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고마워해야 하나?
发布时间:25-06-10 08:27  发布人:崔秀香    关键词:   

수필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고마워해야 하나?

(봉성)장문철

‘고맙습니다’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았거나 다른 사람이 은혜를 베풀 때 자주 사용하는 말로 도움과 베품에 대한 례의와 존중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고맙습니다’는 우리의 삶에서 빠질 수 없는 례의용어로서 긍정에너지이며 감정소통의 촉매제요, 윤활제인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고맙다는 말을 적절하게 사용하면 사람간의 화합과 리해를 촉진할 수 있으며 불필요한 번거로움을 피면하고 세상을 더 밝고 조화롭게 장식할 수 있다.

하지만 살다 보면 고맙다는 말을 잘못 내뱉어 후회하고 탄식할 때도 종종 있다.

지난 4월에 나와 안해는 사천성 장강삼협을 유람하기 위해 중경에 갔다. 려관에 짐을 풀고 모 장강삼협유람선 매표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오후 5시가 거의 돼서였다. 늦은 때라서 그런지 로비에 손님이란 우리뿐이였고 우리를 접대하는 직원은 50대의 남자였다.

남자는 처음부터 우리를 열정적으로 맞아주었으며 미소가 얼굴에서 시종 떠나지 않았다. 서글서글하고 정열적인 사람이라 믿음이 절로 갔다.

남자는 요즘 호화유람선 티켓이 할인됐다며 4인실이 1인에 1200원이라고 했다. 우리는 사흘날 아침표 2장을 예약했다. 그러자 남자는 때마침 1600 원하는 2인실 표를 물리는 사람이 있는데 할인해서 1인에 1300원이니 고려해보라고 했다. 위치가 2층 앞쪽이여서 좋은 표중에 좋은 표라며 살갑게 굴었다. 나는 웬 떡이냐싶어 즉각에서 2600 원을 지불하고 수속을 밟았다. 남자는 사흘날 아침 6시에 우리가 묵은 려관에 차를 보낼테니 미리 준비하고 대기하라고 했다. 나와 안해는 고맙다는 인사를 거듭하며 문을 나섰다.

사흘날 아침 약속대로 보낸 차를 타고 조천문부두에 도착했다. 그런데 여기서 배를 탈줄 알았는데 버스를 타고 가다가 도중에 탄다는 것이였다. 어쩐지 찜찜했다. 나는 당연히 중경에서 승선하리라 믿었다. 그래서 협의서를 제대로 보지 않고 싸인을 했던 것이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셈이였다. 원래 칠칠치 못하고 덤벙덤벙하는 성미라 미리 숙제를 하지 않고 소홀했음을 자책했다. 중경의 조천문에서 떠나는 코스는 A선이고 내가 선택한 코스는 버스로 너더댓 시간을 달려 봉절현에서 승선하는 B선이였다. 도둑의 배에 오른 느낌이였다.

그런데 이보다 더 기분 나쁜 일은 뒤에 있었다. 봉절현에서 백제성과 기문을 구경하고 승선할 때 가이드에게 나는 2인실인데 2인실이 어느 쪽인가고 물으니 이 배는 호화선이여서 몽땅 2인실이라는 것이였다. 그리고 호실의 위치도 앞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뒤쪽에 있었다. 방망이로 뒤통수를 한대 호되게 얻어맞은 느낌이였다.

갑판에 나와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에게 표값을 물어보았더니 구매 경로가 다름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1200 원에서 1600 원 사이였다. 나는 나만 멍청하게 당한 줄 알았는데 나보다 더한 사람도 있었다. 사실 정확한 표값이 1200 원이였던 것이다.

나의 기분은 땅바닥으로 곤두박질하였다. 대뜸 온 몸의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 희롱당한 기분이였다. 이건 단지 돈이 문제가 아니였다. 우리 사회가 눈감으면 코 베여 먹을 세상이여서는 절대 안될 일이였다.

내 기분을 헤아리기나 한 듯 땅거미가 질 무렵부터는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배는 한밤중에 출발했는데 아침에 깨여보니 날씨가 흐린데다 안개가 자욱하여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물어보니 배는 밤새 구당협을 지나 지금은 무협에 들어서고 있다고 했다. 이윽고 무산항에 도착해 오전 9 시부터 오후 1 시까지 자유시간을 가지게 됐다. 여기서 작은 배를 갈아타고 소삼협을 유람하기 때문이였다.

나와 안해는 그만 쉬기로 했다. 몇시간을 기다려야 하기에 심심해서 삼협유람협의서를 꺼내보았다. 우연중 중경문화유람국의 제보전화번호가 눈에 띄였다. 할 일도 없는데 잘됐다 싶어 전화번호를 콱콱 눌렀다. 전화가 련결되였다.

 “무엇을 도와 드릴가요?”

