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세에 신입생들과 함께 4년 대학 공부하면서
发布时间:22-01-17 09:18  发布人:金昌永    关键词:   

나는 2003년 10월 14일에 정년 퇴직하였다. 허나 퇴직한 후에도 이미 착수해오던 번역 (80여만자), 창작(5여만자), 심열(20여만자) 등 편집출판 사업에 3년간 눈코 뜰 사이 없이 분망히 보냈다.

‘이러다간 로후 생활이 억망이 되겠구나, 어떡 한담?’

생각 끝에 나의 신체 상황과 애호에 맞는 로씨야어 학습에 힘써 보려고 작심했다. 왜냐 하면 중학교와 대학을 다닐 때 로씨야어를 배웠고 또 로씨야어 과대표로도 활약한 적이 있었으니깐.

떼를 써서 얻어낸 방청생 자격

2006년 8월 하순의 어느날 나는 무작정 연변대학 외국어학원 로씨야어학부 학부장 사무실에 찾아갔다.

그 때 로씨야어학부 학부장은 사유로 안 계시고 한 40대 되는 당지부 서기가 전 학부 당정 사무를 맡아보고 있었다.

“어느 학급 학생의 학부형이신가요?” 당지부 서기는 아주 상냥하게 물었다.

“저는 이미 퇴직한 로인인데 이 학부의 방청생으로 되려고 찾아왔습니다. 꼭 받아주십시오.” 나는 애걸하다 싶이 청을 들었다.

“이렇게 70세를 바라보는 로인을 받아들인 전례가 없었고 또 학원 지도부와 학교 지도부에서는 절대 비준하지 않을 겁니다.” 그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저는 로어 학습을 하려고 연길시내 곳곳을 다 찾아보았습니다. 영어, 일어, 한국(조선)어 강습반은 많고도 많은데 로어 강습반만은 찾지 못하여 여기까지 찾아왔습니다. 학원과 학교 지도부에 대해서는 제가 알아 잘 말하겠으니 서기님 제발 동의해주십시오.”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대답 대신 “저의 수업시간이 되여서 나가봐야 하겠습니다”하는 말을 남기고는 사무실을 나갔다.

첫날은 그렇게 허탕치고 말았다. 그 이튿날부터 나는 련속 며칠간 아침 8시에 학교에 가서는 로씨야어 학부장 사무실에 ‘출근’ 인원이 되여 신문도 보고 위생 청결도 하면서 떼를 썼다.

8월 30일 아침 종전 대로 ‘출근’ 하였더니 당지부 서기가 나를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그럼 9월 3일부터 1학년 신입생들과 함께 학습하십시오. 그러나 3가지 요구는 꼭 지켜야 합니다. 첫째, 맨 뒤줄에 앉아야 하고 둘째, 수업시간에 손을 들고 질문하지 말아야 하며 셋째, 지각하여서는 절대 안됩니다.”

나는 너무도 기뻐서 거듭 감사를 드리며 “선생님이 말씀하신 3가지 요구를 꼭 준수하겠습니다”라고 다짐하였다. 4년간의 학습생활에서 상기 3가지 중에서 첫번째와 세번째는 에누리 없이 준수하였지만 두번째 요구만은 준수하지 못했다. 왜냐 하면 공부를 시작하여 얼마 안되여 선생님들이 나한테 질문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2006년 9월 3일부터 나는 연변대학 로씨야어학부 방청생이 되였다.

‘할아버지’방청생

우리 반은 전국 각지에서 온 학생 26명에 나까지 합하면 27명 학생이 있었다. 한족, 조선족 외에도 만족, 회족, 몽골족으로 다민족 대가정이였다. 남학생은 나까지 7명이고 그 외 녀학생이 20명이였다.

