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름 독거로인들의 착한 딸
-왕청문조선족촌 당지부서기 안향숙이 독거로인들을 보살핀 이야기
가정에서는 훌륭한 며느리, 훌륭한 안해로 손색이 없고 촌에서는 촌민을 이끌어 치부에로 달리는 코기러기로 손색이 없으며 동네에서는 로인들의 훌륭한 딸로 불리우는 촌간부가 있는데 그가 바로 신빈만족자치현 왕청문진 왕청문조선족촌의 서기 겸 촌민위원회 주임 안향숙이다.
길림성 통화사람으로서 지난세기 80년대에 왕청문 조선족촌에 시집온 안향숙은 괴벽하고 까탈스런 시어머님을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고 정성껏 모시였다. 설상가상으로 남편이 또 간암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남편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그는 좋다는 병원은 다 갔었고 좋다는 약은 다 구해서 먹였다. 정성이 지극하면 돌우에도 꽃이 핀다고 사형선고를 받았던 그의 남편은 기적처럼 호전되였으며 한국에 나가 돈벌이까지 할수 있게 되였다. 시어머님한테 효성을 드리고 남편 병시중에 정성을 다한 그의 사적은 온 동네를 감동시켰으며 1997년 신빈현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에서 벌인 “전현조선족 훌륭한 시어머니, 훌륭한 며느리, 훌륭한 안해 평선활동”에서 휼륭한 안해로 표창받았다. 가족들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베푼 그는 촌민들의 호평과 신임을 얻었다.
일촌지장으로서 안향숙은 촌민들을 치부에로 이끄는데 심혈을 기울였을뿐만아니라 로인, 특히 독거로인들의 생활문제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재적호수가 306세대에 1,000여명 인구를 가지고있는 왕청문조선족촌은 근년에 해외로무와 대도시진출로 많은 조선족청장년들이 나가고 집에는 어린이들과 로약자들만 남았다. 지금 왕청문조선족촌의 상주인구는 50~60세대에 80여명인데 절반이상이 독거로인이다. 이들이 병에 걸리거나 집에 일이 생기면 안향숙은 자식들에게 소식을 전해주고 련계가 되지 않거나 자식들이 오지 못하면 자기가 직접 시중을 들면서 효성을 드렸다. 촌당지부서기이자 촌주임으로서 그는 전 촌의 사무를 봐야 했고 로년협회 회장으로서 로인들의 생활을 돌봐야 했다. 때로 너무 바빠 시간을 낼수 없을 때는 촌지도부 성원과 당원간부한테 보살피도록 부탁했으며 난제에 부닥치면 진정부 부문에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안향숙은 다른 사람들이 한국가서 큰 돈을 버는것을 보고 자기도 집을 떠나 큰 돈벌이를 해볼가 망설였지만 의지가지없는 불쌍한 로인들을 두고 선뜻 떠날수 없었다.
“나까지 가면 저 많은 로인들은 어떡하나?”
최종 그는 “집지키기”를 선택하고 전 촌 독거로인들의 “기둥”, “의무공”, “보모”가 되기로 하였다.
왕청문조선족촌의 박순분로인은 1999년 남편이 돌아간후 병이 심한 아들과 정신병을 앓고있는 손녀와 함께 생활하였는데 생활이 째지게 가난하였다. 얼마 안되여 아들이 병으로 돌아갔지만 의지가지없는 로인은 장사치를 능력과 돈마저 없었다. 이 사정을 안 안향숙은 자기주머니를 털어 장사를 치러주었으며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일을 돌봐주느라 며칠동안 쉬지도 못하였다. 자식잃은 슬품에 눈물이 그칠줄 모르는 로인을 보고 안향숙은 “걱정마세요, 앞으로 무슨 일이든 저를 딸처럼 생각하고 찾아주세요.”라며 위안의 말씀을 드렸다. 그후부터 안향숙은 짬만 있으면 로인집에 가서 옷을 씻어주고 나무를 패주고 밥을 지어주었다. 2010년 왕청문에 홍수가 졌을 때 안향숙은 로인의 안전이 걱정되여 로인과 그의 손녀딸을 자기집으로 모셔와서 보살펴주었다. 그해 겨울 로인은 안향숙의 딸같은 보살핌속에서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정신질환이 있는 로인의 손녀딸의 병치료를 위하여 안향숙은 동분서주하면서 해결방법을 찾았는데 최종 현자선총회를 거쳐 무순시정신병원에서 무료로 치료받을수 있게 하였다. 치료비외의 매년 4천여원의 숙식비는 지금까지 모두 안향숙이 부담하였다.
64세인 김일출은 본촌의 서기직을 10여년 담당한 로당원, 로간부였다. 10여년전에 뇌혈전병에 걸렸는데 설상가상으로 아들이 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돌볼사람 없이 홀로 남은 김일출로인의 생활을 고려해 안향숙은 김일출로인을 양로원에 입주하라고 동원하였지만 가지 않자 안향숙은 또 김일출로인을 돌보는 책임을 맡았다.
