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광인 련재작ㅣ중국혁명 속 우리 겨레 혁명가들(남만편) -3
发布时间:22-06-14 03:41  发布人:崔秀香    关键词:   

동북인민혁명군 1군 1사 사장 리홍광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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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1월, 심양에서 할빈으로 옮겨간 중공만주성위는 중공길림시특별지부서기 장진국(张振国)과 중공북만지위에서 병사사업을 하는 양군무(杨君武)를 륙속 반석지구에 파견하였다. 중공반석중심현위는 반석로농적위대를 '반석로농유격대'로 개칭하고 양군무를 정위로, 리홍광을 대장으로 임명하였다. 리홍광 등은 반석로농유격대를 이끌어 중심현위를 보호하는 과업을 선참으로 수행하였다.
1932년초 원 중공반석중심현위 공청단 선전부 책임자 리홍근가 변절했다. 이자는 위군을 도와 서버리하투를 오가면서 중공반석중심현위기관을 파괴하려고 음모를 꾸미였다. 이 정보를 입수한 리홍광은 두 대원과 함께 나무파는 농민으로 변장하고는 연통산거리로 들어가서 변절자 리홍근을 죽여버리였다(김양, 리원명 저, 《항일영웅 리홍광》, 민족출판사-연변인민출판사, 2015년 1월 출판, 제40페이지). 반석로농유격대는 반일회 회원들을 이끌어 '식량쟁탈투쟁'도 활발히 벌이였다.
1932년 봄파종을 앞두고 리홍광은 반일회 회원 360여명을 령솔하여 반석현 명성진거리에서 '식량쟁탈투쟁'대회을 열었다(김양, 리원명 저, 《항일영웅 리홍광》, 민족출판사-연변인민출판사, 2015년 1월 출판, 제39페이지). 그번 대회에서 큰대가리로 불리우는 당지의 악질대지주를 호되게 투쟁하고 그자의 곡창을 열어제껴 식량을 굶주림에 시달리는 빈고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또 총 두자루도 앗았다.
반석로농유격대를 춰세우자면 무기가 따라야 했다. 리홍광은 정위 양군무와 함께 유격대를 거느리고 호란진 일대의 농민들 속에 들어갔다. 그들은 농민들을 도와 논갈이를 하면서 항일구국의 도리를 선전하였다. 군중들은 그들을 친인처럼 여기면서 주동적으로 량포와 토포(두사람이 메고 다니는 구식포) 등을 내놓았다. 반일회 성원들이 분분히 유격대에 가입한 데서 유격대는 신속히 30여명으로 늘어났다. 이들 30여명중 한족대원 2~3명외 말짱 조선족대원들이였다.
그 때 호란진 서남쪽의 한 마을에는 '두번째 염라왕'이란 별호를 가진 반동지주 리보량(李宝亮)이란 자가 있었다. 이자는 9.18사변시에 농민들의 폭동을 방비하려고 악질지주와 건달패 20여명을 끌어모아가지고 소위 '대패대(大排队)'를 조직하여 갖은 행패를 부리였다. 리홍광과 양군무는 리보동 놈의 반동지주무장을 박살내기로 하고 현위의 비준으로 어느날 밤에 유격대를 거느리고 감쪽같이 리보동놈의 집을 포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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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홍광은 두 대원을 문 앞에 배치하고 집 주위에다 대원들을 매복시켰다. 그리고는 양군무와 같이 4~5명의 대원을 거느리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도박군차림이였다. 도박놀이에 여념없는 놈들은 리홍광이 대원들을 거느리고 들어오는 것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벽에는 20여자루의 장총과 권총이 걸려있었다. 리홍광이 눈짓을 하자 대원들은 신속히 집안의 네 구석으로 갈라졌다.
"꼼짝 말앗!"
리홍광이 권총을 꺼내들며 버럭 소리를 지르자 대원들도 권총을 빼들며 소리쳤다. 놈들이 어정쩡한 사이 20여자루의 총은 유격대 대원들의 손에 들어갔다(박창욱 주필, 조선족혁명렬사전 제1집, 료녕인민출판사, 1983년 11월 출판, 제94-95페이지). 리홍광은 권총을 놈들에게 겨누며 "우리는 항일유격대다. 일제를 물리치기 위해 무기를 빌리려고 한다. 너희들의 목숨은 다치지 않는다…"라고 하고는 그자들을 풀어주었다. 그들은 3명의 반일회원을 살해한 리보동놈을 체포한 후 군중대회를 열어 한바탕 투쟁하고는 처단해버렸다.
그 때 중공반석현위와 그후 중심현위는 반석현 서버리하투(西玻璃河套)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서버리하투는 60여세대의 조선족이 모여사는 산간마을이다. 이 산간마을에는 리부평(李富平, ?–1934)이란 녀인이 일가와 더불어 이 마을에서 사는 대다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남의 소작을 부치며 근근득식으로 살고 있었다. 집에는 삶의 기둥인 남편과 아들 셋이 있었는데 매일 아글타글해도 살림이 쪼들려 말이 아니였다. 무엇 때문에 생활은 갈수록 엉망인가, 그 때까지만 해도 리부평은 아리숭하기만 했다.
20년대 후기에 이르러 조선족혁명가들인 광주봉기 참가자 박봉 형제와 리동광, 오성륜 등이 반석 일대에 가서 맑스-레닌주의를 전파하고 러시아 10월혁명을 소개하며 혁명조직을 결성하기 시작하였다. 1930년 8월에는 중공반석현위가 조직됐는데 당원 모두가 조선족이였다. 이 때에야 리부평은 가난한 사람들이 늘 추위와 기아에 허덕이는 것은 일제놈들과 봉건통치배들 때문이며, 삶의 길은 이 자들과 싸우는 길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였다.
