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광인 련재작ㅣ중국혁명 속 우리 겨레 혁명가들(관내편) - 228
发布时间:22-03-18 11:05  发布人:崔秀香    关键词:   
약속한 날 아침 7시, 한청이 압록강다리를 건너 조선측 교두에서 쏘련군사령을 만나고 쏘련군측의 의견대로 그날 12시에 전체 조선의용군선견종대가 군악을 울리며 의용군행진곡 노래높이 조선 신의주에 들어섰다. 그런데 쏘련군사령은 포츠담(波茨坦) 3개 국 회의 결의에 따라 남조선에는 미군만 진입하고 북조선에는 쏘련군만 진입하기로 되였다면서 무장해제를 요구하였다. 한청은 자기의 소속부대는 중국공산당의 지도를 받는 조선의용군이니 절대로 무장을 해제할 수 없다고 강경하게 나왔다.
그 때 조선의용군 주둔지는 신의주중학교로서 회견실 뒤칸에는 쏘련군정위와 김일성장군, 평안북도 보안국 국장도 있었다고 한청은 회고하고 있다. 쏘련군사령과의 토의결과 서로의 평화적 해결에 동의하고 조선의용군은 무기를 집중하여 보관하고 관련훈련을 하기로 하였다. 한청은 평안북도당위원회 회의에 초청을 받고 김일성 장군도 참석하였다.
그후 한청은 김일성 장군의 초청으로 평양에 가서 김장군을 만나고 초청식사를 받았다. 서로 토의결과 한청의 의견대로 조선의용군선견종대는 동북으로 가서 원 계획대로 군대건설에 나서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러나 쏘련군 제5군 련대참모장은 김일성 장군이 동의해도 안된다면서 무장을 해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중국공산당을 통하여 쏘련공산당에 항의하겠다는 한청의 또 한차례 강경한 태도는 쏘련군참모장을 한걸음 물러서게 만들었다.
한청 등이 령솔한 조선의용군선견종대는 압록강 건너 조선땅에 처음 진출한 부대로 알려진다. 한청은 조선땅에서 쏘련군 관련 지도자들과 김일성 장군을 만난 첫 사람이다. 쏘련군참모장은 조선의용군선견종대가 동북으로 건너가는 것을 동의하고 한청 등의 요구대로 신의주에 돌아온 후 신의주에 집중된 평안북도의 무기들중 일본군의 보총 500자루, 경기관총 20정을 넘겨주었다. 11월 5일에는 쏘련군의 환송을 받으면서 압록강철교를 건너 심양으로 돌아가 무정이 지도하는 조선의용군사령부와 회합을 가지였다.
조선의용군 사령 무정과 의용군 총부는 연안의 조선혁명군정학교 교직원과 학생들로 편성된 조선의용군 300여명을 이끌고 1945년 9월 15일(한청의 견해) 혁명의 성지 연안을 출발하여 도보로 혹은 기차로 3,000여리 귀국로정에 올랐다. 도중에서 각지의 조선의용군부대들과 합류하니 그 대오 무려 700여명이다. 이 대오가 그 해 1945년 11월초에 심양에 이르고 심양의 조선의용군선견종대와 회합하니 무려 2,000여명의 끌끌한 조선사람 대오를 이룬다(《한청항일혁명회상록》. 연변인민출판사, 2011년 12월 출판, 제283페이지).
심양의 조선사람들은 오랜만에, 적절히 말하면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을 강제로 병탄한 36년래 처음으로 자기의 군대—조선의용군을 보게 되였다. 이 때를 두고 조선의용군전사 최강은 이렇게 회고하였다(최강회고. 《한청항일혁명회상록》. 연변인민출판사, 2011년 12월 출판, 제290페이지).
