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광인 련재작ㅣ중국혁명 속 우리 겨레 혁명가들(남만편) - 4
发布时间:22-06-14 03:42  发布人:崔秀香    关键词:   
양림은 리홍광 등 동지들과 함께 토의한 뒤 즉각 군중대회를 열고 체포한 50여명의 친일주구놈들을 처단하였다. 폭동 참가자들은 구호를 웨치고 노래를 부르면서 하마하자폭동의 승리를 경축하였다. 하마하자 5.7농민폭동은 남만항일투쟁의 새로운 발단이고 반석유격대발전의 힘찬 추진점이였다. 이 농민폭동의 직접적인 지도자는 후날의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제1사 사장 겸 정치위원 리홍광이였다. 리홍광은 또 반석중심현위 위원이기도 하였다.
반석로농의용군은 설립된 후 반석의 버리하투와 삼붕랍자(三棚砬子) 유격근거지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반북, 이통, 쌍양 등지 유격전과 더불어 반동지주의 쌀빼앗기투쟁을 기세 드높이 벌이였다. 버리하투에서 농민군중을 이끌어 쌀빼앗기투쟁을 7~8차 벌이였다면 삼붕랍자에서는 2~3차, 반북백자(磐北柏子)에선 한차례 가지며 지주의 소 9마리를 빼앗았다(김양, 리원명 저, 《항일영웅 리홍광》, 민족출판사-연변인민출판사, 2015년 1월 출판, 제69-70페이지). 일제의 정탐을 붙잡아 총살하기도 하고 반동지주와 일제간첩 여럿을 처단하기도 하였다.
이에 혈안이 된 일제놈들은 1932년 여름에 1개 련의 수비대와 2개 련의 위만군으로 반석의 유격근거지 소탕작전에 나섰다. 리홍광 등은 '강한 적은 피하고', '적이 피로한 다음에 친다'는 전술을 리용하여 적들의 정면공격을 피했다. 그리곤 감쪽같이 흑석진 부근의 산등성이에 매복하고 유격대원 약간명을 보내 적들을 소굴에서 이끌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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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전현 흑석진 주둔 일본수비대는 과연 리홍광의 유인전술에 걸려들었다. 적들이 어슬렁어슬렁 아군의 매복권내에 들어서자 유격대는 일제히 불벼락을 안기였다. 놈팽이들은 아우성을 치며 죽어번드러졌다. 적진은 말그대로 대혼란이요, 살아남은 놈들은 갈팡질팡하다가 줄행랑을 놓기 시작하였다.
통쾌한 전투였다. 부대의 꼬마홍광으로 불리우는 리학규는 처음 참가하는 전투여서 겁도 없었거니와 적들이 하나 둘 나동그라지는걸 보고 사기가 부쩍 올랐다. 이 때 수비대 세 놈이 큰길 옆 숲 속으로 기여들고 있었다. 학규는 수류탄을 꺼내 힘껏 뿌렸다.
"쾅!"
수류탄이 터지자 일본수비대 세놈이 황천객이 되였다. 학규는 와야~ 신이 났다. 싸움터를 수습할 때 그는 뻐득거리며 악을 쓰는 적 한놈을 쏘아보면서 총박죽으로 머리를 내리깠다. 이날 전투에서 리홍광 소속부대는 일본수비대 20여명을 쓰러눕히였다. 학규는 역시 처음으로 기마용보총을 가지고 좋아서 싱글벙글. 이 해 1932년에 갓 반석로농의용군에 입대한 리학규는 겨우 12살 햇내기였다.
이렇듯 리홍광 소속 반석로농의용군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서 이 해 7월부터 10월 사이 대갑흑의 서북구에서 매복습격전으로 위만군 60~70명을 살상하기도 하고 반석현 강남의 지주대장원에 주둔한 화전현 위만군 영부를 들이쳐 영장놈의 권총과 보총 70여자루를 로획하기도 하였다. 10월 중순에는 버리하투로부터 이통현 영성자로 전이하면서 리대방자(李大房子)의 반동지주무장 200여명을 들이쳐 리대방자를 함락하고 총 150여자루를 로획하는 기꺼운 전과를 올리였다(김양, 리원명 저, 《항일영웅 리홍광》, 민족출판사-연변인민출판사, 2015년 1월 출판, 제74페이지).
조선족이고 중공만주성위 군위서기인 양림한테서 배운 실전 군사지식이 크게 은을 냈다. 지난 봄(1932년)에 양림동지가 반석에 왔을 때 리홍광은 그의 전우들이고, 후일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와 제1군 시절 인민혁명군 주요 장령으로 싸우다가 쓰러진 조선족 박한종, 한호, 리송파, 리명해 등과 함께 양림이 직접 꾸린 현위 군사간부훈련반에서 잘 배웠다. 더구나 양림은 일찍 동북의 신흥무관학교와 북로군정서사관학교, 운남강무당, 황포군관학교를 다녔고 군사교관으로, 국민혁명군 제4군 독립퇀 제3영 영장으로 나섰던 위인이 아니던가.
그 때 리홍광은 성위 군위서기 양림과 조석으로 같이 지내면서 군사지식으로부터 군사지휘관이 지녀야 할 품성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많고 많은 것을 배웠다.
이제 아래에서 펼치지만 한차례 전투전의 사전정찰, 지형지물 익히기 등도 양림동지에게 깨우침을 받은 그였다. 그런 양림을, 자기보다 9년 선배인 군위서기를 무척 존경하면서 따랐다. 리홍광이 양정우 장군의 가장 믿음직한 전우라면 양정우 장군에 앞선 조선족 양림은 남만에서의 가장 믿음직한 전우이며 혁명의 대선배님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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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여름을 좌우로 성위 군위서기 양림이 반석을 떠나간 후 남만당조직과 리동광 소속 반석로농의용군은 당내 오유적 로선의 지배로 반석의 유격근거지와 활동지대를 잃고 부득불 화전 등지로 전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양림이 성위로 돌아가니 중심현위와 의용군의 지도자들은 정치정세와 군사경험이 따르지 못한데서 갈팡질팡하며 헤덤빈다.