나의 옆에는 키는 나와 비슷한데 깜찍하고 몹시 령리하게 생긴 조선족 남학생이 앉았다. 그는 엄청 다정다감하였는데 내 곁에 앉아서는 말끝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하였다. 그 애는 전해에 우수한 성적으로 연변대학 로씨야어학부에 입학하였는데 입학한 첫해에 그만 인터넷 게임에 빠지다보니 락제를 하여 우리 반에 내려왔다. 처음에 우리 반 학생들은 내가 그애의 할아버지여서 며칠간 그와 함께 수업에 참가하여 그의 마음을 달래여주는줄 알았다고 한다. 그러나 여러 날이 지나도 내가 끄떡하지 않고 자기들과 꼭 같이 수업에 참가하니 그 애의 할아버지가 아닌 것은 알게 되였는데 도대체 이 동창을 어떻게 불러야 하는가가 문제로 되였다. 결국에는 반급 회의에서 토론을 거쳐 나를 ‘할아버지’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왜냐 하면 내 나이가 그들의 할아버지와 비슷하기 때문이였다.

나는 장장 4년간 그들과 함께 학습하고 생활하였다.

내가 금방 학습을 시작할 때 우연한 기회에 우리 선생님들이 주고받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나를 ‘로선생(老先生)’이라고 불렀다.

“로선생이 학습하려는 정신은 참 좋은데 끝까지 배워낼 수 있을가?”

“글쎄, 얼마전에 연변조선족자치주 정부에서 30세 좌우의 부국장급 간부 30여명을 우리 학부에 보내여 로어 학습을 하게 하였는데 한달도 안되여 전부 돌아갔었지. 로선생은 그들보다도 년세가 더 많으니 3주일도 견지하기 어려울 거야.”

그들의 의론은 나를 더욱 분발하게 하였다. 나는 꼭 학습을 끝까지 견지하여 훌륭한 성적을 따내고야 말겠다고 다짐하였다.

얼마 안지나 1학년 전학기 중간 고사가 있었다. 시험문제는 아주 간단하였다. 100개 단어에서 50개는 로씨야어를 한어로 번역하고 50개는 한어를 로씨야어로 번역하는 문제였는데 나는 참답게 복습한 데다가 명제가 간단하여 97점을 맞고 5등 안에 들었다.

그 뒤로 선생님과 동학들이 나를 보는 눈길이 달라졌다. 이 늙은이를 얕잡아보지 말아야겠다고 말이다.

그러나 필경 나는 60세를 훨씬 넘은 사람이고 반급 동창들은 20세도 안되니 어찌 그들과 비기랴.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들의 학습성적은 매일과 같이 달라지는데 나는 헐레벌떡 따라가느라 매일매일 숨 가쁘게 달렸다. 게다가 나이 앞에 장사가 없다고 몸이 마음을 따라주지 않았다. 때론 진한 커피 두잔을 련속 마셔도 수업시간에 몰려오는 졸음을 달랠 길 없었다. 수업시간에 졸음이 오는 주되는 원인은 신체가 피로한 것도 있었지만 과문을 잘 리해하지 못하는 데도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나는 단단히 결심을 내렸다.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그날 배울 과목을 예습하였다. 이 방법은 확실히 효과를 보았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의 강의가 머리에 쏙쏙 들어오니 졸음도 온데 간데 없어졌다. 이리하여 나의 학습성적은 줄곧 반급에서 중상등에 들었다.

2학년 기말시험이 끝난 뒤 나는 학교에서의 학습을 접으려고 했다. 이 정도로 공부하면 전문대 수준에는 도달하였으니 집에 돌아가 계속 자습을 하면서 사전을 뒤지면 웬만한 로씨야어로 된 우화, 동화 혹은 꽁트 같은 것은 중국어 혹은 조선어로 번역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이에 선생님들은 한사코 말리면서 3학년부터는 로씨야 문학과 대외무역 과목에 들어가니 배울 것이 더 많고 4학년에 가서는 졸업 론문 쓰기와 실습이 있어 부담이 별로 크지 않아 능히 견지할 수 있으니 꼭 끝까지 견지하라고 격려하였다. 우리 반 단지부 서기와 반장은 나를 찾아와 격려하였고 학생들은 ‘할아버지 떠나지 마세요. 우리랑 함께 졸업합시다.”하면서 간곡히 부탁하였다. 나는 선생님의 지도와 동창들의 부추김에 못 이겨 끝끝내 4년간의 대학 생활을 견지하였다.

