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광인 련재작ㅣ중국혁명 속 우리 겨레 혁명가들(남만편) - 2
发布时间:22-06-14 03:36  发布人:崔秀香    关键词:   

동북인민혁명군 1군 1사 사장 리홍광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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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홍광은 울분이 터져올랐다. 친일지주 하련생이고 일본경찰이고 마구 들부시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기만 했다. 리홍광은 한사람의 힘이 얼마나 미약한가를 통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그는 가족을 넘어 마을을 넘어 세상 돌아가는 사회에 눈길을 돌려본다. 진보적 청년들을 통해 갈수록 강하게 불어오는 맑스주의사상, 10월혁명의 사상에 귀가 솔깃하다. 후에야 안 일이지만 1926년에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남만도위원회가 반석에 나타나면서 이통땅에도 그 영향이 미치더니 1927년 5월에 반석, 이통 일대에 '재만농민동맹'이 결성된다(김창국 저, 《남만인민항일투쟁사》, 연변인민출판사, 1986년 5월 출판, 제10페이지).
(살길은 이것이로구나!)
희열에 넘친 리홍광은 1927년 그 해로 '재만농민동맹'에 가입했다. 그는 재만농민동맹 회원 3,000~5,000명중의 한사람, 아니 주변의 화목림자, 태평구, 영성자 등지를 망라한 당지 재만농민동맹의 주요골간이 되였다. 보다 정신이 번쩍 드는 일은 1930년 6월 반석현 반동구 곽가점(磐东区郭家店)에서 중공반석림시현위가, 이 해 8월에는 중공반석현위가 정식 설립되면서 현위 산하에 반동과 반북 2개 구위와 이통과 쌍양 2개 특별지부(동북항일련군사료총서 《동북항일련군제1군》, 흑룡강인민출판사, 1986년 6월 출판, 제3페이지)를 둔 것. 여기 재만농민동맹이 중국공산당켠에 선 것을 1930년 8월 17일자 《조선일보》가 제7면 기사-<재만조선농민동맹 중국공산당과합동>에서도 알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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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 1931년 8월경에 리홍광은 이통현 삼도구에서 첫패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면서 중공이통특별지부 조직위원 겸 삼도구 당지부서기로 활동한다. 리홍광과 그의 동지들이 이통 각지에서 당조직 지도하의 농민회, 부녀회, 청년회, 아동단 등 혁명단체를 조직하자 그 해 10살에 난 막내동생 리학규(1921-1934)는 아동단원이 되였으며 형님의 의무통신원으로 나섰다.
이듬해 가을의 어느날 리학규는 비밀편지를 이통에 전하라는 형님의 부탁을 받았다. 편지를 전하자면 적 경계가 삼엄한 200여리 길을 헤쳐가야 했다. 학규는 생각 끝에 수수대 속을 파내고 그 속에 편지를 돌돌 말아넣고 속을 다시 제대로 채웠다. 그리곤 수수대로 장난감총을 만들어 메고는 200여리 길에 올랐다. 허리에 두른 보자기 속엔 어머니가 갖춰준 주먹밥이 들어있었다.
학규는 스적스적 걸음을 옮겨놓았지만 해종일 산길을 걷다보니 발이 부르텄고 맥도 진했다. 저녁에 한 농가에 들어가 하루밤을 자고나니 힘이 났다. 사흘 째 되던 날 영성자라고 하는 한 거리에 들어섰다. 거리는 군대나부랭이들로 득실거렸다. 행인들은 놈들의 까근한 조사를 당해야 했다. 학규가 먼발치에서 이 광경을 훔쳐보는데 람루한 옷을 걸친 한 소년이 걸어왔다.
"됐다!"
기발한 생각이 뇌리를 쳤다. 학규는 다짜고짜 그 소년을 거리바닥에 재껴뜨리고 내꼴봐라 하고 달아났다.
"이 새끼?"
얼결에 봉변을 당한 소년은 씩씩거리며 학규를 뒤쫓았다. 적 보초병은 아이들 싸움으로만 보고 그들이 보초선을 넘어섰으나 관계치 않았다. 이 같이 하나 또 하나의 위험구간을 통과했다. 리학규는 옹근 3일 만에 이통현성에 들어섰다. 비밀련락원 조아저씨는 놀랐다. 어른도 아닌 아이가 200리 험한 길을 달려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은 모양이였다.
"넌 누구집 아이냐?"
"난 아동단원이예요."
조아저씨는 어깨를 으쓱하는 아이가 더없이 기특해보였다. 이는 형님 리홍광의 영향으로 혁명의 걸음마를 뗀 항일아동단원 리학규의 머나먼 장거리 통신길이였다. 근 40년 전 연변일보사 편집기자 시절 필자는 통화지구 현지취재차 휘남현성 조양진 자택에서 휘남현정협에 다니는 김운룡 선생을 만났는데 그날은 1985년 4월 6일 밤, 초면이자 구면인 우리는 11년이란 나이 격차와는 무관하게 밤을 패면서 항일사 이야기를 나누었다. 중공남만당 책임자 리동광(李东光)의 부인 김로숙에 대하여, 리홍광의 막내동생 리학규에 대하여 자상히 듣게 된 것도 그날 밤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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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년대 초반 나어린 리학규가 그러했다면 어린 아이들을 제외한 리홍광의 온집식구도 례외가 아니다. 1926년에 리홍광의 안해 심재성이 중국 이통으로 온 후 리홍광과 심재성 사이에 첫 딸이 태여나고 1930년에 둘째 딸 화순이가 태여났다(김양, 리원명 저, 《항일영웅 리홍광》, 민족출판사-연변인민출판사, 2015년 1월 출판, 제228페이지). 원래의 여덟식구가 열하나로 늘어난 데다가 1927년부터 리홍광이 혁명활동으로 바깥으로 도니 농사지을 겨를조차 없다.
