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웠던' 방학
发布时间:26-08-04 09:42  发布人:金昌永    关键词:   

어린 시절, 철없던 소녀였던 나에게 일요일과 방학은 기다림보다는 두려움의 대상이였다. 왜냐하면 그날이면 우리 네 남매는 어김없이 어머니의 뒤를 따라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여름에는 논밭으로, 겨울에는 땔나무를 하러 산으로... 그렇게 나의 방학은 온전히 ‘일’로 채워졌다. 중학교 시절, 기숙사 생활을 하던 나는 집이 그리워 견딜 수 없을 때가 많았다. 하지만 정작 집에 돌아가면 기다리는 것은 포근한 안식처가 아닌, 땀과 흙투성이의 로동이였다.

1980년대 생활 형편이 넉넉하지 않던 시절, 기숙사 식당의 밥상은 늘 똑같았다. 감자국, 무우국, 가지국... 겨울이면 얼어붙은 배추국이 전부였다. 그래서 일요일만 되면 기숙사생들은 하나둘 집으로 향했다. 집에 가야 그리운 가족도 보고 조금이나마 먹고 싶은 반찬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집에 가는 것이 늘 망설여졌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할 것 없이 논밭으로 나가야 하는 일이 너무나도 끔찍했기 때문이다. 일요일에는 학교에서 밥을 주니 집에 가지 않는 핑계를 댈 수 있었지만 방학만큼은 피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그때 대대(군대 부대) 일을 하시면서도 틈틈이 집안일을 돌보셨고 어머니는 혼자서 12무의 수전과 5~6무의 한전을 가꾸느라 말 그대로 ‘고양이 손도 빌려 쓸’ 지경이였다. 그러니 우리 네 남매가 어머니를 도와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였다. 불볕더위가 내리쬐는 여름, 시루통처럼 습기를 머금은 논밭에서 우리는 줄줄 흐르는 땀으로 온몸을 적시며 김을 매야 했다. 한전을 다 매고 나면 수전에는 벌써 범이 새끼를 칠 정도로 잡초가 무성했다. 비 오는 날에도 비닐 조각을 뒤집어쓰고 손이 개구리 발바닥처럼 불어나도록 일을 멈출 수 없었다.

그러다가도 틈을 내여 소먹이 풀을 베여야 했고 옥수수밭에서는 하루 종일 김을 매며 얼굴이 그을렸다. 다른 집들은 일군도 많고 농약을 써서 일손을 덜었지만 우리 집은 네 남매가 모두 학교에 다니는 구차한 살림이라 농약을 쓸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태양은 우리의 여린 얼굴을 데울듯 내리 쬐였고 하루가 끝나면 온몸은 땀과 흙으로 범벅이 되어 알락고양이처럼 변해 있었다. 목과 팔에는 옥수수잎에 스친 붉은 상처가 줄줄이 났고 그 상처에 물이 닿을 때마다 눈물이 날 정도로 따갑고 아렸다. 그러나 누구 하나 아프다고, 힘들다고 징징대지 않았다. 다음 날이면 피곤한 몸을 비비며 다시 어머니를 따라 일터로 나섰다.

목이 마르면 산골짜기 시내물을 벌컥벌컥 들이켰고 더위를 견딜 수 없을 때는 그 물로 얼굴을 씻으며 잠시 더위를 식혔다. 복철이면 마늘을 캐고 감자를 캐고 가을을 준비하며 무우와 배추를 심었다. 이 모든 일은 해마다 반복되는, 우리에게는 피할 수 없는 계절의 의무였다. 그런 반복 속에서도 나는 몰래 친구들이 부러웠다. 그늘 아래에서 예쁜 옷을 입고 소설책을 읽거나 친구 집을 오가며 노는 모습이 공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맏딸로 태여난 나는 그런 대우를 바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방학숙제는 그저 형식일 뿐, 하루하루는 오로지 어머니의 뒤꽁무니를 따라 일하는 것으로 채워졌다. 어린 동생들도 언니 못지않게 묵묵히 고된 일을 감당했다.

여름방학에 비하면 겨울방학은 그래도 조금은 행복했다. 겨울방학에는 명절이 끼여 있어 며칠간은 비교적 편하게 지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겨울이면 우리는 주로 땔나무를 하러 산에 올랐고 이듬해에 쓸 오이손, 당콩손 같은 농자재도 준비해야 했다. 다행히 소달구지가 있어 나무를 나르는 데는 조금 수월했지만 소를 먹이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소를 처분하고 난 뒤에는 온 가족이 힘을 합쳐 나무를 끌고 와야 했다.

북풍이 윙윙 몰아치고 흰눈이 무릎까지 쌓인 엄동설한에도 우리는 산에 올라 나무를 해야 했다. 날씨는 춥지만 나무를 하는 동안 몸에서는 오히려 뜨거운 김이 올랐고 얼굴엔 하얀 서리가 덮여 눈사람이 되군 했다. 점심은 변변치 않은 반찬이 든 주먹밥이나 도시락이 전부였고 해가 지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하루 동안 모아 둔 땔나무 더미를 보면 피곤함도 잠시, 보람으로 가득 차던 그때의 기분이 지금도 생생하다.

겨울방학에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가지는 ‘가마니 짜기’였다. 어머니는 겨울철이면 시간이 날 때마다 가마니를 짜서 팔아 생계에 보탰다. 방학이 되면 우리 네 남매가 할 일은 새끼를 꼬는 일이였다. 아침 식사 후, 아버지가 엮어놓은 벼짚을 가져와 하루 종일 새끼를 꼬았다. 너무 지루할 때는 벼짚을 들고 친구 집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누가 더 많이 꼬았는지 겨루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작은 경쟁과 웃음이 오히려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우리가 새끼를 꼬고 어머니는 가마니를 짜고 아버지는 그 가마니를 묶어 나르는 과정을 통해 온 가족이 함께 땀을 흘렸고 그 덕분에 우리가 등교할 때 조금이나마 용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말처럼, 네 자식을 뒤바라지 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부모님은 일 년 내내 꿀벌처럼, 소처럼 쉬지 않고 일하시며 우리를 뒤바라지하셨다. 우리 네 남매도 그런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려고 공부에 최선을 다했고 방학 동안에도 제멋대로 놀지 않고 일에 성실히 림했다.

비록 우리는 방학 동안 다른 아이들처럼 자유롭게 놀지도, 귀한 대접을 받지도 못했고 매일 신물 나도록 반복되는 로동을 해야 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경험이 오히려 인생의 값진 자산이 되였다. '젊어서 고생은 돈 주고도 살 수 없다'는 말처럼, 어린 시절의 이런 경험은 나에게 강한 의지력과 인내심을 길러주었고 무엇보다 부모님의 숭고한 희생을 깨닫게 해주었다. 지금은 오히려 그 ‘무서웠던’ 방학이 있었기에 우리 네 남매가 더 단단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시절의 땀과 눈물은 오늘의 나를 만드는 소중한 밑거름이 되였던 것이다. 부모님께서 우리에게 물려주신 삶의 태도와 로동의 가치는 아무리 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영원한 유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길림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