4년 공부를 끝마치던 그 해 우리 학원 권원장이 대학 4년 학습 증서를 몸소 나한테 발급하였다(학습 증서에 실습 기간은 적지 않고 교실에서 학습한 기간만 적었다). 참 이상도 하였다. 비록 학원에서 발급한 학습 증서이지만 젊은 시절 첫 대학졸업 증서를 탈 때보다 더 격정적이여서 학습 증서를 받는 순간 자연스레 눈시울이 불거졌다.

교정에서의 늘그막 학습은 힘들면서도 아주 즐거웠다. 특히 외국어 학습은 더 별미였다. 배우고 보니 세상으로 향한 창문이 조금 더 열려진 것 같았다. 우리 글과 말과는 판판 다른 어계의 언어문자를 배우니 그 나라 그 민족의 문화생활을 만끽할 수 있고 또 공부를 해냈다는 자부감과 자신심으로 하여 늘그막 삶이 더욱 충실해진 것 같았다.

재미 있었던 일들

우리 학부에는 8명의 선생님들이 계셨는데 모두 젊고 씩씩한 선생님들이였다. 그중 남성 선생님이 두분이였는데 한분은 총각이였다. 그리고 녀성 선생님은 여섯분인데 처녀 선생님이 두분이나 있었다. 그들은 모두 자기 직업에 아주 충성하였다. 또한 나에 대해서도 가족처럼 돌봐주었다. 그러나 수업시간만 되면 여느 학생들과 꼭 같이 대하였다. 특히 돌림으로 로씨야어 랑독을 할 때면 번마다 한번도 나를 빼놓지 않고 지명하였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정말 진땀을 뺐다.

우리 반 로씨야인 선생님 세르게이는 키가 무척 크고 수염이 더부룩하며 번대 머리인 50대 남성이였다. 그는 담배와 술을 무척 좋아하였다. 90분 수업시간의 중간 5분 휴식할 때면 교실 제일 뒤켠에 와서 나의 이름(학창 시절 나의 로씨야어 이름은 유리였고 애칭은 유라였다)을 부르면서 나의 어깨를 툭 치고는 복도로 같이 나가자고 손시늉을 한다. (로씨야 사람들은 제스츄어—손시늉을 아주 잘 한다) 꼭 마치 친구처럼. 그는 사우나를 무척 즐겼다. 그의 말에 따르면 사우나가 원동지구 로씨야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떠날 줄 모른다고 했다. 그의 고향 마을엔 거의 집집마다 간이 찜질방이 있다고 했다. 나는 한달에 한번씩 그를 불러서는 사우나에 다녀오곤 했다. 그 때면 그는 아이들마냥 좋아서 싱글벙글한다. 사우나에서 우리 둘은 서로 때도 밀어주고 물장난도 한다. 비록 동서방 문화는 다른 점이 많고 피부색과 얼굴 모양이 다르다지만 사람과 사람간의 진심 어린 교류에는 별 다른 데 없었다. 그 후 그는 나의 나이를 알고는 가는 곳마다 삼촌이라고 불렀다. 내가 그보다 10살 더 많고 그의 엄마보다는 10살 적었으니깐.

