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간 4명 로인의 손발이 되다
-안산시 최경문, 김명순 부부의 효도이야기
“백가지 착한 일중에서 효도가 으뜸이다.”
안산시에 살고있는 최경문(45세) 김명순(39세) 부부는 10여년동안 4명 로인의 손발이 되여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곁에서 지켜주며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전통미덕 “효도”를 고스란히 실천해왔다.
1971년 안산시에서 태여난 최경문씨는 1991년에 학교를 졸업하고 안산강철그룹의 한 로동자로 취직했다. 훤칠한 외모에 듬직한 성격의 소유자로 최경문씨는 원래부터 김명순(1977년생)씨 어머니의 마음에 쏙 들었다. 1994년쯤 김명순씨 어머니는 최경문씨를 나이 비슷한 친구집 딸에게 소개해주었다. 그러나 이러저러한 원인으로 두 청년은 부부의 연을 맺지 못했다.
2년뒤인 1996년, 최경문씨가 아직 독신인것을 알게 된 김명순씨 어머니는 아예 자기 딸을 소개해주었다. 사랑에 빠진 훈남훈녀는 결혼을 약속했다. 하지만 두 청년의 결합은 김명순 친척들의 강렬한 반대를 받았다. 최경문씨의 가정조건은 괜찮지만 부모의 년세가 많고 신체가 좋지 않기때문이였다. 김명순씨의 외할머니는 그 많은 반대의견을 무시하고 “뭐니뭐니해도 인품이 가장 중요하다”, “나는 이 총각을 믿는다”면서 지지해나섰다. 2000년 최경문씨와 김명순씨는 정식 결혼하여 새로운 가정을 이루었다. 이때부터 주변에 훈훈한 감동을 주는 최경문 김명순 부부의 효도이야기가 시작됐다.
최씨가문의 든든한 며느리
최경문씨가 결혼하기전, 심양의 누나집에서 살고있던 어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의 최후를 직접 보내드리지 못한것이 최경문씨의 가슴에 평생의 후회로 되였다. 결혼후 최경문씨는 “이제부터 아들인 내가 아버지를 모시겠다”면서 아버지를 안산으로 모셔올 결정을 내렸다. 김명순씨는 남편의 결정을 진심으로 지지했으며 함께 시아버지를 모셔와 정성껏 보살피기 시작했다.
딸의 출생은 최경문 김명순 가정에 더없는 기쁨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이들이 천륜의 즐거움을 만끽하기도전에 최경문씨 아버지가 신장암에 걸릴줄이야!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아닐수 없었다.
입원기간 낮에는 간호사를 고용했으며 저녁에는 최경문씨가 직접 간호했다. 또한 김명순씨는 의사의 건의대로 시아버지에게 알부민(白蛋白)을 사들여 출근하는 남편을 대신해 꼬박꼬박 병원을 찾아 보조치료약으로 썼다. 이들의 정성에 감동되여서인지 최경문씨 아버지의 병이 점차 호전되여 다시 집으로 왔다. 생활기거는 물론 주말이면 최경문씨가 꼭꼭 아버지를 업고 공원을 찾아 해볕을 쪼이며 신선한 공기를 마시게 했다.“어렸을 때 아버지가 해줬던것처럼 나도 그렇게 해주고싶었다”고 최경문씨가 당시 심정을 토로했다.
하루는 최경문씨의 아버지가 새벽부터 설사하기 시작했는데 자식을 깨우기 싫어 혼자 빈번하게 화장실을 드나들었다. 최경문씨가 발견하였을 때 아버지의 배설물이 이미 몸에 여기저기 묻은 상황이였다. 최경문씨는 아버지의 몸을 씻어주었으며 김명순씨는 옆에서 시아버지의 옷을 빨았다. 아침이 되여도 일이 끝나지 않아 최경문씨는 할수없이 나머지 일을 부인에게 맡기고 출근길에 올랐다. 저녁 퇴근하고 부랴부랴 집에 도착해보니 깨끗이 빤 옷들이 빨래줄에 널려있었으며 설사하던 아버지도 조용히 침대에 누워 휴식하고있었다. 최경문씨는 감동된 나머지 부인에 대한 고마움을 맘속 깊이 간직했다.
최경문씨의 아버지는 신장암 확진후 5년밖에 못살았지만 인생의 마지막 시각까지 아들, 며느리의 빈틈없는 보살핌을 받았다.
