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광인 련재작ㅣ중국혁명 속 우리 겨레 혁명가들(남만편) 1
发布时间:22-06-14 03:34  发布人:崔秀香    关键词:   

동북인민혁명군 1군 1사 사장 리홍광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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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렬처절한 남만의 항일무장투쟁에서 양정우 장군과 더불어 선참 우러러보는 인물은 리홍광이다. 리홍광은 남만 항일무장의 창시자의 한사람이고 동북항일련군의 전신인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의 1사 사장이고 참모장이여서 그럴 만도 하다. 리홍광은 중공남만당조직이나 항일무장의 최고위급 인물은 아닌데 왜서 양정우 장군에 이어 리홍광을 선참 떠올리게 될가, 왜서 양정우 장군의 친밀한 전우이며 유력한 조수라고 할가, 이를 알자면 피어린 당년의 남만항일무장투쟁 속에 들어가 걸출한 군사장령 리홍광의 발자취를 추적하여 보아야 할 것이다.
1983년 11월 료녕인민출판사가 출판한 《조선족혁명렬사전》 제1집에 오른 리홍광전기에 따르면 리홍광(李红光, 1910-1935)은 경기도 룡임군 단삼동에서 태여난 것으로 기록되여있다. 지난 80년대 공개간행물에 오른 중국측 리홍광 관련 전기나 자료들에서는 모두 이 같이 적고 있다. 어떤 글에서는 룡암군이라고도 하지만 이는 리홍광연구가 따르지 못하는 현실에서 나온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
최근년간, 적절히 말하면 2011년 1월 26일 한국측에 의해 새롭게 떠오른 <용인 출신으로 새롭게 밝혀진 항일영웅 이홍광>(www.yongin21.co.kr>news)에 의하면 이와 전혀 다르다. 2011년 1월 20일경 한국의 용인이씨 청백리공파 종중 고문인 이광섭씨의 제보에 의해 리홍광은 그 출생지가 용임이 아닌 용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어 서울여대 사학과 이원명 교수는 연변대학 관계자와 함께 리홍광이 용인이씨라는 것을 밝혀내고, 용인이씨를 처음으로 주장한 리광섭씨와 함께 용인이씨 족보에서 리홍광의 가계를 찾아냈다.
그들은 리홍광 가계 찾기와 한국에 거주하는 리홍광 관련 친인들의 증언을 통해 리홍광의 출생지가 오늘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신원리(龙仁市处仁区蒲谷邑新院里) 400번지(김양-이원명 저, 평전 《항일영웅 리홍광》에서는 401번지로 적고 있다)임을 처음으로 밝혀냈다. 이는 리홍광 가계 연구에서의 중요한 발견이 아닐 수 없다.
리광섭씨와 이원명 교수의 용인리씨 족보보기에 의하면 리홍광의 본명은 리홍규(鸿圭)로 되여있다. 항일렬사인 리홍광의 막내 남동생 리학해도 본명이 리학규(鹤圭)로 밝혀진다. 할아버지는 리준상(李骏相)으로, 아버지는 리복영(李福荣)으로 나온다. 가계에는 또 리홍광이 조선 선조(宣祖) 때 무관인 리일 장군의 13대 손이고 리일 장군은 선조 때 녀진족인 니탕개의 란을 진압하고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우고 한성부 판윤을 지냈음이 알려지고 있다.
이로부터 보면 리홍광의 본명은 리홍해(李弘海)가 아니라 리홍규이며 후에는 리홍해, 리의산(李義山) 등으로 부르다가 혁명에 참가한 후 리홍광으로 불렀음을 잘 알 수 있다. 또 리홍광이 태여나던 날은 1910년 8월 29일, 조선이 일본침략자들에 의해 강제적으로 병탄된 해이고 날이여서 천성적으로 일본침략자들은 불공대천의 원쑤놈들이기에 싸워야 함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의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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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홍광의 큰할아버지 리규상(李圭相, 용인리씨 제34세, 1854-1906)은 1878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를 력임한 분이고, 할아버지 리준상(용인리씨 제34세, 1871-1950)는 기골이 장대하고 학식이 넓으며 17세에 벌써 무과에 급제한 분(김양, 리원명 저, 항일영웅 리홍광, 민족출판사-연변인민출판사, 2015년 1월 출판, 제4페이지)이라고 한다. 큰할아버지, 할아버지가 모두 무과 출신들이라 그 강인한 성격이 맏손자인 어린 리홍광에게 고스란히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 없다.
일례로, 리홍광은 어려서부터 깊은 학식을 소유한 할아버지한테서 조선력사 이야기며 의병투쟁 이야기를 즐겨 들었으니 제일 즐겨들은 이야기는 임진왜란 때 일본침략자들을 무리로 깊은 바다에 처넣은 리순신 장군이라고 한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나어린 리홍광은 자기도 크면 리순신 장군과 같은 사람이 되겠다고 다졌다니 감탄이 절로 난다.
리홍광이 10살 나던 해 아버지 리복영은 어려운 살림에도 아들의 장래를 걱정하면서 맏아들 홍광을 당지의 보통학교에 보내였다. 그런데 이듬해 봄에 리홍광은 일본경찰의 아들이 길목에서 조선아이를 막아놓고 마구 때리는 것을 보고 참을 수 없었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리홍광은 정의감에 북받쳐 그 일본경찰의 아이를 혼뜨겁냈다(용인 출신으로 새롭게 밝혀진 항일영웅 이홍광, www.yongin21.co.kr>news, 2011.01.26).