그러나 수업시간과 시험을 볼 때면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여버린다. 아마 2학년 기중시험으로 생각된다. 나는 다른 애들처럼 한줄로 서서 시험문제를 제비 뽑은 다음 10분간 준비하고 5분간 구두시험을 봐야 했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준비를 마치고 5분간 열변을 토하였는데 그는 머리를 숙이고 필기장에 무엇인가 적기만 하였다. 답변이 끝나자 그는 나에서 7.5점(만점 10점)을 주었다. 나는 억울해서 왜 이렇게 낮게 주는가고 물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자기의 필기장을 보여주었다. 기록을 보니 어떤 문제에서는 0.1점을 깎고 어떤 문제에서는 0.5점을 깎았으며 밑에 평어도 적혀있었다. 나는 입을 딱 벌리고 아무 말도 못하였다. 그러나 속으로는 이 사람들은 정말 진지하고 조금도 사정을 봐주지 않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것은 아마도 3학년 학기말 로씨야 문학 과목 시험 때일 것이다. 우리는 아주 널직한 계단식 교실에서 시험을 봤는데 나는 반장이 배치한 대로 교실 서북쪽에 앉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할아버지가 이곳에 앉으면 동창들은 마음이 놓인다고 하였다. 그날 시험문제 량이 어찌나 많은지 8절지로 6페지나 되였다. 게다가 인쇄된 글자가 어찌나 작은지 나는 600도 되는 돋보기를 끼고도 잘 보이지 않아 확대경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첫 문제는 100개 단어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인데 하나에 0.1점, 모두 10점이였다. 나는 문제가 잘 보이지 않아 속도가 느려 시험 시간이 30분 지나도록 첫페지 중간 부분에서 헤매고 있었다. 방정 맞게 그날따라 순회 감고에 나의 딸인 일본어학부 학부장도 있었다. 딸애는 내 곁을 돌 때 내 어깨를 가볍게 치고는 귀속 말로 “다른 애들은 이미 2페지, 3페지까지 썼어요.”라고 하였다.

‘이러다간 60점도 못 맞겠는데 어떡 한담?’

‘차라리 점수가 높은 제일 마지막 페지 작문(40점)부터 써보자.’

나는 이렇게 작정하고 6페지부터 꺼꾸로 답안을 작성하였다. 작문은 제목을 지정하고 글자수도 정하였다. 다른 애들은 생활 경력이 짧다나니 아무리 써도 몇글자를 못쓰지만 나는 사회 실천 경험이 많다보니 쓸 내용이 많았다. 그래서 나의 작문 성적은 거의 만점이고 총점은 다른 애들과 비슷했다.

2010년 6월 30일은 날씨가 화창했다. 그날 우리들은 졸업사진을 찍었다. 전날 학부장은 졸업 기념사진을 찍는데 나도 참가하라고 하였다. 나는 너무 기뻐 양복에 넥타이까지 매고 집을 나섰다. 우리 학원 총각 보도원 선생님이 나를 보더니 “학생이 어찌 이런 복장을 입고 졸업 사진을 찍어요?”하면서 나에게 학사복을 입히고 모자까지 씌워주었다. 양복 우에 학사복을 입고 모자까지 쓰니 더워서 땀벌창이 되였으나 청춘을 되찾은 것 같은 심정이여서 하마트면 입이 두 귀에 걸릴 번 하였다.

외국어학원에는 일본어, 영어, 로씨야어 3개 학부가 있었는데 당해 졸업생이 150여명이나 되여 기념사진을 찍는 데 모두 8줄로 서서(지도자와 로교수들은 한줄로 앉아있었다) 찍었다. 나는 남자라고 제일 뒤부터 두번째 줄에 섰는데 아래를 내려다보니 눈앞이 아찔해났다. 우리 반 남학생 여섯은 나의 안전을 고려하여 호위병마냥 내 뒤줄에 서서 찍었다. 그날 사진사는 50대의 남자분이였는데 사진기 렌즈를 맞추느라 무척 애를 썼다. 그러다 맨 뒤 두번째 줄 제일 복판에 할아버지 한분이 서있으니 너무 어이가 없어 나가라고 손짓하였다. 사진사와의 거리가 너무 멀고 또 애들이 왁짝 떠들다나니 사진사의 말은 한마디도 들리지 않고 오히려 그가 손짓하는 켠으로 옮겨서라는 걸로 착각하고 한발 옮겨섰다. 날씨가 너무 더워 원장과 로교수님들은 사진을 빨리 찍으라고 했고 사진사는 땀벌창이 되여 렌즈를 조절하면서 마지막으로 전원을 살펴보았는데 이 늙은이가 그냥 제자리에 서있으니 너무도 화가 나서 뭐라 중얼거리면서 신경질적으로 손을 련속 둬번 내저었다. 나는 두발 더 옮겨서라는 줄 알고 또 두발 옮겨섰다. 더 참지 못한 사진사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이때 눈치 빠른 우리 학원 보도원 선생님이 사진사 앞에 성큼 나서서 “이분이 함께 사진 찍는 일은 학원 지도부에서 비준한 일이고 저 할아버지는 꼭 우리와 함께 사진을 찍어야 합니다. 사후에 상세히 알려드리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사진사는 그래도 리해가 안되는 듯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사진기 앞으로 돌아가 셔터를 눌렀다.

