천촌에 피난차 이민왔다. 다행히 당시의 횡도천촌은 대부분이 조선이민들이여서 할아버지는 계속 해마다 가족과 마을 사람들을 조직하여 걸립무를 추었다.
김명환선생은 자신이 걸립무와 인연을 맺은 년대를 1956년으로 기억하고있다. 할아버지가 조직한 걸립무활동에서 아버지 어깨우에 서서 상모를 돌렸는데 언제부터 춤을 추기 시작했는지는 딱히 모르고 그때부터 생생하게 기억이 살아있다는것이다.
1959년 정부는 환인저수지땜을 건설하면서 횡도천의 14개 조선족생산대를 환인 륙도하자와 상고성에 이주시켰다. 이듬해부터 3년 자연재해가 들이닥쳐 춤판을 중지할수밖에 없었다. 1964년 당의 정책으로 촌민들이 개황을 하고 생산에 열중하면서 생활이 조금씩 펴이기 시작했다. 한족사람들은 양걸춤(秧歌舞)을 추며 꽃펴나는 새생활을 노래했다. 할아버지는 “우리도 우리의 춤으로 당의 정책을 노래하자” 면서 조선족을 조직하여 학교와 각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걸립무를 추었다.
3년 재해시기를 제쳐두고도 김명환가족이 환인현에 이민온후 몇년 안돼 일제가 이곳을 14년간 군사통제하면서 금지령을 내려 걸립무를 출수 없었다. 1945년 일제가 투항하자 당시 35살인 김명환의 아버지 김성룡이 걸립무 제3대전승인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였다. 그는 선조들이 남긴 무용형식을 보존하는외에 전통체육항목인 줄당기기시합때 어린이가 어른 어깨에 올라서서 구경하고 응원하는 정경을 무용화했는데 그가 인솔한 걸립무무용대가 이르는 곳마다 관중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환인지역에서 명성을 떨쳤다. 횡도천촌민들은 해마다 김성룡의 인솔하에 걸립무를 신나게 추면서 40년대말기와 50년대초기 그 어려운 생활고를 용케도 이겨냈다.
1963년 김성룡이 조직한 걸립무는 전 현 민간무용시합에서 일등상을 땄다. 걸립무가 독특한 예술형식으로 정식무대에 오른것은 그번이 처음이였다. 여러곳에서 공연초청이 들어왔다. 걸립무가 환인지역에서 한창 명성을 날릴 때 “10년동란”이 시작되였다. 걸립무는 “봉건예술”이고 김성룡은 조선특무라며 공연정지를 당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며 정책이 바뀌기 시작했다. 나라에서 민족문화를 중시했다. 당시 70세 고령의 김성룡은 걸립무가 자기손에서 소실될가 념려하여 촌소학교에서 교편을 잡고있는 셋째아들 김명환에게 걸립무를 전승키로 결정하고 처음부터 하나하나 가르쳤다.
1968년 성조선족사범학교를 졸업한 김명환은 환인륙도하자조선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사범학교에 다닐 때 “모택동사상문예선전대” 일원으로 “문예장정”을 하며 개원지역 조선족마을은 물론 심양 소가툰에까지 가서 공연한적도 있었다. 졸업후 륙도하자조선족학교의 음악교수를 도맡아 진행하는 동시에 과외문예대오를 조직하여 농민들의 생활을 다채롭게 하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1984년 5월, 김명환은 현문화관에 전근되였다. 아버지의 소원을 당당하게 풀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김명환은 모든 정력을 걸립무의 창작과 련습에 몰부었다. 김명환은 걸립무의 광장무형식을 무대에 올려 집체무형식으로 개편하고 내용도 원래의 무용내용을 보존하는외에 접시춤,부채춤을 새로 편입하였으며 꽹과리, 장고, 북, 징 같은 민간타악기외에 현대음악을 가세하여 새로 편곡하였다. 료녕성문화청, 본계시문화국, 환인현문화국의 40여명 전문가들은 김명환이 새로 창작한 걸립무를 관람하고 높이 평가했다. 걸립무는 “료녕성제1기문화예술절” 금상을 비롯하여 성급, 국가급 상을 받아안은외에 건국45주년경축대회에 참가하여 북경천안문광장에서 선을 보이는 영광을 누렸다.
1990년 후반기에 들어서며 중청년들의 도시진출과 국외로무로 걸립무 배우모집이 어려워 부득불 걸립무공연을 중지했다. 옹근 10년 세월이였다. 2004년, 환인 오녀산성이 세계문화재에 입선되며 정부에서는 지방의 민족문화특색을 살리기 위해 걸립무의 재연을 결정했다. 흥분된 김명환은 가족성원을 모두 동원한 한편 안면이 있는 촌민들을 한집한집 찾아가 설득하고 학교 교원들도 동원하였다. 그의 정성에 감동돼 교원 12명, 아들, 딸, 며느리, 조카, 4살짜리 손자 등 가족 성원 9명이 포함된 42명의 공연대오가 구성되였다.
“말도 말아요, 그때 큰 아들과 딸이 대학가면서 집은 경제난으로 모대기였어요. 할수없이 둘째아들을 달래여 학업을 중단하고 한국로무를 보냈어요. 정말 둘째아들에게 미안했지요. 걸립무공연과 재편성때문에 저는 집안일은 아예 돌볼새도 없었어요. 애어머니가 시부모, 자식들을 돌보고 집의 안팎일을 다 도맡아 하였지요. 안해가 고맙기만 했지요.”
2004년 7월 4일, 김명환의 아들 김산, 딸 김화가 주요배우로 된 신판걸립무가 오녀산세계문화재신청성공경축대회에서 정식 공연되며 국가, 성, 시, 현 령도와 국내외 관광객들의 만장일치의 호평을 받았다. 김명환은 이 대오를 인솔하여 선후로 2005년 료녕성 민족민간무용콩콜에 참가하여 금상을, 2009년에는 료녕성 제1회 농민예술절에 참가하여 일등상을 탔다.
김명환의 아들 김산은 지금 현신화서점 당지부서기직을 맡고있고 딸 김화는 현직업학교에서 교편을 잡고있다. 걸립무를 계속 전승시키기 위하여 김명환은 정성들여 아들과 딸을 양성하고있다. 그들도 분망한 사업여가에 아버지한테서 걸립무 기교를 배우고있다.
하지만 한 가족이 걸립무를 전승, 발전시켜나는데는 언제나 어려움이 뒤따르고있다. 배우문제가 그중의 하나이다. 해외로무와 대도시진출로 당지에서 조선족젊은이들을 찾아보기 힘들고 있다손쳐도 하루하루 부조비에 그치는 대가에 쉽게 하려 하지 않는다. 최근년에 한족사람들을 쓰기도 하지만 아무리 훈련시켜도 자연스런 어깨춤이 나오지 않아 효과가 썩 좋지 않다 한다. 다음은 걸립무 특유의 어려움이다. 걸립무의 핵심이 “2층춤”인데 2층에 설 어린애를 찾기가 극히 어렵기때문이다. 2, 3년에 한번 6살 안팎의 어린배우 구하기는 하늘의 별따기와 다름없다. 고정적인 훈련비용 투입과 훈련장소도 걸림돌이다.
환인걸립무가 국가급무형문화재로 되기까지 김명환 일가의 피타는 노력이 깃들어있었지만 이를 지속적으로 전승하고 발전시켜나가는데는 전사회의 관심과 지지가 더욱 필요하다.
박태근특약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