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광인 련재작ㅣ중국혁명 속 우리 겨레 혁명가들(관내편) - 227
发布时间:22-03-18 11:04  发布人:崔秀香    关键词:   
태항지대는 300여명에 달하는 대부대로서 부대정돈을 거치면서 간부중대와 로농중대 2개 중대를 편성하였다. 이 밖에 후근중대를 두고 부대의 공급과 의료부문을 책임지게 하였다.
1945년 8월 29일, 태항지대는 국치일을 맞아 태항산 남장촌과 하남점을 출발하게 되였다. 때는 장마철이라 청장하의 물이 불어 그들 모두는 바지를 벗어들고 무기와 짐들을 머리에 인채 허리까지 치는 강을 건너섰다. 지지리한 36년간의 망국노생활 끝에 곧 조국으로 개선하게 된다니 정녕 꿈만 같다. 정철준은 회고록에서 그 때의 심정을 그대로 내비치고 있다.
지금부터 한발자국 한발자국은 조국을 향해 가는 것이다. 생각하니 꿈만 같고 그 기쁜 심정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그러나 다시 고개를 돌려 하남점과 남장마을쪽을 바라보니 궂은비 속에 어렴풋이 바라보이는 우리 학교 교사, 우리 분맹이 있던 집, 한해 겨울 두 여름을 지내온 우리의 두번째 고향, 마을사람들, 그들과의 석별의 정을 금할 수 없었다. 날이 채 밝기도 전 이른 새벽에 어마어마한 벼랑길을 기여올랐다. 일구어놓은 오지산의 감자밭, 나무 하나, 바위 하나도 다 눈에 익은 것 들이였다. 그곳에다 뿌린 우리의 땀은 그 얼마였던가!
정녕 정이 든 고장과 마을사람들, 피땀 흘린 밭들이였다. 영원한 석별과도 같아 리근영(李根荣)이라고 부르는 한 전사는 돌림신문 '곰방대' 제2호에 이런 노래를 실었다.
하, 그곳 바라보니 흰구름 가리였네
오지산도 맘에 있어 우리를 환송하나
아마도 감자동무의 눈물 가린 수건이리
태항지대는 처음 하루로정을 35리로 잡았다. 하루 저녁 지대 구락부 위원들이 모임을 가지고 벽보위원들이 행군도중 돌림신문 '곰방대'를 견지할 것과 '촌극—개똥이와 이뿐이'를 한주일에 한번씩 보장할 것을 결의하였다. 매개 분대에는 벽보통신원이 한명씩 있어 그들이 분대에서 생긴 좋은 일, 나쁜 일들을 회보하면 벽보위원들이 그것을 모아 교육적 가치가 있는 자료들을 32절짜리 종이 한장에 적어 맨 앞사람부터 뒤로 돌리면서 보게 하였다.
처음 하루로정 35리가 점차 70리, 80리로 늘어났다. 45분씩 걷고는 15분씩 휴식하였다. 이렇게 내처 20여일을 걸으니 북평에서 장가구로 통하는 철도선을 넘게 되였다. 이제부터는 일본군 패잔병의 반항과 국민당부대의 교란을 받을 가능성이 커간다. 부대가 강행군에 나서니 하루 로정은 100리, 120리, 140리로 늘어났다. 몸이 약한 사람들은 견지하기가 어려웠다. 선전고동사업의 필요에 따라 분대장이고 문오위원이고 나팔수인 최지준(崔智俊)은 고개를 만날 때마다 남보다 먼저 산마루에 올라가 나팔을 불면서 부대의 사기를 돋구어주군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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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군 전사 정길운의 상기 회고—<기로예지대>(《중국의 광활한 대지 우에서》. 연변인민출판사, 1987년 8월 출판, 제479~480페이지)에 따르면 화중지대 동지들과 하남 복양(濮阳)의 조선동지들을 합치니 100여명을 이루었다. 이들은 조선의용군 무정 사령원의 명령에 의하여 조선의용군 기로예지대로 개편되였다. 지대장 왕신호(즉 김웅)가 사업의 수요로 연안으로 떠나고 양원(杨远)이 새 지대장으로 부임되였다.
조선의용군 기로예지대는 신사군 기로예군구와 배합하여 하남땅에서 대적사업을 펼치다가 북상길에 올랐다. 1945년 10월 중순경에 기로예지대는 북평과 천진 사이 옥전(玉田)에서 태항산에서 오는 조선동지들과 만났다. 정길운은 무정를 비롯한 조선의용군총부 여러 지도자들을 이곳에서 만났다면서 ‘조선간부대대’를 3개 대대로 재편성하고 그 인수는 300여명, 대대장은 왕신호였다고 회고하였다.
그러나 조선의용군 출신인 신상초(申相楚)의 회고는 이와 다름을 보인다. 화중에서 연안으로 움직이던 부분 화중지대 대원들은 일제항복 소식을 듣고 방향을 바꾸어 태항산의 군정학교에 편입되여 20여일간 생활하였다고 한다.
보다 흥미로움은 화중동지들을 망라한 태항산의 300여명은 ‘조선의용군 간부대대’를 구성하고 산하에 2개 중대를 두었다는 사실이다. 태항산 간부대대 대대장은 화중지대 지대장 왕신호가 맡았다. 그들은 10월 초순경에 산해관에 이르고, 10월 중순경에 금주에 이르러 연안에서 나온 조선의용군 부대와 합류하게 되였다. 이는 신상초의 회고록 《탈출》(한국 태양문화사, 1977년 제160~173쪽)에 오르고 다시 염인호교수의 《조선의용군의 독립운동》으로 제322쪽에 올라있다.
