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광인 련재작ㅣ중국혁명 속 우리 겨레 혁명가들(남만편) - 6
发布时间:22-06-14 03:45  发布人:崔秀香    关键词:   
그 때였다.
섬찍한 말발굽소리가 사립문가에서 멎더니 웬 사나이가 뛰여내렸다. 알고 보니 리부평의 맏아들의 딱친구 태술이였다. 그는 폭로된 부대가족을 주력부대를 따라 몽강쪽으로 전이시키라는 중공반석중심현위의 지시를 갖고 왔다. 그날 밤으로 10여명의 부대가족들은 태술이와 리부평의 인솔하에 비밀리에 까치봉쪽으로 전이하였다. 그들은 새벽녘에 까치봉에서 근거지 여러 마을에서 모여든 100여명의 부대가족들과 회합한 뒤 이튿날 저녁 다시 행군길에 나섰다.
그들은 깍지산에서 떠나 사흘만에 화전부근의 야산에 이르렀다. 그날 밤 대오는 또 다시 전이길에 올랐는데 도중에 한 산비탈에서 적 토벌대와 맞띄웠다. 설상가상으로 잠에서 깨여난 막내가 막 울음을 터뜨리려 했다. 까닭하면 100여명의 대오가 생사판에 오를 판국이였다.
리부평은 100여명의 목숨을 두고 주저할 사이없이 칭얼거리는 아이의 입을 손으로 꽉 막았다. 아이는 한참 발버둥치다가 천천히 팔다리를 뻗어버렸다. 어머니는 삽시에 맥이 탁 풀어졌다. 다행히 척후병으로 나선 두 무장대원이 적진에 총알을 들씌우며 토벌대놈들을 다른 곳에로 유인하여 팽개친데서 숨소리가 간간하던 어린 막내는 다시 맥이 뛰기 시작하였다.
천명이라면 진짜 천명이랄가, 리부평의 얼굴에는 막내의 소생으로 하여 기쁨이 함함히 피여올랐지만 또 근심이 꼬리를 물었다. 두번 다시 이런 일이 나타난다면 그 후과를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리부평은 어린 막내를 남에게 주려는 모진 마음을 먹었다. 맏이가 희생되고 둘째의 생사도 기약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남에게까지 위험을 주며 막내를 안고 있을 수 없었다.
이튿날 새벽녘에 석암 끝에 다달았다. 후속부대의 련락원 태술이가 셋째를 싼 포대기를 꼭 안고 리부평과 석별의 눈물을 나누었다. 태술이가 이윽토록 발길을 떼지 못하자 리부평이 재촉하였다.
"빨리 가라는데두… 아무 때건 해방이 되는 날엔 찾을 수 있겠지!"
태술이는 드디어 희생된 전우의 막내동생을 안고 산 아래 중국인마을로 내려갔다. 부평이는 태술이와 셋째가 저멀리 사라질 때까지 오래오래 손을 흔들었다. 자식을 혁명에 내놓고 오늘 또 이렇게 세상 모르는 막내와 리별하는 이 시각 그의 심정을 하늘과 땅이나 알는지.
19
반석지구를 떠난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 주력부대는 양정우와 리홍광의 지도하에서 중국로농홍군 제37군 해룡유격대와 합세하여 해룡유격대를 독립사 남만유격대로 재편성하였다. 그후 독립사 주력부대는 몽강(지금의 정우현), 휘남, 금천, 통화, 청원, 류하 등 지구에서 활동하면서 적들과 싸워나갔다.
1933년 11월 15일 독립사 주력부대는 금천현 한룡만(旱龙湾, 오늘의 휘남 경내)을 지날 때 위만군 소본량(邵本良)부 제8련의 돌연습격을 받았지만 영용한 반격으로 적들을 살상하고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해 11월 하순 독립사 주력부대는 류하 삼원포를 공격한 후 로룡강(老龙岗) 북쪽으로 철거하였는데 소본량은 급급히 부대를 풀어 독립사 주력부대를 포위하였다. 독립사 주력부대는 양정우, 리홍광의 령솔하에 그날 밤으로 포위를 뚫고 적들과 5리 밖에 떨어진 곳에 숙영지를 잡았다.
소본량은 교활한 놈이였다. 이자는 아군을 포위소멸할 목적으로 한통의 가짜편지를 아군 손에 떨어지게 하여 마치 소본량부대가 동쪽으로 집중하는 것처럼 꾸미였다. 소본량의 궤계를 간파한 양정우와 리홍광은 적들의 포위를 교묘하게 헤치였다. 그후 련이어 금천현 대황구, 류하현 작목대자(柞木台子), 류하현 사도구 등지를 공격하여 일제놈들과 위만군을 여지없이 타격하였다.
1933년도 막가던 12월의 어느날, 양정우와 리홍광은 적들이 우글거리는 류하현 고산자를 습격하기로 하였다. 전투를 앞두고 리홍광의 막내동생 리학규 등 네 전사가 고산자 정찰임무를 맡고 두개 조로 나뉘어 고산자거리에 숨어들었다. 손산동(별호)과 다른 한 전사는 약 지으러 가는 농민 차림새로 서쪽 성문으로 다가가고 리학규와 리할빈(별호)은 나무장사군으로 차리고 동쪽 성문에 나타났다.
"섯! 뭘 하러 가는 놈이야?"
보초병이 길을 막아나섰다.
"저, 나무를 팔아보려구요."
18살에 난 리할빈이 나무지게를 가리키며 제꺽 대답했다.
"흥 공산군비적이지?"
두 보초놈은 그들 둘을 세워놓고 참빗질을 했다. 아무 것도 들춰내지 못했다.