장인, 장모의 "친아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최경문씨의 아버지가 투병하고있을 때 김명순씨의 어머니가 또 돌발적인 뇌출혈로 입원했다.
김명순씨가 시집간후부터 김명순씨 어머니는 김명순씨의 외할머니를 모시고 같이 살았다. 김명순씨 아버지가 외지에서 사업하고 김명순씨 어머니가 또 입원하는 바람에 김명순씨의 외할머니를 돌봐줄 사람이 없었다.
부부는 두말없이 김명순씨의 외할머니와 퇴원한 김명순씨 어머니를 같이 집에 모셨다. 60평방메터짜리 집에 김명순씨 외할머니, 최경문씨 아버지, 김명순씨 어머니, 최경문씨 세식구까지 여섯식구가 같이 생활하니 가장 많은 “장식품”이 침대였다.
새벽에 화장실 가는 습관이 있는 김명순씨 어머니는 사위와 딸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밤마다 몰래몰래 화장실을 찾아갔다. 다리가 워낙 불편한 김명순씨 어머니는 한번은 침대에서 내릴 때 넘어졌다. 최경문씨는 장모의 안전을 고려해 “꾀”를 썼다. 가는 실을 찾아 손목과 손목을 련결시켜 장모의 움직임에 따라 잠에서 깨여날수 있었다. 어느새 김명순씨 어머니 맘속에는 사위에 대한 고마움으로 가득했으며 “우리 딸이 정말 사람을 잘 찾았다”고 감개무량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로인들은 선후로 편안히 눈감았다. 유일하게 남은 최경문씨의 장인도 페암확진으로 수술을 받았다. 내막을 모르는 이웃들은 최경문씨가 늘 장인을 모시고있는것을 보고 친아들로 여겼는데 사위란 사실이 밝혀지면서 주변의 칭찬이 억수로 쏟아졌다. 칭찬을 받을 때마다 최경문씨는 이렇게 말했다. “당시 우리 집사람도 저의 부모님을 정성껏 보살폈습니다. 제가 응당 해야 할 일입니다.”
10여년동안 최경문 김명순 부부의 알뜰한 보살핌으로 가족로인들은 존엄있게 여생을 보냈다. 비록 지금 로인들은 모두 별세했지만 최경문 김명순 부부에게 있어서 그 어떤 유감도 남지 않았다. 자식으로서 해야 할 의무를 다했기때문에…
자식은 부모의 거울
어떻게 하라는 말보다 직접 행동을 보여주는것만큼 좋은 교육이 없다. 안산시조선족학교 초중부에서 공부하고있는 최자운양은 부모의 영향하에 어려서부터 로인공경은 물론 남을 배려하고 포용하는 기질을 드러냈다.
최자운양이 아직 소학교 5학년때, 하루는 김명순씨가 한 학부모의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빌어 그 학부모는 연신 감사를 전했다. 갈피를 잡을수 없는 김명순씨는 그 학부모로부터 사건의 전후 경과를 료해할수 있었다.
최자운양의 친구가 실수로 신발을 공공화장실 대변기에 떨어뜨렸는데 다른 학생들은 더러워서 멀리 피했다. 유독 최자운양만은 피하지 않고 예비용으로 준비한 신발을 친구에게 넘겨준 다음 맨손으로 신발을 건져 수도물에 깨끗이 씻어주었다는것이다.
“좋은 일을 했는데 왜 부모한테 알려주지 않았는가”란 어머니의 물음에 최자운양은 “해야 할 일을 했을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학교 선생님과 학생들의 호평을 받는 최자운양은 선후로 2015년도 안산시조선족학교 10대 우수 학생, 안산시조선족학교 우수공청단원으로 선정되였으며 사회적인 예체능시합에서도 많은 영예를 따냈다.
“부모를 잘 모시는것은 집안을 훌륭하게 만드는 일이다”란 말처럼 부모를 잘 모시는 사람은 사회에 나가서도 본분을 잘 지키는 편이다. 최경문씨는 사업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책임으로 생산부문의 기술적난관들을 하나하나 돌파했으며 “안강그룹 우수공산당원”으로 평선되여 그의 선진사적은 《안강일보》에 여러번 보도되였다. 김명순씨도 마찬가지로 유치원 교학사업에서 론문 1등상, 우수교원 등 성, 시급 영예들을 수두룩이 안았다. 특히 이 가정은 올해 4월 정부로부터 “안산시의 가장 아름다운 가정”으로 선정되여 조선족의 효도이야기를 주류사회에 널리 알렸다. 최동승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