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을 파버린 자리에 고이는 정갈한 샘물 같은
发布时间:24-11-26 10:41  发布人:金昌永    关键词:   

욕심을 파버린 자리에 고이는 정갈한 샘물 같은

ㅡ 문학평론가 최철선생을 만나다

(할빈)한영남

순수하기만 하던 20대가 저물어가던 어느 날 김창희시인의 집에 갔다가 괴상한 제목의 아칙한 시집 한권을 발견했다. <원태연 알레르기>.

스스로 자기의 알레르기를 파헤쳐 쓴 시집이라니…

그때부터 원태연이란 이름은 내 뇌리에 단단히 뿌리내리게 되였고 나는 20여년이 흐른 어느 날 한국에 출장간 기회에 원태연의 시집들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때 산 시집들 속에 <손끝으로 원을 그려봐 네가 그릴 수 있는 한 크게 그걸 뺀 만큼 널 사랑해>라는 역시 괴상한 제목의 시집이 있었다.

손끝으로 원을 그린다. 아주아주 크게. 그리고 그걸 뺀 나머지 부분 만큼 사랑한다고 한다. 아주 작정을 하고 사랑을 극대화한 표현이라 해야겠다.

오늘의 주인공 최철선생은 자신의 수필집 <쪼각달아, 좀 천천히 지려무나>에서 이 세상 자체가 둥글다고 피력하면서 <서로 양보하고, 너그럽게 주고받으며, 포용하면서> 욕심을 버리고 둥글둥글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이 조화롭게 행복하게 발전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런 최철선생은 조선족문단에서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지만 산재지역 특히 료녕에서는 문학평론가로 정평이 나있다.

복 받은 <행운아>

최철은 1963년 료녕성 환인현의 한 작은 시골마을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여난다.

지난 세기 60년대초는 웬지 흉년이 자주 들었고 그래서 늘 먹거리가 부족하던 시기였다. 최철의 어머니는 최철을 낳을 때 몸이 극도로 허약해서 최철을 낳자마자 아버지와 동네 젊은이들에 의해 담가에 실려 병원행을 해야 했다.

갓 태여난 최철은 숨이 간당간당했고 주름살투성이에 바싹 야위였으며 세상사람들이 누구나 태여나면 우렁차게 내지른다는 그 고고성도 울리지 못했다고 한다.

보매 살려내기가 어렵겠다고 판단한 그의 할아버지는 강가 버들숲에 버리려고 최철을 누더기에 싸가지고 집을 나서다가 일밭으로 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다시 집에 돌아와 구석진 곳에 방치해두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그의 할아버지는 다시 갓난애를 버리려고 담요를 헤쳐보다가 그만 깜짝 놀랐다. 죽었으리라고 여겼던 최철이 눈을 떴고 입까지 오물거릴 줄이야.

천명이라고 여긴 최철의 할머니는 얼른 미음을 쑤어 최철의 입에 떠넣어주었다. 그렇게 최철은 생명을 부여받았고 완강하게 살아났다.

그때를 최철은 이렇게 회상한다.

ㅡ 제가 태여난 시간이 아침 8시였어요. 만일 저녁이나 밤중에 태여났더라면 저는 영낙없이 그대로 죽은 목숨이였을 겁니다.

어린 <독서광>

소학교에 입학해서 글을 깨치게 되자 최철은 차츰 집에 있는 소설책에 눈길을 돌리게 되였다. 그의 집에는 삼국연의, 수호전, 홍루몽, 서유기 등 중국고전들과 세계명작들이 꽤 있었다. 어려운 말들이 많았고 아예 모를 말들도 무척 많았으나 그것이 독서를 단념할 리유로는 될 수 없었다. 어린 최철은 꾸준히 끈질기게 달라붙어 독서허기증을 달랬다. 그리하여 그는 집에 있는 책들을 전부 독파해버렸고 친구들한테서 빌리기도 하고 학교도서관에서 빌리기도 하면서 중학교시절, 사범학교시절을 독서로 보낼 수 있었으며 그의 독서는 나중에 그가 교편생활을 하면서도 줄곧 이어져왔다.

그의 독서는 단순한 재미에 머무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범위 또한 넓어서 우리말 책을 다 본 다음에는 중문도서에도 눈길을 돌려 고금동서를 아우르는 다양한 장르의 다양한 책들을 걸탐스레 탐독할 수 있었다. 그것은 후날 그가 문학의 길을 활보하는데 훌륭한 밑거름이 되여주었다.