이튿날 리홍광은 학교에 갔다가 일본선생에게 한바탕 얻어맞았고 억울하게 쫓겨났다. 일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홍광의 아버지까지 경찰서에 끌려가 한주일 동안이나 류치장에 갇혀 고생했고 그 때부터 일본놈들의 감시를 당했다고 하니, 리홍광은 이후 크면 이 원쑤를 갚겠다면서 어린 두 주먹을 부르쥐였다. 알고보니 리홍광 여러 전기들에서 이야기하는, 어려운 생활로 1년 밖에 공부하지 못했다는 건 사실이 아니였다.
리홍광의 일가족으로 말하면 할아버지 리준상에 아버지 리복영과 어머니 정창학(郑昌学), 맏이인 홍광, 녀동생 경희(庆姬), 경순(敬淳), 경남(庆南) 그리고 남동생 학규까지 모두 여덟 식구였다. 막내 학규(일명 학해)와는 11살 차이로 큰형이자 아버지와도 진배없다. 밑에 녀동생이거나 남동생한테는 미더운 오빠와 형님이였다. 그런 리홍광은 1919년 전 민족적인 3.1운동을 겪으며 마음 속에는 삼천리강산을 짓밟은 일본침략자들에 대한 원한이 부글부글 끓어 오르더니 보통학교에 입학한 1학년 시절에 무지곡직 조선아이를 마구 때리는 일본경찰의 아들을 패주기에 이르렀다.
리홍광은 고향에서 일제의 보통학교 1학년 밖에 다니지 못하였으나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한 아이로 자란데서 자학으로 우리글을 줄줄 쓸 수 있는 정도에 이르렀다. 할아버지 리준상은 가난한 살림이라지만 학식이 있은데서 손자 홍광에게 한문, 경서 등을 가르침에 게으르지 않았다. 한데서 리홍광은 우리 글이나 중국어, 일본말에 이르기까지 소학교 졸업생처럼 상당한 수준을 갖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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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우리 나이로 16살 정도를 잡은 리홍광은 처녀총각 15세 무렵이면 의례 결혼하던 시절이라 부모님들의 주선으로 고향마을에서 맘씨 고운 처녀 심재성(沈载成)과 마주섰다. 결혼까지는 이르지 못했으나 남녀 사이 그 일을 치르고 말았으니 그 쯤이면 총각 때를 벗은 신랑감인데, 섬나라 오랑캐-일본놈들과는 도저히 한하늘을 떠이고 살 수 없었다. 그가 할아버지, 아버지와 상의하고 일본놈들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서 가정살림도 춰세우겠다 하니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절대 찬성이였다.
1926년, 그렇게 할아버지, 부모님, 세 누이동생, 어린 남동생까지 여덟이 고향을 등지고 압록강을 건넜는데 정착한 곳이 중국 길림성 이통현 류사저자툰(留沙咀子屯)이였다. 우리측 리홍광 여러 전기나 자료들에서는 모두 이 같이 적고 있다. 그러나 상기 《항일영웅 리홍광》이나 한국 용인쪽 연구에서는 중국행 그 해는 1926년 아닌 1925년이며, 이주지도 남만의 이통현 쪽이 아닌 반석현 자목양자 자목장자구 도목구(柞木阳子柞木场子沟倒木沟) 깊은 산골이라고 밝히여 신선한 감을 주고 있다.
하나 밝히고 지나야 함은 리홍광의 미래 안해 심재성이다. 1925년 중국으로 올 때 심재성은 혼례식을 올리지 않은 데다가 임신중이였으므로 시집이 될 리씨댁과 동행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김양, 리원명 저, 《항일영웅 리홍광》, 민족출판사-연변인민출판사, 2015년 1월 출판, 제22페이지). 이후 이듬해 이들 일가가 이통현 삼도구 류사저자툰(伊通县三道沟留沙咀子屯)로 재이사하여서야 심재성이 뒤미처 이르면서 리씨 일가족과 합류한다.
허나 1920년대 중반 그 세월 어디간들 가난한 사람 시름놓고 살아볼 천지가 있을가, 리홍광네는 지방에서 반일투쟁을 벌이는 박래훈 일가와 함께 류사저자툰 마을 뒤 산비탈에다 헐망한 4간 짜리 초가집을 짓고 각기 2간씩 차지하고 힘겨운 소작생활을 하여야 했다. 이국땅 멀리 남만까지도 도처에 일본놈들이 얼씬거리는데, 종일 가도 해가 가도 가난의 멍에는 두 어깨를 지지누르기만 한다.
(이놈의 어지러운 세상 언제면 끝장 볼가?)
갈수록 리홍광은 말수가 적어지면서 굴강한 성격으로 굳어갔다. 그러던 1927년 이 해 늦가을의 어느 날, 동네 한족로인 왕씨한테 불행한 일이 생기였다. 한해 농사 아글타글하며 식량과 소작료를 마련하였는데 비적놈들에게 몽땅 빼앗기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그 이튿날 친일지주 하련생은 소작료를 내지 않는다고 왕씨부부를 마구 잡아패더니 귀여운 딸애마저 인질로 빼앗는다. 남의 일 같질 않았다.
온밤을 두고 분노로 떨던 리홍광은 이튿날 날이 밝아오자 마을의 몇몇 장정들을 데리고 몽둥이를 들고 하련생의 집으로 달려가 야단을 쳤다. 끌끌한 청년들 앞에서 하련생은 더는 시간을 끌지 못하고 왕씨의 딸을 내줄 수 밖에 없었다. 이튿날 리홍광은 산에 가서 땔나무를 하는데 친일지주의 고발을 받은 일본경찰들이 현성에서 달려와 홍광의 초가집을 발칵 뒤집어놓은 뒤 왕씨 부부의 딸애를 다시 끌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