 
 

그리고 더 재미 있는 일이 있었다. 인생 일흔 고개를 바라보는 아비는 남학생이라고 학생들 속에 서있는데 그 딸애는 학원 지도자, 로교수들과 함께 앞줄에 앉아있는게 아닌가.

지금도 가끔 이 집체사진을 꺼내여 보노라면 감개무량해진다. 사진 속의 늙은이도 마치 20대 새파란 청춘으로 되돌아간듯, 청춘 기백이 찰찰 넘치는 애들과 함께 찬란하게 웃고 있었다. 사진을 보면 볼수록 격정에 차 넘치고 자호감과 긍지감으로 기쁘기만 하다.

귀여운 나의 동창생들

4년간의 학창 생활에서 나는 새시대 대학생들의 개성을 엿볼 대로 다 보았다. 40여년전 나도 대학생이였고 또 대학교 공청단위원회 사업을 하였다. 그래서 대학생 생활에 대해서는 생소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의 대학생들은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새시대 청년들이다. 그들의 특색을 다음과 같이 개괄한다.

대담하다. 사회에 대한 그들의 관찰은 다방면이고 또 자기의 견해를 대담하고 숨김없이 표현한다. 사회 생활에서 나타나는 문제점과 부정적인 면을 보아내고 자기들의 불만 정서도 그대로 토로한다. 대다수의 애들은 정면적이고 전면적인 안목으로 당과 정부의 시정 방침을 분석한다.

민감하다. 그들은 자기들의 정치 주장과 관점을 선명하게 표달하고 또 실천하려 한다. 졸업할 때 우리 반에서 공산당에 가입한 학생이 5명으로 반급 학생수의 근 1/5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4, 50년전에는 대학 졸업 시 입당한 학생수가 지금보다 훨씬 적었다. 이전의 대학생들은 어리무던하고 생각이 비교적 단순하였으나 지금 애들은 어찌나 약삭빠른 지 선생님이나 학부모들이 한마디 지적해주면 그들은 벌써 두세 걸음 앞질러 생각한다.

학습에서 두가지 극단적인 현상이 나타났다. 우리 반에서 3명의 학생은 로씨야에 가서 2년간 공부하고 졸업장도 탔으며 어떤 애들은 졸업 후 외국 대사관이나 령사관에 가서 로씨야어 번역까지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몇몇 학생은 졸업장도 제때에 타지 못하였다.

생활면에서도 두가지 극단적인 현상이 나타났다. 우리 반 동창들의 80%가 농민의 아들딸들이고 근 절반 학생들이 빈곤 지역에서 왔다. 대부분은 리상이 있고 의지가 강하며 경제상의 난관을 능동적으로 이겨내고 우수한 학습성적을 따냈다. 빈곤 지역에서 온 두 녀학생은 여름철에도 식비를 절약하느라 점심시간에 교실에 남아서 사탕 2알로 그 것도 값이 제일 싼 싸구려 사탕을 입에 넣고 주린 배를 달래며 공부했다. 그들 둘은 모두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입당까지 하였다. 그러나 가정 경제상황이 좋은 서너명 학생은 부모님들이 외국에 가서 피땀으로 번 돈을 마구 탕진해버렸다. 게다가 그들 거개가 학습성적이 좋지 않았다.

4년간의 학습 생활에서 그들은 나를 가족으로, 친구로, 동창생으로 여겨주었다. 졸업할 때 나보고 부디 건강 장수하고 10년 지어 20년 뒤에 동창 모임을 가질 때까지 핸드폰 번호도 바꾸지 말고 총련락관이 되여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오냐, 이 할아버지 동창생은 훌륭한 정보 련락관이 되여 너희들의 희소식을 학수 고대하겠노라.”

/손원종