조선인동포들은 35년간 보지 못한 자기의 군대—조선의용군을 최대의 열정과 성심으로 환영하였다. 우리들은 처음으로 조선사람의 집에서 조선이밥, 조선김치, 조선곡주를 먹어보았다. 우리들은 동포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으면서 격동된 심정으로 며칠 푹 쉬고 로독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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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연안과 태항산 등지를 떠나 심양에 금방 이른 조선의용군부대의 진실한 모습이다. 최강의 회고에 따르면 무정 등 조선의용군총부는 심양 남경거리 5구간(지금의 성건설은행 자리)에 자리잡고 부대숙영지는 시교의 오가황(吴家荒, 大兴村), 대석교(大石桥) 일대의 조선마을들이였다. 한청은 조선에서 돌아온 조선의용군선견종대는 황고구 명렴가두(皇姑区明廉街)에 주둔하였다고 회고하였다. 리화림의 회고에 따르면 "무정사령원이 령솔하는 조선의용군은 항복을 거역하는 일본군대의 저애를 받는 바람에 순조롭게 동북을 거쳐 조선에 진입하지 못했다."(리화림 구술. 《머나먼 려정》. 민족출판사, 2012년 5월 출판, 196페이지).
1945년 11월 7일은 쏘련 10월혁명 기념일이다. 이 기념일을 맞아 쏘련홍군과 조선의용군은 심양역광장에서 10월혁명과 쏘련홍군기념탑의 락성을 기념하면서 성대한 열병식을 가지였다. 열병식에는 조선의용군 2,000여명 전원이 참가하여 성세를 이루었다. 이어 시위행진이 있었다. 행진대오는 심양역에서 출발하여 성내, 중앙거리를 거쳐 북릉(北陵)까지 나아갔다.
1945년 11월 16일, 무정 등은 중공중앙동북국의 지시에 좇아 심양시 교외의 우홍구오가황조선인학교에서 조선의용군 전체대회를 소집하였다(《한청항일혁명회상록》. 연변인민출판사, 2011년 12월 출판, 제291페이지). 조선의용군 사령 무정이 친히 대회를 사회하고 연설하였다. 그는 연설에서 항일전쟁승리후의 시국을 분석한 뒤 소수의 간부가 조선에 들어가서 당정사업을 하는외 대부분은 계속 동북 각 성의 조선사람 집거지구로 가서 조선인민을 발동하고 조직하여 우리의 력량을 확대하며 공고한 동북근거지건설을 위하여 기여할 것이라고 하였다.
무정은 계속하여 새 부대편성을 선포하였다. 무정의 선포에 따르면 현유의 조선의용군을 3개 지대로 나누었다. 제1지대는 남만에서, 제3지대는 북만에서, 제5지대는 동만에서 활동하기로 하였다. 제1지대 지대장은 김웅, 정위 방호산(方虎山, 통화지구에서 활동)이고 제3지대 지대장은 김택명(金泽明, 즉 李相朝), 정위 주덕해(朱德海, 할빈지구에서 활동)가 임명되였다. 이날 대회에 앞서 무정은 압록강지대 지대장에 김호(金浩, 즉 蔡国藩), 정위에 리명(李明), 정치부 주임에 김강(金刚)을 임명하면서 단동지구에 진출하여 산동지구에서 온 리명부대를 토대로 활동하도록 명령하였다.
회의후 심양 조선의용군선견종대는 무정 사령원의 명령으로 종대 전체가 김웅의 제1지대에 편입되였다. 한청은 연안간부 6명과 더불어 한개 소대 인원들로 조선의용군독립대대를 뭇고 료동지구에 파견되였다.
조선의용군 정위 박일우(朴一禹)는 제5지대(지대장에 李益星, 정위에 朴一禹)를 따라 연변행에 나섰다. 박일우 등은 길림에 도착한 뒤 당지 조선사람들의 요구로 제5지대의 80여명으로 조선의용군 제7지대를 조직하여주었다. 지대장에 박훈일(朴勋一), 부지대장에 최명(崔明)이 임명되고 활동범위를 길림지구로 하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