시대의 풍랑 속에서

결혼을 했으나 집도 없었고 돈도 없었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도 그렇고 이제 태여날 자식을 생각해도 앞길이 막연했다.

그때가 마침 전국적으로 하해바람이 불어치던 시기라 그는 그토록 애착하던 교육사업을 단호히 접고 광주, 계림, 상해 등지를 떠돌면서 돈이 될만한 일들을 찾아했다.

문학을 생각할 사이가 없었고 독서할 여가도 없었다. 생활의 핍박에 못이겨 그 길을 선택한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최철은 자나 깨나 돈 벌 생각 뿐이였다.

때론 엎어지고 때론 뒹굴고 때론 가시에 찔리고 때론 실패의 쓰디쓴 고배를 마시면서도 최철은 태여날 떄처럼 완강한 의지와 불굴의 정신력으로 심신을 하얗게 불태웠다.

다행히 운명은 노력하는 자의 손을 들어주는 법이여서 그는 약간의 돈을 모을 수 있게 되였고 그리하여 그는 그 힘들고 풍전등화와도 같은 방랑생활을 접고 다시 환고향한다.

다시 꼬나든 <펜>

2003년 그러니까 최철이 30대 후반 막 불혹의 나이로 육박하던 시기였다. 그는 신빈현으로 전근되여 다시 교편생활을 시작한다. 그때 그는 그의 문학생애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과 해후하게 된다. 그가 바로 김군(본명 김진수. 벽소설, 수필, 시 등 다양한 장르의 글을 넘나들며 활발한 문학창작활동을 하던 작가. 2010년 심장병으로 타계)이다.

비로소 최철은 김군의 추천으로 심양조선족문학회에 가입하고 <료동문학>과 <료녕조선문보> 압록강부간 문학면에 수필들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그의 인생에 또 하나의 변곡점이 생긴 것이다.

그는 김군과 더불어 문학도들을 불러 <글쟁이모임>을 만들었고 그 모임을 통해 정기적으로 창작교류활동을 조직했다. 이 <글쟁이모임>에 참가하던 문학도들은 나중에 심양조선족문학회 회원으로 발전했고 그들은 빈번하게 자신들이 창작한 시, 수필들을 묶어 <신빈특집>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신문의 문예면을 화려하게 장식하기도 하고 잡지에 얼굴을 내밀기도 했다.

그들이 얼마나 열성을 다해 문학에 투신했는지 그때 료녕문단에서는 지어 <신빈현상>이란 말이 나돌 정도였다고 한다.

꾸준한 노력은 성공의 금자탑을 쌓아올리게 만드는 법이다. 마침내 그는 2008년 료녕민족출판사를 통해 개인 단행본 수필집 <쪼각달아, 좀 천천히 지려무나>를 출간하게 된다.

<낮>에는 교장, <밤>에는 문인

2003년부터 최철은 무순시 신빈현조선족학교 교장으로 사업했다. 그 5년간 그는 해마다 심양조선족문학회에서 조직하는 필회, 분과창작교류회 등 문학행사들을 신빈에서 펼치는데 물심량면으로 적극 도와나섰다.

그는 교장으로서 학교의 대소사를 직접 진두지휘했을 뿐만 아니라 자라나는 후대들이 우리말 우리글을 잘 익히고 지키게 하기 위해 로심초사해야 했다.

그는 신빈교원연수학교 민교부와 손잡고 해마다 교원글짓기대회, 중소학생글짓기대회 등을 조직했으며 그것은 척박한 신빈땅에 독서와 우리글쓰기 풍토를 새롭게 마련하는데 고스란히 이바지되였다.

문학 문학 문학

2007년 심양조선족문학회에서 조직한 한중문학교류회의가 한국에서 열렸다. 그때 그 일원으로 참가한 그는 비로소 문학의 눈을 <제대로> 뜰 수 있었다. 스스로의 문학을 다시 검토하는 계기가 되였던 그번 한국행에서 그는 일행이 귀국하면서 전기밥솥, 옷가지 등 한국물품들을 한가득 사가지고 돌아올 때 트렁크 두개에 책만 골똑 채워가지고 돌아왔다. 그의 남다른 행보가 기특하게 여겨졌던 한국 춘천의 윤용선시인은 그후부터 해마다 문학관련 책들을 100여권씩 보내주군 했다. 2022년까지 그는 무려 천여권의 도서를 선물받을 수 있었고 그것은 그가 문학을 배우고 익히고 문학소양을 쌓는데 큰 힘이 되여주었다.

