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친’의 정으로 지적장애인 시형을 근 40년간 돌봐
-안산시 천산구 달도만가두 성신조선족촌 정창화
약혼자 가정에 지적장애인이 있다는것을 알았다면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할가?
22살 꽃나이에 가정의 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리춘택씨와 결혼하여 지적장애인 시형을 “친오빠”처럼 근 40년간 돌봐오고있는 정창화씨의 사적이 주변에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있다.
1955년 길림성 해룡현에서 태여난 정창화씨는 1977년 료녕성 안산시에 시집간 큰언니의 소개로 리춘택씨를 만났다. 가정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는데 리춘택씨의 가정형편은 좋은편이였으나 지적장애가 있는 큰시형이 있었기때문이였다. 정창화씨는 마음씨 착한 리춘택씨를 굳게 믿고 부모들을 설득하여 소원대로 결혼했다.
당시 26세의 큰시형은 지력발육이 3세밖에 안돼 생활능력이 전혀 없었다. 시어머니가 시형을 임신했을 때 오래된 인삼을 복용한것이 화근으로 되였던것이다. 정창화씨는 한집식구가 된 이상 친오빠처럼 여기고 잘 보살피리라 속다짐하고 실천에 옮겼다.
해가 몇번 바뀌면서 두 아들이 태여났다. 정창화씨는 두 아들애에게 항상 큰아버지를 친아버지처럼 모셔야 한다고 타일렀다. 두 아들애도 어릴적부터 큰아버지를 빈틈없이 보살피는 어머니를 본받아 큰아버지에게 효성을 다했다. 매일 저녁 집에 돌아와 하는 첫마디가 “맏아버지 식사했어요?”이다. 밥상에서 침과 코물을 마구 흘리는 큰아버지를 한번도 피한적이 없었다.
1986년, 정창화씨는 의외의 사고로 왼쪽 네손가락을 잃었다. 가정살림에 아주 불편했으나 시형을 보살피는데 더 큰 신경을 썼다. 몸이 불편하다는 리유로 시형을 소홀히 대할수는 없었다.
1999년의 어느날 정창화씨는 시어머니가 방에서 슬피 우는것을 목격했다. 다가가 영문을 물었다. 자기가 죽으면 큰아들을 지금처럼 챙겨주지 않을가봐 걱정이 앞섰던것이다. 정창화는 시어머니의 손을 잡고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춘택씨와 결혼하는 시각부터 시형을 책임지려고 속다짐했어요.”라고 위안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끌어안고 “말만 들어도 정말 고맙다. 래일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 연신 고개를 끄덕이였다.
정창화씨는 시어머니와의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 시형이 주변의 천대를 받을가봐 나서서 편들며 싸움도 많이 하고 항상 깨끗이 단장해주었다. 지난해 한국에 돈벌이 나갔던 남편도 돌아와 아빠트를 장만하고 함께 큰형을 모시기 시작했다.
사실 속상할 때도 적지 않았다. 지력발육이 3살 정도밖에 안되는 시형은 어린애처럼 남이 하는것을 그대로 따라했다. 채소를 뽑는것을 보고 밭에 가서 아직 여린 채소를 뽑아버리고, 마사진 알루미늄대야를 파는것을 보고 집의 좋은 대야를 몽땅 팔아버리고, 옆집에서 낡은 집을 허무는것을 보고 자기 집도 허무는 등 수시로 일을 저지르군 한다. 이러한 시형을 타이르지도, 욕하지도 못해 정창화씨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도 있었다. 한번은 참다 못해 크게 화를 내자 손녀가 “큰할아버지와 화내지 마세요. 큰할아버지는 아무것도 몰라요.”하는 애된 목소리로 위로해주었다. 몇십년간 같이 살아온 시형이 언제부터 “친오빠”처럼 보여졌는지 손녀의 위로에 스트레스가 그대로 풀렸다.
“가정이 화목하니까 나가서 일도 잘한다”고 성신조선족촌 서기가 정창화씨를 치하했다. 2003년부터 정창화씨는 촌에서 부녀주임, 지부위원, 민정주임, 촌경제관리원을 담당해왔다. 촌서기의 조수로 맡은바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으며 사회공익사업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어머니의 적극적인 생활태도에 영향받은 큰아들도 창업을 시작했으며 일전 동네 로인들을 찾아 명절인사를 올리고 콩기름을 드렸다.
지난 39년간의 세월을 돌이켜보면서 정창화씨는 “누가 보라고 시형을 모시는것도 아니고 단순히 자식들에게 효도의 전통을 물려주기 위해서다”고 토로했다.
주변 사람들은 정창화씨의 이름만 들으면 항상 엄지손가락을 내밀며 “우리 둘째형수”라고 친절하게 부른다. 최동승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