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차라리 화려하게
(연길)주향숙
퇴근하여 집에 돌아와 신을 벗다말고 나는 저녁노을이 거울과 벽과 문에 강렬하게 비추어지는 것을 환희에 차서 바라보았다. 그때 저녁노을은 내 눈이며 뺨이며 머리칼에서도 환히 빛났을 것이다. 저녁노을은 마음에까지 스며들어 내 하루의 찬란함이 되고 있었다.
나는 마음에서 일렁이는 기쁨이 경이로웠다. 나는 지금까지 몇번의 노을에 감격하였던가? 또 나무가지의 흔들림이나 풀잎의 색갈이나 어느 벌레의 꿈틀대는 생명에 얼마를 감동하였던가? 어쩌면 그것들을 언제 어떻게 버렸는지도 모른체 무감각해진 것일지도 모른다. 기실 그것들은 언제나 내 삶의 언저리에 닿아있었을 것이다. 언제나 자신을 송두리채 바쳐 빛나거나 향기롭거나 따스했을 것이다.
나는 그동안 무엇에 집중하여 살았을가? 실용적이 아니라서 버리며 살아온 것일가? 그것들은 과연 내 삶에 부가적인 것이였을가? 오히려 더 본질적인 것은 아니였을가? 나는 저녁노을에 몰두하였고 설레였고 행복했다. 그 시간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해질 수 있는 것일가?
이러한 아름다움을 누린다는 것이 우리에게 사치였을가? 어쩌면 우리가 갖고 싶은 것은 해살이나 바람이나 같은 것인데 생존에 허덕이던 날들이 우리더러 사치스러운 꿈으로만 여기게 만들었을가?
살아간다는 것은 괴롭고 힘든 일이다. 함께 살아가는 인간들도 실망스러울 때가 많은 존재이다. 기어이 세상 모두에서 아름다움을 찾으라고 하는 주문은 어딘가 강박적이고 한편 애처롭다. 아름다움이 없이는 도저히 살아낼 수 없어서, 그래서 아름다움이 만들어져야 하는 리유와 절박함이 배여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자비한 불행에 숨막히고 좌절하는 사람들에게는 잔인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삶이 무겁거나 어둡게 가라앉든, 무미건조하게 흐르든, 치렬하게 요동치든, 난해함으로 답답하든 그 사이를 비집고 틈새를 내며 아름다움이 오는 시간은 있는 것 같다. 이미 살아낸 고통과 고독과 환멸이 지금의 모두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담담하게 바라보게 할지라도 때로는 아름다움에 젖고 싶은 시간이 있는 것 같다. 문득 그런 시간이 찾아오는 것은 아마도 삶에 아프고 지쳐갈 수록 그것에 대비되여 본능적으로 더 간절히 아름다움을 갈구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또한 우리는 추악함과 함께 아름다움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이미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어떤 현실 속에서든 살아가야 하며 애써 쌓아올리고 만들어가는 아름다움의 힘을 결국 믿기 때문일 것이다.
차라리 더욱 화려하게 살아보면 안될가? 주관적이면, 주체적이면 안될 리유가 있을가? 나 해비에 취하리. 바람소리에 취하리. 흙냄새에 취하리. 하나의 단어에 취하리. 밥을 씹어 삼키는 모습에 취하리. 내가 내 안으로 들인 것들에 의해 나는 충만하고 황홀하리. 그것은 노력하겠다는 의지도 아니고 그렇게 해야 된다는 관념적인 믿음도 아니다. 내 몸으로 아름다움을 느끼고 담아낼 것이다. 그것이 힘다해 펄떡이는 심장과 따뜻한 피에 대한 례의가 아닐가? 아름다움과 결합한 몸은 새로운 생명력으로 세상을 특별하고 풍요롭게 살아갈 것이다.
하얗게 물갈기를 날리며 밀려오고 밀려가는 바다가, 빨갛거나 노랗거나 하얀 꽃들이 가득 피여있다. 세상에, 바다가에 이런 꽃이라니. 한번씩 밀물이 밀려왔다 빠져나갈 때마다 꽃들은 더욱 진하게 빛난다. 환호하며 다가가니 꽃이 아니였다. 아, 그건 여러가지 곱디고운 색갈의 조약돌들이였다.
꿈이였다. 조약돌 우에 바다꽃이 피였다. 시처럼 아름다운 시간이 어느날 밤 내게로 흘러들었던 것이다.
이 고운 꿈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들려주려 한다.
그러면 누군가는 내 얼굴에 그려지는 미소를 바라보기 전에 먼저 내 가슴에서 이는 잔물결 소리에 귀 기울여줄 것이다. 나 또한 그 가슴을 가만히 느끼며 오래오래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고요.
그다음에도 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