촌민 정덕수와 박정옥은 모두 90넘은 로인이다. 그들의 딸은 모두 외국에서 일하는데 일단 로인이 앓으면 그는 로인집에 가서 약을 먹이고 불을 때고 밥을 짓고 빨래를 하는 일을 도왔다.
촌에 68세나는 김만순이란 독거로인이 있는데 심장병을 앓고있었다. 한국에서 돈벌고있는 로인의 아들이 매일 전화를 하면서 어머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머님이 전화를 받지 않으면 아들은 급하게 안향숙한테 전화를 걸어와 2킬로메터 떨어져있는 자기집에 가서 어머님의 심장병이 발작했는지 보아달라고 부탁하면 안향숙은 원망 한번 하지 않고 직접 가서 무사하다는것을 확인하군 하였다.
왕청문조선족촌의 로인들은 “곤난이 있을 때마다 딸처럼 나서서 생활적으로 도와주고 정신적으로 위로해주는 안서기가 있기에 우리들이 만년생활을 마음놓고 누릴수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군 한다.
서기직을 맡은 10여년동안에 안향숙이 보살피거나 장사를 치러준 로인이 무려 50여명에 달했다. 화장명세서에 보통 다 안향숙이 자식대신 싸인했다. 림종에 가까운 로인들을 보살피는 안향숙을 보고 사람들은 “유산상속을 받거나 돈을 받는것도 아니고 게다가 자기 자식들도 무관심하는데 당신이 왜 보살피는가”라고 하면 안향숙은 “사적으로 보면 한 촌에서 수십년 같이 지내면서 쌓은 정이 있고 공적으로 보면 당원이고 촌서기인 내가 모든 로인을 책임지고 보살필 의무가 있다”고 말하였다.
안향숙이 로인들을 보살피는데 관건적인 세 단어가 있다. 바로 “열쇠, 연기, 글쪽지”이다. 만약에 “열쇠, 연기, 글쪽지” 이 세개 서로 련계없는 단어로 이야기를 엮으라면 많은 사람들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써야 할지 갈피를 잡을지 모르겠지만 바로 이 세 단어에 안향숙이 로인들에 대한 정성이 깃들어있다.
“촌민들의 믿음과 간절한 부탁이 담겨져있는 묵직한 열쇠뭉치”
안향숙의 침대머리에 한 뭉치의 열쇠가 걸려있는데 이는 촌민들이 외국돈벌이를 나가기전에 자기집 열쇠를 안향숙한테 맡긴것이다. 열쇠를 맡긴 동시에 자기네 부모와 아이도 안향숙한테 맡긴셈이다. 한집 두집, 전 촌 수십가구의 열쇠를 한고리에 꿰매다보니 열쇠뭉치가 되였다. 이 열쇠뭉치는 보통열쇠뭉치가 아닌 촌민들의 믿음과 간절한 부탁이 담겨져있는 묵직한 열쇠뭉치이다.
“취사연기로부터 로인들의 안부를 파악”
일년 사시장철을 불문하고 취사연기가 모락모락 피여오르는 이른 아침이면 안향숙은 촌을 한바퀴 돌면서 굴뚝을 살펴본다. 그러다가 어느 독거로인의 집 굴뚝에서 연기가 나지 않으면 로인이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나 즉시 달려가보고 별 일이 없으면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군 한다. 촌에 독거로인이 제일 많을 때 100여명에 달한적 있었다. 그가 동네를 한바퀴 돌려면 한시간이 넘게 걸려야 했다. 겨울철 눈온 뒤에는 연기와 함께 뉘집 문앞에 발자국이 있는가 없는가를 유심히 살펴본다. 발자국이 있으면 로인들이 활동할수 있다는것이고 발자국이 없으면 로인들이 무순 문제가 있다는것을 설명하기때문이였다.
“자기를 찾으라는 련락카드”
글쪽지는 안향숙이 독거로인들에게 준 련락카드이다. 안향숙은 자기의 전화번호를 적은 쪽지를 로인집의 가장 눈에 띠는 곳에다 붙여놓고 일단 일이 있으면 제때에 전화를 걸수 있도록 하였다. 로인들에 대한 보살핌은 이렇듯 세심하고 살뜰했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아주 데면데면했다.
1961년 출생인 안서기는 결장에 고장이 난지 오래였다. 병원에서는 오래전부터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지만 그는 도저히 시간을 낼수가 없었다.
왕청문진의 한 사업일군은 기자에게 “안향숙은 자기몸보다 로인들을 보살피는데 더 신경을 쓴다”고 귀속말로 말했다. 로인들이 어디가 불편하다고 말만 하면 안향숙은 두말없이 로인을 데리고 병원을 찾는다. 병원에서 자기네는 조건이 차해 고칠수 없다고 하면 그는 로인을 데리고 현병원을 찾았다. 입원을 할 때 로인들의 자식들이 거의 집에 없기에 안향숙은 항상 가족싸인을 대신했다.