"히히 아무 것도 없지 않아오. 나무를 팔고올 때 술을 사다 드리지요. 돌아갈 때 꼭 이리로 가니깐요."
리할빈이 굽석 허리를 굽히면서 능청을 부리였다. 학규도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가라!"
두 보초 놈은 시끄럽다는듯 꽥 소리를 질렀다.
거리의 조용한 골목에 이르자 둘은 나무단 속에서 권총을 뽑아 품에 지니였다. 이날 학규네는 나무를 눅거리로 제꺽 넘겨버리고 적의 포대, 병영 등 형편을 일일이 알아보았다. 지하교통원을 만나 저녁의 적들 군호가 '금환'이라는 것도 알아냈다.
20
겨울해가 노루꼬리처럼 짧다보니 어느새 땅거미가 어둑어둑 깃을 펴기 시작하였다. 그 때 손산동네가 서쪽 성문에 나타났다. 잇따라 리학규네도 이르렀다. 그들이 문을 열어달라고 사정해도 보초놈은 들을 념을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날도 퍽 어두워졌다. 손을 쓸 때가 되였다.
"손 들엇! 소리쳤다간 죽여버리겠다!"
그들은 나지막하게 소리치며 일시에 권총을 들이댔다. 보초병들이 얼결에 손을 쳐들자 총을 압수하고 옷을 벗겨냈다. 어어 꽁꽁 묶고 자갈을 물린 다음 담모퉁이에 처박았다. 이럴 때 적 패장놈이 다가와 반장이 어디 있는가고 소리쳤다. 적 차림을 한 손산동이 공산군 두 놈을 잡아놓았다고 보고하자 소대장은 대번에 헤벌쭉해졌다.
소대장이 졸병과 함께 묶이운 사람을 보려고 허리를 굽힐 때였다.
"꼼짝 말앗! 움직이면 쏜다!"
리학규는 벼락같이 소대장놈의 권총을 앗아냈다. 이 때 성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독립사 전사들이 성문을 똑똑 두드렸다. 리학규네는 인차 성문을 열고 정찰 결과와 군호를 알리였다. 리학규와 손산동이 성문 옆 포대를 지키고 혁명군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윽고 자지러진 총소리, 수류탄 터지는 소리, 기관총 소리가 고요한 밤정적을 깨뜨렸다. 고산자거리는 온통 혼란 속에 빠졌다. 적들은 비명을 지르며 돌아갔다. 전투는 한시간 남짓이 지속되였고 적 수십명이 뻐드러졌다.
그 때다. 일본수비대 200여명과 '동변도공비숙청' 사령 소본량의 1개 퇀이 밀려든다는 급보가 전해졌다. 양정우와 리홍광의 지시로 아군은 싸우는 한편 퇴각하였다. 리학규와 손산동은 그런 줄도 모르고 포대에서 병영에 대고 사격을 해댔다. 총소리가 멎어서야 아군이 이미 철퇴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칠흑같은 어둠을 빌어 성안을 벗어나 무사히 귀로에 올랐다.
리학규는 부대내에 이름이 났다. 그럴 만도 하였다. 이 해 그는 부대를 따라 60여차의 전투에 참가하여 솜씨를 보였으니 말이다. 독립사전사들은 학규를 "꼬마홍광"이라고 다정히 불렀다. 그러던 리학규는 그후 1934년말 적들과의 한차례 전투에서 불행히 희생되였다. 그 때 그는 14살 밖에 안되였다.
독립사 주력부대가 남하한 후 반석중심현위와 제1퇀 그리고 소년영은 우리 항일근거지를 대대적으로 진공하는 적들의 세차례 대토벌과 맞서 싸우며 유격전을 벌이였고 1934년 1월 중순에 림강현 팔도강 부근에서 독립사 주력부대와 승리적으로 회사하였다. 뒤미처 박한종이 이끌던 소년영도 부대를 찾아와 부대는 희열로 넘치였다.
21
1934년 이 해 음력설은 2월 14일이다. 음력설이 금방 지나 로장청(老长青), 청림(青林) 등 항일군들과 독립사 여러 부대들은 독립사 사령부의 부름과 지시를 받고 륙속 림강현 삼차자(三岔子) 부근의 밀림 속에 모였다. 17개 항일무장대오에 1,000여명이 되였다. 2월 21일 그들은 처음으로 전체 항일군련석회의를 가지였는데 회의는 련속 6일 동안 열리였다(동북항일련군사료총서 《동북항일련군제1군》, 흑룡강인민출판사, 1986년 6월 출판, 제71~72페이지).
련석회의는 여러 항일무장 지도자들의 일치한 합의로 항일련합군총지휘부 설립선언, 항일련합군 투쟁강령, 항일련합군 상벌조례, 인민혁명군 군병원과 무기수리소 공동사용규칙, 항일련합군 공동작전승리품 처리조례 등을 통과하고 '항일련합군총지휘부'를 설립하였다. 련석회의 결의에 따라 양정우가 항일련합군 총지휘로, 수장청(隋长青)이 부총지휘로, 리홍광이 참모장으로 부임하였다(동북항일련군사료총서 《동북항일련군제1군》, 흑룡강인민출판사, 1986년 6월 출판, 제72페이지).
1934년초, 몽강, 금천, 무송 등지의 태고연한 밀림 속에는 여기저기 독립사 부대밀영들이 일어섰다. 반석의 서버리하투 등지에서 전이한 항일가족들은 반석중심현위의 지도하에 밀영들에 피복공장(재봉대)과 후방병원 등을 꾸리였는데 리부평이 밀영의 책임자로 되였다. 그는 부상당한 혁명군전사들을 위해 밥도 짓고 옷도 깁고 간호도 하다가 리홍광부대에 입대한 둘째 홍순일이 희생되였다는 비보를 받게 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