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동과 민공으로부터 대학생이 되기까지
发布时间:26-08-04 09:44  发布人:金昌永    关键词:   

요즘 대학에 입학해 기뻐하는 청년들을 볼 때마다 나는 49년 전, 대학입시를 치르던 그 곡절 많은 날들을 떠올린다. 목동과 민공에서 대학생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는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다.

중학교 때 아버지는 늘 “대학에 못 가면 소나 치게 될 거야”라며 공부를 강조하셨다. 1976년 여름, 고중을 졸업하고 귀향하자 생산대 정치대장이던 아버지는 나를 곧바로 소방목에 배치했다. 고졸자를 목동으로 부린다는 게 억울했지만, 울며 겨자먹기로 소를 몰았다. 소를 고향 서산 비탈에 풀어놓고 산꼭대기에 올라 밭을 가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앞길이 막막했다. 그때 나는 소를 방목하며 노래로 답답한 마음을 달래군 했다.

하지만 곧 생각을 바꿨다. 소방목은 오히려 책을 볼 좋은 기회였다. 소를 산과 강가에 풀어놓고 책을 읽었다. 너무 몰입한 나머지 소가 옥수수밭이나 논으로 들어간 줄도 모를 때가 많았다. 마을 사람들은 “책만 보면서 소방목도 제대로 못한다”고 수군댔고, 아버지는 화가 나서 나를 민공으로 저수지 공사장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조양천에서 30리 떨어진 깊은 산골 저수지 공사장이였다. 거기서 나는 흙을 지고 나르는 고역을 해야 했다. 공사 지도부는 겨울 전에 수문 공사를 끝내려고 민공들을 낮과 새벽으로 나눠 륜번 작업을 시켰다. 흙과 자갈을 광주리에 담아 40도 경사진 언덕으로 날라 올리는 일은 위험천만했다. 일을 견디다 못해 도망치는 민공들이 생길 때마다 직속반이 뜨락또르를 몰고 쫓아가 붙잡아 왔고 200여 명 앞에서 ‘도망분자’로 비판하는 장면도 목격했다.

나는 공사장에서 리론보도원을 맡았다. 정치발전을 통해 대학에 추천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이를 악물고 일했다. 그런데 국경절에 집에 왔다가 중학교 때 어문선생님에게서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되여 시험을 보고 대학에 갈수있다”는 것이였다. 처음엔 너무 기뻤지만, “11월 말에 시험을 친다”는 말에 나는 통곡했다. 시험공부로 복습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고 공사장에서 도망쳤다가 붙잡히면 공개비판을 받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공사장에 돌아간 뒤, 나는 두 가지 준비를 하기로 했다. 공식적으로는 민병련 총보도원으로서 신문 랑독과 리론 강의를 충실히 했고 틈틈이 주머니에 책을 넣고 다니며 쉬는 시간마다 산굽이로 빠져나가 물리와 화학 교과서를 훑어보았다. 흙을 지면서도 공사장 주변을 살피며 도망칠 궁리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문선생님이 공사장까지 찾아와 《인민일보》에 대학입시 회복 론설이 실렸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이대로 있을수만은 없다고 생각한 나는 공사장에서 도망치기로 결심했다.

대학교 시절

1977년 10월 24일 밤, 대거리를 마치고 초막에 돌아오자 민공들은 모두 곤하게 잠들었다. 밤 10시, 나는 베개를 이불 속에 집어넣어 잠든 듯이 속이고 슬쩍 일어나 초막 밖으로 나갔다. 적막한 밤, 인기척 하나 없었다. 절벽이 있는 서산 비탈을 돌부리를 잡으며 한 걸음, 한 걸음 기여올라갔다. 직속반이 덜 주의를 기울이는 쪽이였다. 산중턱에 이르렀을 때, 내 도망쳤다는 것을 발견한 직속반이 전지불을 비추며 수색작업을 시작했다. 불빛이 내 머리 우로 스쳐지나갔다. 나는 바위틈에 납짝 엎드려 숨었고 불빛이 멀어지자 재빨리 달음박질쳐 마을로 내달렸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고방에서 책들을 주머니에 넣고 둘러멘 뒤, 강냉이밭을 가로질러 서산쪽으로 다시 도망쳤다. 그때 우리집 앞에 뜨락또르 헤드라이트 빛이 비치고 고함 소리가 들렸다. 직속반이 나를 잡으러 온 것이였다. 나는 그 길로 동불사역으로 달려가 기차를 타고 교하에 있는 큰누나네 집으로 피신했다.

교하에 도착한 나는 마음 놓고 복습에 전념했다. 처음엔 연변의학원을 목표로 삼고 수학부터 복습했다. 중학교 때 수학경연에서 1등을 한 적이 있어 초중 수학·물리·화학은 그래도 기억을 더듬으며 복습에 진도를 냈다. 그런데 시험을 보름 앞두고 큰누나가 내게 물었다. “혹시 너 색맹이 아니야?” 그 순간, 나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고중 때 입대 신체검사에서 색맹으로 불합격된 적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 지망을 연변대학 조문학부로 급히 변경해야 했다. 큰누나와 매형, 중학교 선생님들은 “리과시험을 복습하다가 문과시험을 보름 만에 준비해서 합격할 수 있겠냐”며 래년에 다시 대학시험을 볼 것을 권했지만 나는 시험장이라도 가보겠다고 이를 악물었다. 큰누나와 매형이 당지 한족중학교에서 구해 번역해준 정치·력사·지리 복습제강을 죽기 살기로 외웠다.

글짓기는 비교적 자신이 있었다. 고중 시절 공사방송소 견습기자로 활동하며 《연변일보》와 연변인민방송국에 여러 편의 기사를 발표했고 귀향 후에도 통신원으로 활약하며 문화소 소장이신 김재권 선생님께 민간이야기와 소설 창작을 배웠기 때문이다. 복습제강에 실린 40여 개 작문제목을 다 쓸 시간이 없어 비슷한 제목끼리 묶어 대여섯 편만 연습했다.

1977년 대학입시가 회복된후 첫 대학시험을 볼때의 수험증

그렇게 보름 동안 아글타글 문과 복습을 마치고 드디여 1977년 11월 28일 조양천진 조양소학교 대학입시장에 들어갔다. 그리고 1978년 3월 3일, 드디어 연변대학 입학통지서를 받았다. 목동과 민공에서 대학생이 된 그 순간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늘에 둥둥 뜬 기분으로 장차 기자와 작가가 될 푸른 꿈을 꾸기도 했다.

49년이 지난 오늘, 저수지 공사장에서 교하로 도망쳐 입시를 준비하던 그 곡절을 돌아보면 아직도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그때 공사장에 붙잡혀 있었더라면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있었을까. 내가 기자, 편집자, 작가로 살아온 이 모든 길은 그날 밤의 용기에서 시작되였다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길림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