조선의용군 간부대대는 태항산에서 출발한 태항산의 주력부대였다. 이들 태항산의 주력부대는 동북의 대문으로 불리우는 금주에서 연안에서 오는 조선의용군부대와 력사적인 회사를 갖는다. 그뒤 이들 전체는 금주에서 여러 패로 나뉘여 기차편으로 심양으로 이동한다.
조선의용군 화중지대 김현대의 회고(《중국의 광활한 대지 우에서》. 연변인민출판사, 1987년 8월 출판, 제538~539페이지)를 보면 1945년 8월 20일, 화중에 남아있은 조선의용군 편대는 신사군부대를 따라 강소 익림을 떠나 상해쪽으로 남진하였다. 이들 화중지대 100여명 동지들은 1946년 2월 화중건설대학 사생들의 열렬한 환송을 받으며 강소 회음현소재지를 떠났다고 하니 그들은 화중과 화북을 망라한 팔로군, 신사군 지구에서 맨마지막으로 떠나는 조선의용군부대였다.
심양 대회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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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녕성 소재지이고 동북 최대의 대도시로 불리우는 심양은 연안과 화중, 화북 등지를 떠난 조선의용군의 집결지로 알려진다. 심양에 제일 먼저 도착한 조선의용군부대는 하북 기열료군구에서 활동하던 동지들이다. 이들 100여명은 주연(朱然)의 지도하에서 조선의용군 선견대로 되여 팔로군 기열료(冀热辽)부대를 따라 심양에 진출하였었다(염인호. 《조선의용군의 독립운동》. 나남출판, 2001년 4월 출판, 제321쪽).
본문의 <조선의용군의 분맹사업>에서 이미 살펴보았지만 이들 조선의용군 선견대의 전신은 1944년 9월 13일에 하북 창려현의 한 농가에서 설립된 조선의용군 제1지대(선발대)를 가리킨다. 그 때 주연은 제1지대 정치처 주임을 맡고 지대장 리익성의 지도하에서 기동지구에서 무장활동과 관련 선전활동을 활발히 하다가 조선의용군 총부의 명령을 받고 선참 심양에 진출하게 되였다. 
주연이 이끄는 기동지구 조선의용군 선견대가 심양에 도착하니 1945년 8.15 전에 무정이 동북지구로 파견한 조선의용군의 한청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8월 15일, 일본 천황이 무조건항복을 선포한 그날 서탑(西塔)조선인중학교(지금의 제6중학교)에서 봉천(奉天, 심양)의 조선인거류민회가 주최하고 500여명이 참가한 조선인들 경축대회가 열리였을 때 한청은 일제의 잔여세력을 철저히 숙청하면서 항일전쟁승리의 과실을 보위하기 위해서는 조선의용군무장대오를 조직하여야 한다, 조선의용군에 입대할 것을 바란다고 호소하였다(《한청항일혁명회상록》. 연변인민출판사, 2011년 12월 출판, 제274페이지).
며칠후 8월 18일에 심양에서 드디여 한청을 지대장으로, 홍주흥(洪柱兴)을 부지대장으로 하는 조선의용군독립지대가 조직되였다. 이어 조선청년들이 너도나도 입대하니 대오는 신속히 9개 중대 1,100여명으로 늘어났다. 9월 중순에는 주연이 이끄는 조선의용군 선견대와 합치였다. 조선의용군 선견대는 금주(锦州)를 지나면서 변해덕(边海德)과 심명(沈明)이 조직한 의용군대오 350명을 받아들인데서 이들 대오는 450여명으로 늘어났다(《한청항일혁명회상록》. 연변인민출판사, 2011년 12월 출판, 제275페이지).
한청과 주연은 연안 조선혁명군정학교의 동창으로서 서로 익숙한 관계였다. 현실을 보면 한청 등이 심양에서 조직한 조선의용군독립지대는 1,100여명이라지만 간부가 따르지 못하고, 주연의 조선의용군 선견대는 독립지대에 비하여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적다지만 혁명에 참가한 오랜 대원들이 많아 간부우세를 가지고 있었다. 한청과 주연은 토의를 거쳐 독립지대와 선견대를 합병하기로 하고 그 이름을 조선의용군선견종대로 고치였다(《한청항일혁명회상록》. 연변인민출판사, 2011년 12월 출판, 제275페이지).
새로 조직된 심양 조선의용군선견종대는 한청이 종대장을 맡고 홍주흥이 부종대장을 맡았으며 주연이 정치부주임을 맡았다. 종대 참모부는 산하에 군사훈련과와 후근과, 선전과, 간부과, 민운과 등을 설치하였다. 한청의 회고에 따르면 중공당원은 한청 한사람으로서 신입당원을 발전시킬 수도, 당조직을 건립할 수도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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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청의 회고록(이하 모두)에 따르면 1945년 10월 중순에 심양주둔 쏘련군 헌병사령부에서는 국민당군대가 동북 각 도시를 접수하니 팔로군과 팔로군 소속 부대는 심양을 떠나 80리 밖으로 나가달라고 요구하였다. 한데서 조선의용군선견종대는 심양 소가툰을 경유하여 단동(丹东)으로 가서 조선인학교에 주둔하게 되였다. 단동에 도착한 오후 조선 평안북도 주재 쏘련군사령이 련락병을 보내 이튿날 아침 7시 압록강교두에서 만날 것을 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