그는 지금도 윤용선시인의 그 고마움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있다.

그 외에도 그는 2008년부터 다양한 판본으로 된 중국의 문학사와 한국의 문학사들을 계통적으로 공부하면서 대표적인 문학작품들을 독파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그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2013년 조선 평양에 가서 문학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3년 반의 길고도 짧은 학습기간 그는 단동과 평양을 오가면서 조선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에서 문학박사 과정을 수료했고 조선학위위원회로부터 문학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

늦깎이의 저력

2009년 단동으로 전근된 그는 문학회활동이나 작품창작활동을 접었지만 문학을 향한 열정만은 식히지 않고 더욱 꾸준히 문학공부에 매달렸으며 해내외 문학작품들을 널리 섭렵하면서 문학에 깊이 빠져들었다.

2012년 단동시조선족문화관 소속의 단동조선족문학회(초대회장은 허형행 단동시조선족중학교 전임 교장)의 상무부회장으로 활약하면서 사회단체의 후원으로 활동경비를 마련해 문학모임을 조직했고 해마다 <압록강조선족문단>이라는 내부간행물을 편집출간하여 회원들의 작품이 볕을 보게 했다.

2018년부터 다시 료녕조선족문학회 문학행사에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 그는 회원들의 작품을 읽고 감상문 삼아 가벼운 평론글들을 쓰기 시작한다. 드디여 교장 최철이 평론가 최철로 타이틀을 새롭게 장식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동안 그는 료녕의 많은 문인들의 수필과 시와 소설들에 단평을 달면서 적극적인 문필활동을 개시했다.

2017년부터 단동텔레비죤방송국에서는 조선어뉴스영상프로 번역부가 새로 설치했다. 최철은 조선어방송의 자문위원을 맡고 <문학산책>, <문학감상> 등 프로에 참여, 해내외 명작감상과 료녕조선족문학회 회원들의 우수작품들을 감상하는 역할을 해오고 있다.

그의 프로필에서 몇줄 옮겨온다.

료녕조선족사범학교 졸업

연변대학 성인교육학원 조선어언문학

동북사범대학 재직연구생반

무순시 신빈현조선족학교 교장

단동시조선족중학교 부교장

단동시정협 제13, 14기 위원

중국치공당(致公党)단동시위원회 대외련락위원

단동시조선족련의회 비서장

단동시조선족문학회 회장

단동시텔레비죤방송 조선어뉴스프로 번역부 고문

수필집 <쪼각달아, 좀 천천히 지려무나>(료녕민족출판사. 2008)

론문집 <중세 조선문인들의 중국기행문학에 대한 연구>(조선교육도서출판사. 2016)

2013년부터 문학평론, 감상문 등 20여편 해내외 문학지들에 발표

소설이 좋아 소설을 읽으며 문학에 입문했지만 요즘 들어 시를 더욱 사랑하게 되였다고 고백하는 최철은 작품발표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고 한다. 그는 오로지 문학을 순수하게 생각하고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아름다운 이야기를 써낼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ㅡ 글을 쓰는 사람, 문학에 빠진 사람은 살아가면서 몸부림도 치고 한숨도 지으며 아픔을 여미고 유독 남달리 많은 시련을 겪은 사람들이겠지요.

ㅡ 저는 밑바닥인생을 살면서 끊임없이 도전하고 자신과의 싸움에서 스스로를 초월하기 위한 각고의 노력을 해왔습니다.

ㅡ 금년에 퇴직했는데 다시 지나온 발자취들을 되돌아보니 지나온 모든 것들이 아름다운 풍경이였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최철은 초연히 발걸음을 옮긴다. 욕심과 비리와 배금주의에 걸죽한 침을 뱉는 그는 그야말로 심산 속 옹달샘처럼 맑은 심성의 소유자이고 그래서 그의 글들은 맑고 투명하며 신선하다.

오늘도 그가 꾹꾹 찍어가는 문학행보에는 자국자국 노을이 금빛으로 툭툭 터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