급할 때는 택시를 타고 병원을 오고 갔는데 50여킬로메터의 거리라 왕복택시비만 100여원 들어야 했다. 안향숙은 로인들이 돈없는 사정을 헤아려 자기가 대신 내주고 로인자식들한테 받기로 했지만 그 자식들이 언제 한번 올지 기약도 없고 또 설사 온다해도 너무 오래 지난 일이라 다 잊어버리고 받지도 못했다.
한 촌간부는 “촌서기로서 안서기의 년로임이 6~7천원에 달하는데 이 돈은 거의 다 로인들의 병치료에 들어간다. 이 사실은 모두들 아는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로인들의 정신생활을 풍부히 하기 위해 그는 현과 향정부의 지지를 적극 쟁취해 왕청문진 첫번째 조선족로인협회를 세웠는데 등록된 회원이 이미 150여명에 달한다. 로인협회 회장으로 그는 경상적으로 오락과 학습교류 등 활동을 조직해 전현 원근에 소문이 자자한 조선족로인협회로 되였으며 왕청문진을 대표해 여러차 시, 현 각종 민속절공연에 참가해 표창까지 받았다.
2013년 안향숙은 진당위의 지지를 적극 쟁취해 대량의 인력, 물력, 재력을 투입해 신축한 촌사무실에 왕청문조선족촌로인협회를 기초로 전 현 첫 “독거로인의 집”을 건설했다. 200평방메터 되는 “독거로인의 집”에는 활동실, 오락실, 도서실, 컴퓨터실, 의료실 등이 설치되여있으며 조선족들이 춤과 노래에 능한 특점을 고려해 징과 북, 거문고 등 여러가지 악기들까지 갖추어 로인들이 여기서 마음껏 오락활동을 할수 있게 하였다.
로인들이 활동할 때마다 안향숙은 로인들을 위해 소리없이 차와 물을 따라주었다. 안향숙은 “로인들이 즐거워하면 나는 더 즐겁다”라고 말한다. 때로 “늙은 아이”들이 사소한 일로 사이가 틀어지면 안향숙이 나서서 모순을 화해하군 한다.
안향숙은 로인들을 위해 봉사하는데는 자기 자신만의 힘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사회 각계 애심인사들의 지지를 적극 쟁취했다. 하여 아주 짧은 시간에 30여명의 “독거로인지원자의무봉사팀”이 탄생되였다. 봉사팀은 정부, 병원, 학교 등 단위의 애심인사들로 구성되였는데 매명 팀원이 2, 3명의 독거로인을 책임지고 수시로 련락하고 방문을 하였으며 생활이 불편한 로인들에게 빨래, 청소, 병치료배동 등 봉사를 제공하고 로인들을 위해 정기검진을 하면서 일상생활에서의 로인들의 실제곤난을 해결해주었다.
십여년을 하루와 같이 정성껏 보살펴주는 안향숙을 보고 로인들은 “친딸인들 그 이상 더 잘 했겠는가? 안향숙이 바로 우리 딸이다”라고 말했다. 로인들의 칭찬에 안향숙은 “로인들의 곤난을 수수방관하면 그게 무슨 당원인가? 촌민들이 외국가기전에 로인을 나한테 부탁한만큼 난 조그만 실수도 있어서는 안된다”라고 말하군 한다.'
10여년동안 그는 자기의 아낌없는 노력으로 촌민들의 호평을 받았으며 자기의 열정과 착한 마음, 완강하고 강경한 의지로 새 시기 우수공산당원의 생동한 찬가를 엮었다.
그는 선후로 전현조선족 “훌륭한 며느리”, “무순시 우수부녀대표”, “무순시우수인대대표”, “료녕 훌륭한 사람”, “무순시백성뢰봉”, “무순시10대자선인물”, “료녕성2015년도10대인터넷인물”, “무순의 훌륭한 조선족”, “료녕성우수공산당원” 등 받은 영예칭호가 수두룩하다.
한마디의 약속에 당신은 일생을 수고했다
흘러가는 부얼강물이 알것이다
친딸같은 당신의 깊은 정을
수십명의 로인은 가고 당신의 청춘도 흘러갔다
강물은 불었다 다시 줄고
곡식은 누렇다가 다시 푸르러진다
당신은 부얼강변에 활짝 피여난 진달래마냥
해마다 봄을 맞고 해마다 진붉게 곱게 핀다
이는 2015년 2월 28일 안향숙이 제9기백성뢰봉으로 당선되였을 때 평심위원들이 그에게 준 평어다.
지금 안향숙은 이미 50중반에 들어섰다. 남편은 한국에서 일하고 아들은 대련에서 컴퓨터공정사로 일하고있다. 가족과 친구들이 항상 안향숙더러 이젠 아들한테 가서 복을 누리라고 권고하지만 안향숙은 “나도 멀지 않아 독거로인이 될텐데 나만큼은 로인들을 떠날수 없다”며 움직일수 있을 때까지 로인들을 돌보겠다는 의지를 내비치군 한다.
박영신특약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