그후 중공반석현위는 중공반석중심현위로 승격되면서 그 소재지를 서버리하투에 두었다. 따라서 리홍광을 선두로 하는 남만유격대가 조직되고 서버리하투는 반석 항일유격근거지의 중심으로 되였다. 리부평의 일가식솔은 모두 적위대, 유격대원, 부녀위원, 소년아동단원으로 되여 남달리 존경받는 혁명일가로 되여 리홍광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 이제 본문에서 리홍광을 둘러싼 리부평의 이야기는 거듭 이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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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봄에 중공만주성위는 성위 군위서기 양림을 반석에 파견하였다. 조선족 양림은 반석에 이른 후 전면적으로 무장하여 항일할 데 관한 성당위의 지시를 전달하였다. 이어 항일무장투쟁골간을 키우기 위하여 중공반석중심현위를 도와 군사간부훈련반을 꾸리였다. 맹걸민, 리홍광, 박한종, 한호, 리송파, 리명해 등 한패의 동지들이 군사간부훈련반에 참가하여 정치와 군사를 배웠다(동북항일련군사료총서 《동북항일련군제1군》, 흑룡강인민출판사, 1986년 6월 출판, 제12페이지). 이와 더불어 우수한 동지들을 여러 위군들 속에 파견하여 병사쟁취사업을 하도록 하였다. 리홍광은 이통현 영성자의 위만군 속에 들어갔다.
역시 이 해 1932년 봄 일이고 리부평 관련 이야기다.
리홍광과 같이 그의 수하에서 활동하던 리부평의 남편이 일제놈들에게 추격을 당하는 리홍광을 엄호하다가 불행히 체포되여 생매장을 당했다. 리부평의 맏아들이 리부평의 지지하에 아버지의 원쑤를 갚겠다고 리홍광의 유격대에 참가하였다. 그러던 그는 일년도 못되여 깍지산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거듭 친인을 잃은 참혹한 현실은 리부평의 가슴에 너무나 아물지 않는 아픈 상처를 남겼지만 그는 결국 꺼꾸러지지 않았다. 녀성은 약하지만 강자이다. 그는 슬픔과 비애를 백배의 복수심으로 바꾸었다.
반석을 비롯한 남만의 조선족은 바로 이 같은 사람들이다. 중공반석중심현위는 중공만주성위 군위서기 양림의 지도하에서 1932년 6월 4일 반석현 반동 삼도강의 소금장(磐东三道岗小金厂)에서 반석로농반일의용군(반석의용군으로 략칭)을 조직하였다. 대외로는 만주로농반일의용군 제1군 제4종대로 불리웠는데 산하에 3개 분대(분대마다 10여명으로 구성)를 두었다. 조선족 대원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였다. 리홍광은 제2분대 정위로 임명되였다.
이어 앞서 양림은 리홍광과 함께 반석의 '4.3', '5.1', '5.7' 농민폭동을 련속 조직지도하였다. 그중에서도 농민들이 대거 동원되고 기세가 큰 것은 5월 7일의 하마하자폭동이였다. 하마하자(哈马河子) 일대는 당의 력량이 비교적 박약하고 친일특무조직인 보민회 활동이 창궐한 지방이였다. 리홍광이 적위대를 거느리고 악명 높은 보민회 부회장 백가놈을 처단하고 장애물을 제거하자 하마하자 일대 농민들이 신속히 발동되였다.
1932년 5월 7일, 이날 따라 날씨가 류달리 따뜻하였다. 여러 군중단체를 선두로 한 하마하자 일대의 남녀로소들이 망치, 도끼, 날창 등 연장을 들고 반일폭동장소로 물밀듯이 모여들었다. 어느덧 회의장소에는 1,000여명의 폭동자들이 집결하였다. 구호소리, 노래소리 울려퍼지는 가운데 리홍광이 "모두가 일떠나 힘을 합쳐 싸워야 한다"는 요지의 동원보고를 하였다.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일제주구를 때려부시자!"는 구호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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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폭동대오는 양림과 리홍광의 지도하에 시위행진을 하면서 호호탕탕하게 나아갔다. 시위대렬은 이르는 곳마다 일제놈들과 그 주구놈들의 피비린 만행을 규탄하였는데 하루 동안에 50여명의 일제주구를 체포하였다. 한간지주놈들의 식량을 몰수하여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누어준 것만 해도 1,000여섬이나 된다.
하마하자폭동 기세는 료원의 불길처럼 이통, 쌍양, 반석 지역으로 급속히 파급되여갔다. 폭동대오는 시초의 1,000여명으로부터 4,000여명으로 늘어났다. 이어 폭동군중들은 "중국철도에 일제의 기차가 통하지 못한다!"고 웨치면서 로령일대의 10여리 구간 레루를 뒤집어놓았다. 그래도 성차지 않아 침목과 전선대를 불사르고 철교마저 모두 파괴해버렸다. 적들의 교통운수는 10여일이나 마비상태에 빠지게 되였다.
이 때 1,000여명의 위만군이 기관총을 가지고 폭동대오를 탄압하려고 서둘렀다. 양림의 지시에 따라 리홍광은 부녀선전대를 내세워 위만군에 정치공세를 들이댔다. 지방당조직들에서도 위만군 내부에 사람을 파견하여 벗을 사귀고 친척을 찾는 방법으로 와해공작을 내밀었다. 중국사람은 중국사람에게 총을 쏘지 않는다는 도리 앞에서 위만군은 어쩌지 못하고 물러서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