그만큼 생활은 쪼들렸지만 리홍광의 집은 혁명자들의 비밀아지트로 되여 분주하기만 하다. 홍광의 아버지는 농사를 지으면서 아들의 일을 도와나섰다면 어머니는 없는 살림에도 자기 집을 거치는 혁명자들을 친자식처럼 돌봐주었다. 그에 힘입으면서 리홍광은 중공반석현위의 직접적인 지도하에서 이통현 영성자, 화목림자, 삼도구 등 일대에서 공청단, 소선대, 아동단, 반일회, 농민회 등 혁명단체들을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드세게 밀고나갔다.
1930년 8월 중공반석현위가 정식으로 설립되자 현위에서는 2개 무장대오를 조직했다(중국조선민족사학회 홍광정신교육추진회 편, 《철혈충혼 리홍광과 그의 전우들》, 료녕민족출판사, 2019년 8월 3차 인쇄, 제214페이지). 하나는 리홍광을 대장으로 하는, 이통현 류사저자와 반석 서버리하투에 조직한 반석로동농민적위대(략칭하여 반석로농적위대)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족 진옥진과 박한종을 정부대장으로, 현위기관을 보호하기 위하여 조직한 특무대였다. 그중 특무대는 원래 중공반동구위 서기 리동광이 조직한 특무대였는데 현위 설립과 더불어 현위 직속 특무대로 탈바꿈하게 되였다.
1930년 그 시절 반석 일대에는 20년대 전반에 걸쳐 이어오는 '조선인민회(즉 보민회)'가 활동하고 있었다. 보민회는 무고한 조선사람들을 강박적으로 입회시키면서 도처에서 나쁜 일만을 일삼는 반동친일분자들로 무어졌다. 이 해 8월 중공반석현위가 조직된 후 리홍광이 이끄는 반석로농적위대는 현위특무대와 긴밀히 배합하면서 도처에서 일제반동조직인 보민회와 변절자들을 처단했으며 또한 일제놈들과 결탁하여 농민들을 억압하는 한간지주놈들을 소멸하여 이름을 떨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적위대와 특무대를 흔히 '개잡이대(打狗队)'라고도 불렀다. 이 때의 보민회 타격 소식이 1930년대초 서울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자주 기사로 실리였다.
1931년 8월 중공반석현위는 중공반석중심현위로 개편되여 남만지구의 당의 지도기관으로 떠올랐다. 그뒤 이 해 9.18사변을 겪고 12월에 이르러 반석로농적위대와 특무대를 통합하여 리홍광을 대장으로, 리송파를 정위로 하는 '반석적색유격대'로 개편됐다(중국조선민족사학회 홍광정신교육추진회 편, 《철혈충혼 리홍광과 그의 전우들》, 료녕민족출판사, 2019년 8월 3차 인쇄, 제215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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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의 수요로 중심현위에서는 리홍광의 가족을 반석지구에로 이주하도록 했다. 그렇게 옮겨앉은 곳이 반석현 로륙구의 판묘자(老六区板庙子)다. 그 때 리홍광의 일가족은 할아버지와 부모님들, 아내와 녀동생과 남동생들 그리고 어린 딸애 등이였다. 반석으로 이주하면서 1926년경에 이통현 삼도구에서 출생한 맏딸은 삼도구의 한 한족집에 맡기고, 나어린 세 녀동생들은 서둘러 시집이라고 보냈다.
리홍광의 안해 심재성은 가족의 생계로 한돐 밖에 안되는 1930년생 둘째딸 리화순(李和顺)을 집에 두고 장춘 부근의 한 농장에 가서 품팔이에 나서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 같이 집에는 리홍광의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와 어린 딸애 리화순 넷이 남았다(김양, 리원명 저, 《항일영웅 리홍광》, 민족출판사-연변인민출판사, 2015년 1월 출판, 제229페이지).
그러나 1985년 그 시절 휘남현정협에서 사업하는 김운룡선생이 필자와의 이야기는 이와 다르다. 장춘쪽에는 리홍광의 안해 심재성 뿐 아니라 홍광의 아버지와 남동생 학규도 장춘에 있는 조선난민소로 갔다고 한다. 품팔이에 나선 리홍광의 어머니와 같이 생활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다가 리홍광의 신분이 알려지면서 장춘의 일본헌병대 놈들이 리복영과 리학규를 붙들어다가 갖가지 고문을 했고 나중에 리복영이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게 되자 별 수 없이 그들 부자를 풀어주었다.
그후 얼마 안되여 리학규는 자기도 유격대원이 되겠다면서 형님 리홍광을 찾아 반석으로 떠났고, 리복영은 적들에게 시달린 후유증으로 한많은 세상을 떠나셨다. 지금도 그날의 휘남현성 단층집 허술한 집에서 이야기하던 김운룡선생의 이야기가 귀전에 들리는듯 생생하나 이 두가지 이야기중 어느것이 옳은지는 찍어 말하기 어렵다. 남만의 조선족항일사의 권위연구가인 김운룡선생이여서 더구나 그러하다. 어찌하든 리홍광의 아버지가 적들의 갖은 고문 후유증으로 돌아가고 리학규가 형님이 이끄는 반석유격대에 가입한 것은 사실로 알려진다.
1931년 8월에 중공반석현위는 중공반석중심현위로 개편되면서 중공만주성위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으며 명실공히 남만지구의 당의 지도기관으로 되였다. 이 해 9월 18일 일제가 9.18사변을 발동하여 전 동북을 강점하자 중공반석중심현위는 성위의 지시에 좇아 당이 지도하는 항일무장 조직을 급선무로 내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