년세가 지긋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나의 사연을 듣고 난 남자는 요구사항를 말해보라고 했다. 나는 격분을 가까스로 참으며 “중경정부에 먹칠하면서 개인의 주머니를 채우는 부패분자는 반드시 척결해야 한다”고 했다. 그랬더니 매표를 책임졌던 사람의 이름을 대라고 했다. 마침 협의서에 그 사람의 싸인이 있었다. 남자는 자기네가 될수록 빨리 조사처리할 테니 근심말고 맘놓고 즐겁게 유람을 하라고 했다. 20분이 지났을가? 한 녀성이 전화를 걸어왔다. 초과지불한 200원을 돌려드리겠으니 위챗 추가를 하자는 것이였다. 행여나 했는데 이처럼 빠른 시간내에 해결이 되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갑자기 한가닥 난류가 가슴 속에서 용솟음쳤다. 나는 휴대폰에 대고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고맙습니다’를 련발했다.

그런데 간사하고 변덕스러운 것이 사람의 마음인가 싶다. 늦은 밤 자리에 누워 곰곰히 생각을 굴려보니 평소에 너무 쉽게 착각에 묻혀 산 것이 아닌가는 의문부호가 고인 물에서 톡톡 튀는 기포마냥 머리에 속속 떠올랐다.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고마워해야 하는가?

이것은 마치 의환관계마냥 미묘한 것이였다. 그 속의 오묘한 리치는 한 마디 말로 다 설명할 수가 없으며 자신의 마음 속으로 깨달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환자는 의사의 옷과 밥을 제공하는 존재’라는 표현은 일정한 타당성을 가진다. 의사의 수입은 주로 환자에게 제공하는 의료 서비스 대가로 발생하며 환자가 병원을 방문해 진료비를 지불하면 이는 병원의 수익으로 이어지며 최종적으로 의사의 급여로 련결된다. 환자의 수량과 비용지불상황이 의사의 경제수입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고 할 때 환자야말로 의사들의 생활 기본요소를 제공하는 ‘부모’인 것이다. 하지만 종래로 의사들이 ‘부모’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는 것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오히려 ‘부모’들이 고맙다고 했다.

물론 의사는 생명을 구하고 아픈 이를 치료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으며 전문 지식과 기술을 통해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고 건강을 유지하게 하므로 고맙다고 하는 것은 응당하다 하겠다. 문제는 환자가 ‘고맙다’고 할 때 의사의 태도이다. 의사와 환자는 상호 의존적 관계를 형성하며 서로 없으면 안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한켠에서만 고마움을 표시하는 것 보다는 상호 고마움을 표시해야 합리하다는 생각이다. 최소한 찾아주어 고맙다는 인사쯤은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우리가 밥점이나 오락장소에 들리면 “어서 오세요!” 인사하고 나갈 때면 “또 오세요!”하고 깍듯이 인사를 한다. 고객이 곧 돈이기 때문이다. 서울 동대문 시장을 지날 때 한 가계 주인이 “사지 않아도 좋으니 들어와서 구경만 하고 가셔도 환영합니다”고 하던 말이 새삼스럽다.

교원(학교)과 학생(학부형), 기업가와 로동자,려행사와 관광객 등등의 관계도 상호 합작하고 상호 협력공영한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다고 본다.

한번은 된 감기에 걸려 가까운 작은 병원에서 링게르주사를 맞은 적이 있다. 일주일이나 맞았지만 별 차도가 보이지 않았다. 의사는 약을 바꾸어보자고 제의했다. 나는 흔쾌히 그러라고 수락했다. 그런데 또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채 낫지를 않았다. 그러자 의사는 또 다시 약을 바꾸어 보자고 했다. 이번에 나는 기겁하며 마구 손사래를 쳤다. 2주 동안이면 주사를 맞지 않아도 이에서 더 심하랴 싶었다. 공연히 2주 동안 아까운 시간과 돈을 허비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억울하기만 했다. 그렇지만 의사는 약값은 조금도 감면하지 않았으며 ‘고맙다’는 말은 일언반구도 없었다.

팔리고도 돈 세여준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남에게 속거나 리용당하고 나서도 모를 때 쓰는 말이다. 누구나 얼김에 상황 파악을 못하고 부지중에 무턱대고 ‘고맙다’는 말을 람발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고맙다’는 말에도 립장이 있고 원칙이 있으며 좋고 싫은 감정의 구분이 명확하다. 아무리 례의례절은 지나쳐도 허물로 여기지 않는다지만 ‘고맙다’는 정말로 고마운 사람에게 내심으로부터 우러나와 감사의 뜻을 표시할 때만이 보람있고 아름다운 것이다. 고맙지 않은 사람에게 ‘고맙다’고 하는 것은 절대 례의가 아니며 작게는 흑백을 흐리고 크게는 부정부패를 조장하는 행위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