더구나 필요한 경각성을 잃어 반동 곽가점의 반동지주무장이 간첩 둘이나 의용군 내부에 들어와 의용군 결책기구까지 뚫으며 우리 의용군의 제1분대까지 적측으로 분화되여 무기면이나 병력면이나 그 손실이 컸다. 이 때라고 적들-위만군과 반동지주무장, 토비들은 소고산(小孤山), 곽가점 동구(郭家店东沟), 하마하자(蛤蚂河子), 쌍마가(双马架) 등지에서 반석로농의용군과 항일군중들을 역습하였는데 우리측 희생자만 26명, 부상 5명, 체포된 동지 7명에 이른다(동북항일련군사료총서 《동북항일련군제1군》, 흑룡강인민출판사, 1986년 6월 출판, 제15페이지).
그러나 리홍광 등을 대표로 하는 동지들은 그렇듯 어려운 역경에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측과 구국군과 산림대간의 불필요한 마찰, 여러 항일지방무장들과의 마찰 속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고 하나 또 하나의 어려움을 모두 이겨내면서,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의용군의 활동지대를 반동, 반북, 쌍양, 이통 등지로 넓혀나갔다. 한편으로 반석중심현위 위원들인 리홍광과 리동광 소속 중공반석중심현위는 중공만주성위에 긴급보고(1932년 8월 30일)를 올려 남만당조직의 현실과 군사현실 등을 중공만주성위에 여실히 알리였다.
드디어 1932년 11월경에 중공만주성위는 성위 대리군위서기 양정우를 중공만주성위 대표로 남만에 파견하였다. 1932년 11월에 화전현 밀봉전자 숲 속에서 리홍광은 양정우동지를 뜨거이 맞이하였다(김양, 리원명 저, 《항일영웅 리홍광》, 민족출판사-연변인민출판사, 2015년 1월 출판, 제75페이지). 첫 만남이였다. 첫 만남에서 리상과 지향이 같아 의기투합한 그들은 서로 친밀한 전우가 되였다. 그들은 반석로농의용군을 령솔하여 반석 동부에 있는 석호구로 진출하여 부대를 정돈하기로 결의하였다.
1932년 12월 반석 석호구 대청관(石虎沟大清观)에서 중공반석중심현위 제3차 확대회의가 열리였다. 확대회의는 지도사업에서 나타난 원 중심현위의 오유를 비판하고 중심현위를 개조하였으며 반동구위 서기 박원찬(朴元灿)을 중공반석중심현위 제2임 서기로 선출하였다. 이어 발전중에 있는 리홍광 소속 반석로농반일의용군을 정식으로 중국로농홍군 제32군 남만유격대(홍군남만유격대로 략칭)로 재편성하였다. 남만유격대는 총대 아래 3개 유격대대와 1개 교도대를 두었는데, 총대장은 맹걸민, 총대 참모장은 리홍광이 맡았다(磐石抗日战争纪事, 길림시문명넷, 2015-09-08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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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만유격대의 정돈을 마친 그날 밤 양정우와 리홍광은 한 농가의 오막살이집에서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김양, 리원명 저, 《항일영웅 리홍광》, 민족출판사-연변인민출판사, 2015년 1월 출판, 제77페이지). 서로의 험난한 인생길을 추억하며 그들은 밤새는 줄 몰랐다. 그 때로부터 둘은 허물없는 각별한 사이로 되였으니 리홍광은 양정우 장군의 가장 믿음직하고 유능한 전우로 조수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33년 봄에 이르러 남만유격대는 지난해 1932년말의 120명으로부터 300여명으로 발전하였다. 이 과정에는 남만유격대 참모장 리홍광의 피타는 노력이 깃들었으니 리홍광은 매차례 전투 때마다 진두에서 돌격하고 퇴각하면서 전투를 승리에로 이끌었다. 그렇듯 리홍광의 전투용 가방 속에는 그가 손수 그린 지도들이 가득차 있다. 새로운 곳에 이르면 선참 휴식도 마다하고 지형관찰에 나서서 당지 로인들을 찾거나 주위의 산과 강, 길, 적의 거점 등과 자그마한 오솔길까지도 면밀히 살피군 한다.
조사연구를 마치면 통신원을 데리고 주변의 제일 높은 곳이나 산봉우리에 올라가 지남침으로 방향을 맞추고는 삼각자와 연필로 략도를 그린다. 그 지도가 상급에 올리는 둘도 없는 보고서이니 매번 전투나 군사포치가 있을 때마다 양정우와 더불어 연구에 몰두한다. 부상으로 담가에 누워서도 양정우와 작전계획을 연구하는 그여서 동지들은 "리참모장은 양사령의 제갈량이고 우리 부대의 기둥"이라고 칭찬해마지 않는다.
리홍광은 매차의 싸움에서 기동령활한 전략전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1933년 봄 일본군이 절대적으로 우세한 병력으로 반석 버리하투지구를 토벌할 때 리홍광은 일본수비대로 가장한 50~60명의 대오를 이끌고 통화현 륙도강으로 몇백리 급행군을 재우쳤다. 행군도중 흑할자구(黑瞎子沟)에 이르러 놈들의 전화를 리용하여 륙도강 위만군 영장에게 그곳으로 시찰가는 황군을 맞이하라고 통지하였다(박창욱 주필, 《조선족혁명렬사전》 제1집, 료녕인민출판사, 1983년 11월 출판, 제102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